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1)화 (1/90)

<1화>

내 약혼자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게는 보여 준 적 없는 다정한 얼굴로 다른 여자에게 팔베개를 한 채.

“폴리우스.”

“멜라니? 생일 파티는 어쩌고 네가 여기에 왜……”

항상 자신만만하던 얼굴이 일그러져 허둥지둥하는 꼴이 우스웠다.

“다른 여자들과 마음이 통한 적은 없다고 해 놓고.”

“내가 다 설명할게. 이건 정말 오해야.”

글쎄, 어떤 우연이 겹쳐야 외간 여자와 그런 꼴로 붙어 있는 건지.

옹졸할 게 뻔한 그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서 허겁지겁 일어나는 폴리우스보다 빠르게 나온답시고 급하게 몸을 돌려 방을 뛰쳐나갔는데…… 그 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젠장……’

약해 빠진 내 몸이 갑작스러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전혀 놀랄 것 없는, 오늘로 수백 번째 기절이었다.

* * *

<서자인데 사업으로 제일 잘나가!>라는 판타지 소설을 읽은 적 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사생아라고 무시 받는 남자 주인공 폴리우스가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고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는 내용이다.

폴리우스가 뛰어난 능력이나 훌륭한 인성으로 큰돈을 번 건 아니었다.

그가 특출한 것은 단 하나. 내로라하는 여자들을 ‘어장 관리’ 하며 자신을 위해 일하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그 어장 속 물고기 중에 눈에 띄는 호구가 있었는데……

한 공작 영애는 그의 사업을 위해 자신의 명의를 빌려주고 매번 그에게 엄청난 재화를 챙겨 주었다.

“멜라니. 내가 큰돈이 왜 필요하다고 하는지…… 안 물어봐?”

“폴리우스 님이라면 사정이 있으셨으니까 이런 말을 하시겠죠. 저는 당신이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라는 걸 알아요.”

응,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라서 다른 여자를 도우려고 그 돈을 쓴다.

심지어 공작 영애는 그에게 돈을 주기 위해 대출까지 받는데 폴리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매번 돈을 더 요구했다. 결국 그 돈으로 도와준 여자에게 생색을 내는 것도 그다.

‘아니, 평소에 돈 가져가는 걸로도 모자라 상단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게 해? 해 달라는 주인공이나 허락해 주는 공작 영애나 둘 다 이해가 안 가는데?’

후일 빚을 갚지 못해 공작가의 상단은 고리대금업자에게 날아갈 위기에 처하고, 공작 영애는 결국 아버지인 클로틸드 공작에게 들키고 만다.

“다른 것도 아니고 클로틸드 상단을 담보로 대출을 받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냐. 일찍 물려받고 싶다고 하더니 그놈에게 큰돈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느냐?”

그리고 항상 자상하던 공작이 이토록 화를 낸 이유가 있었다.

“이 상단은 죽은 네 어머니가 네게 남긴 유산이 아니냐!”

그랬다. 클로틸드 상단은 본래 죽은 공작 부인이 경영하던 것.

죽은 공작 부인을 끔찍하게 사랑해 재혼도 하지 않은 공작에게는 하늘이 무너질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공작 영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제게 남기신 건데, 왜 아버지가 화를 내세요? 아버지는 제가 아플 때 폴리우스 님과는 달리 해 준 것도 없잖아요!”

“멜라니,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제가 아버지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분인걸요. 저는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크으, 어머니의 유산을 날려 먹는 것에 이어 병약한 딸을 지극정성으로 키운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까지!

부모님께 골고루 불효를 실천하는 공평함 봐라.

그러나 그녀가 그 길로 가문을 뛰쳐나와 주인공의 저택으로 향하는 그 순간 주인공은 무얼 하고 있었느냐.

다른 여자들과 열심히 시시덕거리느라 바쁘셨다.

“공작 영애보다 제가 폴리우스 님을 더 사랑한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요!”

“아하하,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약혼녀겠지만…… 나를 좋게 봐 준 건 고마워.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사랑해야 할 사람은 뭐냐.

그리고 말로만 싫다고 하지 여자들이 유혹하는 거 다 받아 주고요? 여지 엄청나게 주면서 아주 좋아 죽고요?

‘인간적으로 널 도와줄 수 있었던 건 약혼자인 공작 영애 덕분이라고 말하지 그래?’

책을 덮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지만, 마지막 권이었기에 나는 이를 악물고 페이지를 넘겼다.

‘지금 내용으로는 바로 완결 날 것 같지 않은데 페이지가 왜 얼마 안 남았지? 악역하고 싸우는 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리고 모든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뭐야, 여기서 완결이라고?”

내용이 그따위니 인기는 좋지 않았고, 결국 조기 완결 엔딩……

결말은 얼렁뚱땅 주인공 폴리우스가 잘 먹고 잘 사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공작 영애는 마지막에 어떻게 되느냐고?

희귀병을 앓아 원래 몸이 좋지 않은 그녀는 빚을 갚으려 노력하다 무리해서 죽는다.

“주인공만 잘 먹고 잘 살면 다냐!”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매번 헌신하는 공작 영애가 이상하게 눈에 띄었던 나는 공작 영애의 비참한 결말에 화가 났다.

그렇게 분개하면서 책을 집어 던졌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상하게 일찍 죽은 시한부 공작 영애의 이름이 익숙하다.

‘멜라니 클로틸드.’

이거 내 이름이잖아?

그랬다. 소설 <서자인데 사업으로 제일 잘나가!>는 내가 멜라니로 태어나기 전의 세계에서 읽은 책이었다!

‘내가 후레자식이라니!’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방금 떠올린 전생과 이곳에서 환생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의 통증이 엄습했다.

“으으……”

“갑자기 몸을 일으키시면 안 돼요, 아가씨!”

옆에 있던 하녀가 익숙하다는 듯이 나를 챙겼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여기저기 아프고 특히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진통제 좀 줘……”

목 막혀 죽을 것 같은 양의 약을 힘겹게 삼키자 옆에서 하녀가 걱정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폴리우스 님이 안 계시니까 드리는 거지만 정말로 진통제를 줄이셔야 해요. 아시잖아요.”

“그래, 계속 독한 진통제를 먹으면 온몸이 굳어 버릴 수도 있겠지.”

원인 모를 희귀병으로 괴로운 것도 문제인데, 일반 약이 듣지 않아 먹는 독한 진통제의 부작용도 산더미다.

“그뿐만 아니라 미음이 아니면 소화도 잘 못 시키시고…… 저번에는 갑자기 경련하며 쓰러지시고……”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통증을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못 견디겠다.

소설 속 멜라니가 주인공의 어장을 알면서도 그를 버리지 못한 이유는 그가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요정의 축복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들으며 독한 약으로 겨우 버티던 나는 그래서 폴리우스와 자주 교류하다가 약혼녀가 되었고…… 끝내는 의존하게 되었다.

‘아픈 사람이 부작용 없는 인간 진통제에 의지하는 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

나는 욱신거리는 머리로 내가 떠올린 것들을 정리했다.

‘어장 속 물고기 중 하나……’

그것도 결국 죽는 시한부 공작 영애…… 후레자식, 불효녀……

아니, 남의 일인 양 욕할 게 아니지. 그게 바로 난데. 내가 저질렀고 앞으로 저지를 일들이 아닌가.

전생의 기억과 현생의 기억이 섞여서 혼란스럽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 이대로 살 수는 없다는 거.

“폴리우스 님은 내가 쓰러진 거 보고 뭐라고 하셨니?”

“그게……”

* * *

본인의 외도 때문에 약혼녀가 쓰러졌으니 곧 모습을 보이리라 생각했던 폴리우스는 한참이 지나서야 날 찾아왔다.

“오랜만이야. 대출이 완료돼서 광산 매매가 끝나 서류를 보여 주려고 왔어. 명의는 너로 되어 있으니까 너도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찾아온 이유는 내 예상과는 달랐다.

‘만나자마자 바로 돈 이야기라니.’

나는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보았다. 광산의 소유 문서와 대출 관련 문서들이었다.

‘명의는 너로 되어 있으니까 보기는 해야 할 것 같다’는 게 무슨 개소리인가. 광산을 사기 위해 받은 대출을 갚는 건 결국 난데.

‘빚 때문에 광산이라도 팔아야 하는데 아무도 안 사 준다고 어떤 영애가 울었던가?’

그래서 그 영애의 아버지가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에 내놓은 폐광을 그냥 사 버린 거다.

‘이러면서 그냥 친구라고 하다니.’

세상 어떤 남자가 단순한 여자 사람 친구한테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아니, 백번 양보해서 해도 된다고 치자.

그런데 왜 약혼녀의 돈과 명의로 할 생각을 하지? 그리고 그걸 들어주는 나는 또 뭐냐고.

이런 걸 바로 심신미약이라고 한다. 인간 진통제를 위해 모든 걸 바쳤잖은가. 제정신이 아니지.

“멜라니……?”

“…….”

“왜 그래. 어디 아프…… 아, 내가 얼른 고통을 덜어 주는 축복을 걸어 줄게. 그다음에 이야기를 마저……”

나는 손을 들어 내게 뻗으려는 폴리우스의 손길을 단호하게 막았다. 더 이상 인간 진통제에게 의존하며 휩쓸려 다닐 수는 없었다.

“그 전에 먼저 할 말이 있지 않나요?”

“응……?”

원작이 폴리우스의 좋은 면만 최대한 비추었다는 게 실감 났다.

소설에서는 다른 여자와 침대에 있었다가 연인이 쓰러졌는데, ‘오해를 잘 풀었다’라고만 언급되어 있으니까.

‘내가 쓰러진 것에 대한 걱정, 그렇게 된 이유보다 돈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게 ‘오해를 잘 풀었다’였나?’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여태까지 얼마나 호구로 살았는지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다른 여자랑 있었던 것 때문에 그래? 미안해. 내가 고통을 줄여 주는 축복을 걸어 주다가 자세가 편해졌나 봐.”

본인의 잘못을 이제야 떠올리는 머리라니, 아주 대단하다.

“조금만 더 편하다가는 제국에 태어나는 아이가 모두 폴리우스 님의 아이겠어요.”

“하하…… 응?”

내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하자 따라 웃던 폴리우스의 웃음이 뚝 멎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기껏 사과하고 있는데 비꼬지는 말자.”

“그럼 직설적으로 말할게요.”

나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헤어져요.”

“뭐?”

폴리우스에게 바친 헌신의 대가는 가문의 몰락과 아버지에게 지옥 같은 불효녀가 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폴리우스가 날 치료해 주는 건 아니야. 성녀가 나타날 때까지 버티면 돼.’

원작처럼 빚을 갚으려고 무리하거나 폴리우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적당히 몸 상태를 관리하면서 소설에서 성녀가 나타났던 때까지 내 일을 하면 된다.

폴리우스에게 정신을 못 차리던 과거의 나도 아니고, 소설의 내용도 아는 이상 폴리우스보다 먼저 성녀를 돕고, 그녀의 치료를 받아 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 여기서 끝내자고요.”

주인공님, 네 어장 이제는 탈출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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