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지금 뭐라고 했어? 끝내기는 뭘 끝내.”
헤어지자는 이야기에 폴리우스는 퍽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곧은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자 그는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멜라니. 난 널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그걸로는 안 되겠어? 너 같은 의미의 여자는 절대로 없다고 저번에도 내가 말했…… 하아, 피차 피곤하게 하지 말자.”
“저야말로 이미 지칠 대로 지쳤어요.”
“너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네가 그렇게 매정하게 굴 수 있어?”
“그렇지만 너무 이상해서요. 왜 이해해 줘야 하는 상황, 어쩔 수 없는 일은 젊은 여자하고만 그렇게나 많이 생기는지요.”
하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나는 입꼬리에 걸린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여태까지 폴리우스 님이 남자와 추잡한 소문이 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죠.”
“추잡하다니, 말조심해!”
“그러는 폴리우스 님이나 행동을 진즉 조심하지 그랬어요?”
“화가 났다고 그런 말까지 하는 네가 더 잘못한 거야. 이건 질투로 봐줄 정도가 아니잖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기는 했지만 헤어지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내 이별 통보를 투정 정도로 받아들이는 걸 보면.
“헤어지자는 말은 진짜 심했어. 사과 몇 마디로는 절대 그 말 용서 안 해!”
끝내자는 말에 제 잘못을 조금이라도 반성할까 했는데, 잠깐 놀라더니 오히려 화를 버럭 내면서 가 버릴 줄이야.
자신을 용서하라며 매달리는 것도 피곤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어이가 없다.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 봐 대가리가 꽃밭이네. 하긴 내가 그동안 참아도 너무 많이 참았지.’
나는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여기저기서 수습해 주고 좋아해 주는 운이 따르니 머리가 텅텅 빌 수밖에.
하지만 곧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헤어졌다고 주변에 먼저 알리고…… 조금이라도 내 편을 만들어 둬야겠다.’
폴리우스의 바람기에 예민했던 나는 폴리우스의 외도를 막느라 주변 평판이 좋지 않은 편이다.
그에 비해 여자들에게 다정한 폴리우스는 평판이 꽤나 좋은 편이니 후일을 대비해서라도 평판을 회복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초대장을 받은 것 중에 고르고 골랐다. 몸이 좋지 않아 여러 곳에 참석하는 건 무리일 테니 사교계에 영향력이 있는 모임에 참석하는 게 최선이니까.
* * *
나흘 뒤, 나는 아름다운 고택을 찾았다. 여론 몰이를 할 목적으로 택한 곳은 교양 있는 부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어머, 클로틸드 영애께서 오셨군요.”
“쓰러졌다는 소문은 들었답니다.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니에요?”
“한동안 얼굴을 못 비쳐서 죄송해요. 몸은 아직도 좋지 않지만, 부인들을 만나고 싶어서 조금 무리하면서 나왔답니다.”
나는 완벽한 예법으로 부인들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하나씩 돌렸다.
“어머, 이게 뭔가요?”
“그동안 부인들이 퍽 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약소하게나마 마음에 드실 물건을 골라 봤답니다.”
클로틸드 가문을 뒷배로 업고 설친다, 돈으로 환심을 사려 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적당한. 그러면서도 구하기 쉽지 않은, 격식 있는 물건이었다.
‘고르기 쉽지 않았지.’
과연, 선물을 확인한 부인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호호, 클로틸드 영애께서는 언제봐도 참 요즘 영애 같지 않네요.”
“부인들께서 귀한 가르침을 주시는 덕분이죠.”
지긋한 나이의 부인들만 있으니 내가 폴리우스에게서 떨어지라며 패악을 부린 젊은 영애들도 없다.
‘이런 부인들부터 시작해서 내 이미지를 조금씩 회복해야 해.’
더군다나 이 나이대의 부인들은 폴리우스의 어장 밖이니, 약혼자의 바람 때문에 헤어졌다는 사실을 차분히 들어 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폴리우스 영식도 병문안을 갔었나요?”
마침 대화에서 폴리우스의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폴리우스 영식과…… 얼마 전에 파혼하게 되었답니다.”
“어머!”
“죄송해요. 오랜만에 만나는데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드려 분위기를 흐렸네요.”
여느 때처럼 창백한 얼굴을 화장으로 애써 감추지 않았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누가 봐도 안색이 좋다는 말은 못 하겠지.
초췌한 얼굴과 아까 준 선물 덕인지, 평소보다 너그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클로틸드 영애가 사과할 건 아니지요.”
“맞아요. 제일 마음 아픈 사람이 바로 영애일 거 아니에요?”
내가 폴리우스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평소 나와 친하지도 않던 부인들까지 나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데, 뜻밖에 이 사교 모임의 수장 격인 텔리다 부인이 입을 열었다.
“어쩌다 그런 보석 같은 남자와 헤어지게 된 건가요?”
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보석이라니…… 폴리우스 놈에게 공들여 세공할 가치가 있던가?’
이성적이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텔리다 부인이 누군가를 이렇게 칭찬하는 건 처음 들었다.
“폴리우스 영식처럼 건실한 남자는 또 없어요. 클로틸드 영애, 어른스러운 줄 알았더니 아직 어리군요.”
나이가 들면 폴리우스가 멋있어 보인다는 건가. 수십 년의 인생을 낭비하며 살고 싶지는 않은데.
“젊은 사람들은 사소한 일로도 다투곤 하지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자존심 내세우지 말고 먼저 잡아요. 폴리우스 영식은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퍽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시는군요?”
분명 텔리다 부인은 폴리우스와 별 친분이 없다. 거기다 그녀는 고지식한 면이 있어 사생아인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텐데, 어째서?
“어제 마차 사고가 났는데, 지나가던 폴리우스 영식이 도와주었지 뭡니까.”
그렇다. 역시 내가 착각했을 리가 없다……
왜 길을 걷다가도 이 정도 되는 거물에게 평판이 좋아지는 일이 생기는 걸까. 대단한 주인공 버프였다.
“……폴리우스 영식의 주변에는 많은 여성분이 있으니, 저는 이미 잊었을 거로 생각해요.”
나는 조심스럽게 헤어진 원인이 폴리우스의 바람기 때문이라는 것을 시사했다.
연륜 있는 텔리다 부인은 내 말의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호호, 폴리우스 영식처럼 괜찮은 남자는 많은 여자가 탐내는 법이지요. 그 정도는 영애도 넓은 마음으로 받아 주세요.”
“…….”
“물론 그의 진가를 알아보는 건 영애만이 아닐 거예요. 폴리우스 영식에게 잘해 주셔야 놓치지 않겠지요?”
어장 관리를 참아 줘야 착한 거라면 평생 속 좁은 사람으로 살래.
“그래, 마르티스 영애도 잉그다 영애도 다 폴리우스 영식을 흠모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특히 잉그다 영애는 신부 교육을 잘 받아서……”
그 뒤로도 말이 이어졌다. 텔리다 부인은 어지간히 폴리우스가 마음에 든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 나이 지긋한 부인까지 폴리우스의 어장 속 여성들을 다 알 만큼 소문이 도는데도, 폴리우스는 내게 잘못이 없는 것처럼 뻔뻔했던 거야?’
나는 새삼 이별을 택한 걸 잘했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저는 그럼 잘생기고, 착하지 않고, 여자한테 인기 없는 남자랑 만날래요.”
“뭐라고요?”
똑같이 폴리우스를 다른 영식들과 비교해 늘어놓아 볼까.
“음, 누가 있을까요. 뒤센 경께서도 키가 크시고, 데보스트 영식, 코르데이 백작……”
노부인에게 버릇없는 것처럼 보이기 싫어서 간접적으로 이야기했는데, 전 약혼자인 내 앞에서 폴리우스와 바람피운 영애들에 대해 구구절절 말을 내뱉으니 나도 가만히는 못 있겠다.
“아, 외모라면 역시 다미안 마탑주?”
나는 일부러 폴리우스의 이복형제인 남자를 마지막에 덧붙이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웃었다.
폴리우스가 정부에게서 본 사생아라면, 다미안은 벨데르트 백작 부인에게서 태어난 적자다.
‘이곳에 남편의 정부 때문에 고생하는 부인들이 몇 명인데, 바람기며 사생아를 대놓고 두둔하다니.’
-라는 속뜻을 못 알아차렸다면, 텔리다 부인도 사교계에서 은퇴해야지.
“…….”
순간 적막이 흘렀다. 사람들의 분위기가 묘해진 것을 깨달은 텔리다 부인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주인공 버프도 이기지 못할 만큼 고지식한 모임. 폴리우스의 존재를 환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
사교계에 영향력 있는 모임 중에서도 내가 이곳을 고른 이유가 있었다.
“하하, 그나저나 오늘 날씨가……”
“정말 햇살이 따사롭네요!”
몇몇 부인들이 눈치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
응, 분위기 한번 화기애애하다.
* * *
모임에 다녀온 바로 다음 날이었다.
“네가 다미안에게 관심 있다고 한 게 사실이야?”
아침부터 반갑지 않은 얼굴이 들이닥쳐 있었다.
내가 이별을 고한 전 약혼자 폴리우스였다.
“폴리우스를 내 방에 들인 기억이 없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내 실수가 아니었다. 호위 기사에게 헤어졌다는 말은 분명 전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호위 기사는 내가 이 말을 하기 전까지 오히려 태연한 얼굴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호위 기사를 응시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호위 기사가 두 눈을 껌뻑이고 있노라니, 폴리우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멜라니. 지금 허락 같은 잡다한 허례허식이 나보다 더 중요해? 쓸데없는 말로 피할 생각하지 마, 다미안을 입에 담다니 어떻게 된 거냐고!”
오호, 내가 쓰러졌을 땐 한참 뒤에 나타나더니 이렇게 화나서 아침부터 달려온 이유가 다미안 마탑주 때문인가.
사생아의 입장에서 본부인의 아들은 역린이긴 한가 봐. 내가 급소를 잘 건드리긴 잘 건드린 모양이군. 게다가 자극적인 주제라 소문도 빨리 퍼졌고.
“아, 외모라면 다미안 마탑주를 꼽겠다고 모임에서 말한 거 말인가요?”
하지만 나는 어제와 똑같은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왜 화났는지 모르는 척 새침을 떨었다는 뜻이다.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네요. 잘생긴 영식인 건 맞잖아요. 질투하지 말고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내지 그래요.”
“그 자식과 백작 부인이 내게 얼마나 악랄하게 굴었는지 몰라서 그래? 가족이라고 잘 지내보려는 내게 정부의 아들이라며 수도 없이 모욕했다고!”
폴리우스는 입에 담기도 치가 떨린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역시 다미안 마탑주가 이 대가리 꽃밭에게 유일한 역린인가 보네.’
하지만 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멜라니. 나한테 저지른 잘못을 정말 모르겠어?”
“네.”
내가 태연하게 대답하자 폴리우스의 말문이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