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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4)화 (4/90)

<4화>

그러고 보니 요즘 폴리우스가 멜라니의 이야기를 꺼냈던가?

헤어진다는 소동이 있었으니 자신이 멜라니 이름으로 외상을 다는 걸 막은 거다. 그럼 그렇지, 아무 일도 없을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는데?’

폴리우스는 왜 여자애 하나 못 다뤄서 망신을 주는 건지. 나중에 두 사람이 재결합하게 되면 생색을 내며 한 몫을 톡톡히 받으리라.

물론, 자신을 무시한 의상실에도 ‘클로틸드 영애’를 대동하여 오늘의 굴욕을 갚을 것이다!

다음 날부터 밀라 부인은 멜라니가 자주 간다는 곳들에서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며칠, 드디어 소득이 있었다.

“얘, 멜라니. 너 잠깐…… 어머!”

“무슨 일이십니까.”

전임과는 달리 새로 온 호위 기사는 빠릿빠릿하게 멜라니의 앞을 막아섰다.

철저히 외부인으로 대하는 모습에 밀라 부인은 황급히 제자리에 섰다.

“네가 어떻게 나를 막을 수 있니!”

밀라 부인의 고성이 날카로워졌다.

“……무슨 일이시죠?”

처음에는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멜라니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어, 어라?’

사태를 파악한 밀라 부인의 목소리가 간드러지기 시작했다.

“어머, 무슨 일은. 내가 너랑 꼭 일이 있어야 볼 수 있는 사이니?”

“제가 공작성의 출입을 막았다는 이야기는 못 들으셨나요?”

“그래, 그때 너희가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폴리우스가 널 속상하게 했다면 내게 말하렴. 따끔하게 야단쳐 줄 테니.”

밀라 부인은 짐짓 자애로운 태도를 취했다. 일단 지금은 나중을 위해 숙이고 들어갈 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멜라니는 싸늘하기만 했다.

“필요 없습니다. 저희는 싸운 게 아니라 아예 헤어졌으니까요.”

밀라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껏 살갑게 대해 줬더니 오히려 깍쟁이처럼 구네?’

아무리 그래도 이런 태도는 참기 힘들었다. 자신에게 잘 보여야 할 쪽은 멜라니가 아니던가?

“폴리우스와 싸웠다고 해도 시어머니 될 사람을 이렇게 박대하면…… 너무 섭섭할 것 같은데. 나중에 나를 어떻게 보려고 그러니?”

부인은 넌지시 한숨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클라라는 내게 직접 샌드위치도 싸 주고 얼마나 사근사근하게 굴었는데……”

“그럼 그분을 며느리로 삼으면 되겠군요.”

“뭐?”

밀라 부인은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눈앞에 있는 건 제 아들에게 죽고 못 살던 멜라니 클로틸드가 맞았다.

어머니인 제게도 점수를 따고 싶어 안달하던.

“아니, 너, 정말…… 정말 이럴 거니?”

예전의 멜라니는 살가운 맛이 없긴 해도 그럭저럭 귀염성이 있었는데 지금은 냉정하기 짝이 없다.

밀라 부인이 큰 충격에 빠져 있는 사이, 그와는 다르게 여상한 어조로 멜라니가 말을 이었다.

“폴리우스가 무얼 잘못했느냐고 하셨죠? 부인께서 하는 행동과 똑같았어요.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기…… 약혼녀인 내가 있는데 자신에게 고백한 여자들과 노닥거리기……”

“얘, 나는 그냥!”

멜라니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딱 잘라 말했다. 드러난 건 차게 식은 냉정한 눈뿐이었다.

“‘얘’라니요. 전 클로틸드 공작가의 후계자입니다. 함부로 부르는 건 삼가세요.”

“뭐!”

“아, 그리고 또 생각난 건데.”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돌아서던 멜라니는 막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다음부터 제 이름 팔아서 구걸하지 마세요. 소송 걸 테니까.”

멜라니는 싸늘해지는 마음을 자꾸 가다듬었다. 그 와중에도 밀라 부인이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분을 못 이기는 것이 들렸다.

‘내 이름을 팔고 다니며 외상을 올렸다 이거지. 그런데 여태까지 난 몰랐어.’

이번에 호위 기사를 족치면서 주변 정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몰랐을 거다.

자신이 폴리우스를 너무 좋아하니 클로틸드 가문에서 혹시 문제가 생길까 그냥 외상을 치러 주었던 거다.

클로틸드의 이름값은 절대 싸지 않았고 멜라니가 가문에 가진 자부심 역시 가볍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를 여러모로 이용해 먹다니.’

자신은 정말, 폴리우스와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다. 하지만 저쪽에서 먼저 구질구질하게 나오는데 어쩌냔 말이다.

폴리우스 본인뿐만 아니라 그 어머니까지 자신의 이름을 팔고 있었을 줄이야. 곱게 헤어지려고 했는데 이러면 나쁜 사람이 되고 싶어지잖아.

‘정말 우연히도, 내가 만나려는 사람이 폴리우스와 밀라 부인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네.’

집으로 돌아온 멜라니는 책상에 앉아 편지지를 꺼내 가볍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다미안 마탑주께.]

수신인은 폴리우스의 이복형, 다미안 벨데르트였다.

* * *

마탑주 다미안. 소설 <서자인데 사업으로 제일 잘나가!>에서 폴리우스가 대적하는 악역.

폴리우스의 이복형제인 이 남자는 폴리우스가 벨데르트 백작가의 후계자가 되는 일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정부의 아들인 폴리우스와는 달리 벨데르트 백작 부인의 자식으로, 그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하지만 내내 미심쩍어했던 것이 있다.

‘내가 봤던 이 소설이 폴리우스 시점에서 진행되어서 그렇지, 객관적으로 다미안 마탑주가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애초에 정부를 본부인이 있는 백작저에 데려오려고 한 벨데르트 백작부터가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 얼마나 융숭한 대접을 바란 건지 모르겠다.

폴리우스는 같은 형제라며 다미안과 잘 지내고 싶어 하지만 둘의 가치관은 엄연히 달랐기에 항상 엇나갔다.

“나는 네 아버지 같은 인간이 되기 싫어서 여자를 안 만나는 거야.”

“네 아버지기도 한데 그런 말 하지 마.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 아들인 우리마저 등을 돌리면 안 되는 거잖아……”

다미안은 냉정하고 인간미가 없는 인간, 폴리우스는 악역까지 품으려는 따뜻한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글쎄.

‘제 어머니가 정부 앞에서 허울뿐인 부인이라며 폄하되는데, 자신이라도 폴리우스에게 안 지려고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임신해 있던 어머니를 두고 몇 달 차이로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아버지가 그 사생아를 적자로 만들겠다고 입양까지 시키다니, 나 같아도 용서 못 하지.

‘그리고 계속해서 밀라 부인이 백작 부인인 양 바깥에서 행세하고 다니잖아. 피해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으, 그런 마당에 형제처럼 지내자고 하는 게 과연 주인공다운 당당한 행보인가? 왜 사생아라고 무시한다며 피해자인 척을 하시는지?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상념에 잠겨 있는 그때, 마부가 앞쪽 쪽창을 열고 말했다.

‘오호.’

처음으로 와 보는 마탑은 놀라웠다. 이런저런 귀족의 저택을 많이 본 나로서도 처음 보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단순히 사치품이 적느니 화려한 장식이 많으니 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둥둥 떠다니는 꽃잎들, 창문이 나지 않았는데도 환하게 빛나는 실내. 각자 다른 계절을 비추는 창문들.

“마탑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생각을 갈무리한 채 응접실에 들어서는데, 반사적으로 눈이 가늘어졌다.

신기한 물건이 많은 마탑을 보며 감동하던 것이 싹 잊혀질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가진 남자였다.

‘폴리우스가 열등감을 가질 만하군.’

가는 흑발이며 흔치 않은 붉은빛 눈동자가 우아하기 짝이 없다. 같은 형제라지만 폴리우스가 잡초면 이쪽은 장미다.

‘잘생김에 감동할 때마다 이마를 치면 거북목이 치료되겠는데.’

가까이서 본 눈앞의 남자가 너무 눈부셔서 주접 좀 떨어 봤다.

폴리우스와 약혼했을 때는 그가 이복형을 너무 싫어해서 피해 다녔다. 얼핏 볼 때도 태가 남달라 멀리서 봐도 혼자만 눈에 띄니 피해 다니기는 편했다.

폴리우스를 생각해서 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 없다.

“안녕하세요, 마탑주님. 저는……”

“갑작스럽게 뵙자고 해서 놀랐습니다.”

말을 끊고 나와서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인사는 끝까지 하게 해 주지.’

다미안 마탑주는 아무래도 내가 그다지 반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난 폴리우스의 전 약혼녀이니.’

폴리우스가 다미안 마탑주를 싫어하는 것만큼, 아니, 어쩌면 더 폴리우스를 싫어하는 사람일 테니까.

“서신이 아니라 꼭 만나서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말로 궁금하군요, 클로틸드 영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차갑기 그지없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 남자일 것 같다.

중요한 용건이 아니기만 해 봐, 하고 협박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내가 보내는 편지에 굉장히 수상한 뉘앙스를 풍겼으니 찜찜하겠지.’

내가 클로틸드 공작 영애라고 해도, 폴리우스의 전 약혼자가 아니었더라면 못 만났을 것 같다.

그만큼 다미안 마탑주는 쉽게 만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느라 쏘다니는 폴리우스와는 다르게 이 사람은 인간이 싫은지 좀처럼 사람들 앞에 나서는 법이 없었으니까.

나는 상대가 날 반기지 않는 기색을 모르는 척하며 여상하게 말했다.

“마탑주님, 저랑 약혼하시죠.”

“푸흡.”

그리고 그 냉정한 낯짝은 내가 한 말에 바로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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