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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5)화 (5/90)

<5화>

“크흡. 큽. 커헉……”

우리는 마침 차를 마시고 있던지라 다미안 마탑주는 찻물을 내뿜을 뻔했다. 간신히 찻물을 삼키긴 했는데 사레가 들린 모양이었다.

“어머, 많이 놀라셨나 봐요.”

나는 얼굴이 벌게져서 연신 기침을 하는 그와는 다르게 느긋하게 웃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크흡.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약혼을 입에……”

“하지만 바로 용건을 말하지 않으면 절 눈으로 찢어 죽이실 것 같았거든요.”

물론 난 정말 손봐 주고 싶은 사람이 있기에 움츠러들지 않았다. 아무리 살벌해 봤자 진짜 살기하고 가짜 살기는 다르다 이거야.

“저희가 거의 초면이라는 걸 아십니까?”

“네. 마탑주님의 목소리가 이렇게 좋으신 줄도 여태 몰랐네요.”

다미안 마탑주는 내 능청맞은 칭찬에 흔들리지 않았다.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과 어떻게 약혼을 합니까. 게다가 이복형제라고 해도 동생과 연인이셨는데.”

“생각보다 낭만적이시네요. 혹시 열렬한 사랑으로 결혼해야 한다는 주의이신지? 제가 어디 가서 빠지는 신붓감은 아닐 텐데?”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신분으로는 제국 최고의 레이디라고 불리는 몸이다.

“후……”

나지막한 한숨. 시종일관 여유로운 내 모습에 다미안 마탑주 또한 어느 정도 제 페이스를 되찾은 듯했다.

눈빛이, 바뀌었으니까.

“클로틸드 영애는 저와 왜 약혼하고 싶으신 겁니까?”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처음과는 다른 자세다. 마음에 든다.

나도 얼굴에 있던 웃음기를 지우고는 대답했다.

“다미안 마탑주는 제 최고의 무기가 되어 주실 분이니까요.”

“……폴리우스 벨데르트와 헤어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다미안 마탑주의 머리가 좋다는 말은 허언이 아닌 듯싶다. 내가 이렇게만 말했는데도 바로 말뜻을 알아들었으니까.

“설마 그에게 복수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복수라니, 그런 무서운 말을.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에요. 전 그냥 소소하게 한 방 먹이고 싶다고나 할까.”

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소 유혹적인 느낌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폴리우스는 본인이 파혼을 반대하면 내가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사실 내가 공작 영애라고 해도 보수적인 귀족 사회에서 약혼을 마음대로 깨는 건 어렵다. 상대방이 열렬하게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같은 가문에서 약혼한 상대를 바꾸는 건 쉽지.’

어차피 귀족 사회에서 결혼은 대부분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니, 가문 내에서 상대가 뒤바뀌는 건 흔한 일이다.

게다가 폴리우스와 다미안 마탑주의 관계는 농담으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동안 폴리우스의 앞에서 무심코 다미안 마탑주를 언급할까 봐 얼마나 조심했던가.

‘그렇게 제 눈치를 보던 내가 다미안 마탑주와 약혼한다면 폴리우스의 기분이 어떨까?’

내가 원하는 바를 알아차린 다미안 마탑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벨데르트 성을 버리고 마법사가 되기로 한 몸입니다. 약혼 상대를 바꾸고 싶다면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성을 버리실 만큼 벨데르트 가문을 싫어하실 것 같아서 찾아온 거예요.”

다미안 마탑주의 눈빛이 짙게 변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게 역린이라는 걸 잘 알겠다.

내가 조금은 무례할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도발이 필요하다.

“벨데르트 가문에 한 방 먹이고 싶으시잖아요.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하시는 게 어때요? 대외적으로는 성을 버렸다지만 아직 가문 명부에는 남아 있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 정보의 출처는 누구냐, 바로 폴리우스다.

그는 다미안 마탑주가 성을 버리기는 했어도 자신에게 백작가의 후계 자리가 바로 오지 않는 게 가문 명부에 그의 이름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며 화를 냈다.

‘뛰쳐나갔다지만 벨데르트 백작은 아직 다미안 마탑주를 아들로 생각하고 있어. 가문을 나간 것도 투정 정도라고 생각하지.’

그게 바로 부모의 오만이라는 거다. 자신을 진심으로 싫어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니까.

실상 다미안 마탑주의 생각은 어떨까.

벨데르트 백작가에서 나와 마탑으로 투신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더럽고 추잡했다고 들었다.

얼마나 벨데르트 가문이 싫었으면 그런 고생을 했겠느냐 이 말이다.

또한, 그런 분노를 갈무리하고 마탑주의 자리까지 올라온 남자라면…… 감성보다 실리가 더 통하는 남자다.

“그리고 피차 마찬가지랍니다. 저 역시 마탑주님께 최고의 무기가 되어 줄 수 있어요.”

“저는……”

“시치미는 떼지 말자고요. 같이 폴리우스 벨데르트에게 한 방 먹이자고 이야기하는 거랍니다.”

나는 그에게로 바싹 거리를 좁혔다. 루비 같은 붉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친다.

“폴리우스가 파혼하기 싫어 매달리는 여자가 눈앞에 있지 않나요. 본인이 이복동생보다 더 나은 인간이라는 걸 증명하시죠. 저를 이용해서.”

무겁게 방을 짓누르던 공기가 다소 옅어진다.

나는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웃는 얼굴인 채였지만…… 사실 어느 정도 긴장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내 도발이 어느 정도는 성공했네.’

아까보다 차분해진 기색인 다미안 마탑주는 적나라한 내 단어 선택에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이 더 나은 남자니까 멜라니 클로틸드가 선택한 거라고 사람들에게 내세우라고요.”

“사람을 꼭 도구라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어머, 다미안 마탑주께서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이야기하는 거랍니다. 저는 제가 영식에게 유용하게 쓰인다면 기쁘겠는데요.”

내 막힘없는 언사에 다미안 마탑주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잠시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르신 것 같습니다.”

“칭찬이라고 들을게요. 그럼 이왕이면 저를 좀 더 알아 가는 건 어때요?”

확실히 나는 전과 다르다. 별의별 고생을 하다가 죽기까지 한 소설을 기억해 냈는데 성격이 바뀌지 않는 게 이상하다.

나는 아버지의 가장 귀한 보물이다. 클로틸드 공작이 더 없이 귀하게 키운 게 바로 나 멜라니 클로틸드다.

어장 속 물고기 중 하나로 함부로 대해지다가 죽을 내가 아니란 말이다.

“피차 감성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좋아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저와는 다르게 감정적이기 짝이 없는 폴리우스에게 최고의 복수가 될 거라는 건 명확하죠.”

나는 찻잔을 젓던 티스푼으로 다미안 마탑주를 가리켰다.

“일단 폴리우스와 다르게 딱 봐도 잘생기셨잖아요. 그 점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제 키가 작은 편이 아닌데 구두를 신고 옆에 서도 훨씬 큰 것도 좋고.”

“제가 잘생…… 겨서 약혼을 하겠다고요?”

다미안 마탑주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하긴 누가 그의 앞에서 엄청난 마법 실력보다 외모를 앞으로 두겠나.

“제가 약혼을 제안한 건 폴리우스가 제일 복장 터트릴 이복형제라는 점도 있었지만, 당연히 미모도 고려 대상이셨어요.”

나는 최고가 좋다. 그게 나에게는 더 잘 어울린다.

당연한 말인데 왜 당혹스러워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폴리우스에게 한 방 먹이려고 약혼하자는 거지 평생 같이 살자고 하는 건 아니랍니다.”

“애초에 파혼…… 까지 내다보신 겁니까?”

“물론 파혼 경력이 남는 건 꺼려지실 수도 있으겠지만 피차 저희가 문제가 되는 입지는 아니잖아요?”

폴리우스가 순순히 파혼을 해 주지 않기에 상대를 바꾸려고 찾아왔지만, 폴리우스와 달리 다미안 마탑주라면 파혼을 반대하지 않을 테니 수월할 것이다.

마탑주쯤 되는데 파혼 같은 게 무어 대수라고. 공작 영애인 약혼녀가 아쉬울 위치도 아닌데.

“걱정하지 마세요. 이 자리에서 바로 약혼하자는 건 아니니까요.”

서두르다가는 다 망치는 법.

자아, 이 경계심 많은 남자를 어떻게 공략해 볼까.

“고민이 되시면 우선 저와 건국제에 참석하고 결정하시는 건 어떠세요?”

나는 바로 결정하라고 닦달하지 않았다. 대신 어여쁘게 웃으며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제가 얼마나 훌륭한 무기인지 보여 드릴게요.”

* * *

일 년 중 가장 화려한 축제로 손꼽혀, 어느 때보다 사람이 많은 건국제.

폴리우스는 원래도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오늘은 유독 기분이 좋았다.

‘멜라니가 내 모습을 보면 후회하겠지. 설마하니 여태까지 멜라니가 사과를 하지 않을 줄이야.’

건국제 연회는 황제가 초대장을 보낸 가문이라면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다.

클로틸드 공작은 지금 영지에 내려가 있으니 후계자인 멜라니가 오겠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이번 기회에 내 소중함을 느껴 봐야 해.’

평소라면 자신은 멜라니에게 파트너 신청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번에 다미안을 언급하고, 다른 영식과 자신을 비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멜라니는 과거의 잘못까지 끌어들이며 양비론을 펼쳤다.

그래, 그러니 한 사교 모임에서 멜라니가 한 말을 듣고 몇몇 남자들이 자신에게 비웃는 소리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폴리우스 영식. 여자에게 너무 잡혀 사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상대가 클로틸드라서 어쩔 수 없나 보군?”

가끔 자신이 연인에게 얼마나 황제처럼 대접받는지 자랑하는 부류들이 있었다.

물론 자신은 멜라니를 사랑했지만…… 아쉬움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확실히 멜라니가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니긴 해.’

그런 모습들이 아무래도 다른 영식들 앞에서는 도도하게 보인 것 같다고 폴리우스는 생각했다.

그들이 공작가의 외동딸을 거머쥐어 누구도 반박 못 할 권력자가 될 폴리우스에게 열등감과 질투를 느껴 쏘아 댄 것인 줄도 모르고.

만약 몸이 약한 멜라니가 폴리우스와 결혼한 후에 죽으면 공작 위가 그에게 가는 게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 너무 잘해 준 것도 있겠지. 착한 남자라고 만만하게 보는 걸지도.’

그래서 이번에는 클라라가 한 파트너 제의를 수락했다. 멜라니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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