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폴리우스. 지금 무슨 생각 해요?”
“하하. 클라라가 오늘따라 귀엽다는 생각?”
그렇게 말하며 폴리우스는 클라라의 볼을 매만졌다. 그런 그의 손길에 클라라는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멜라니도 이럴 때가 있었는데.’
오랜만에 느끼는 신선함이다. 클라라는 자신의 말, 행동 하나하나에 눈길을 떼지 못했다.
‘클라라는 멜라니가 가지지 못한 귀여움이 있으니,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철렁하겠지?’
아마 자신의 파트너 제의를 받지 못한 멜라니는 홀로 건국제에 참석할 것이다. 멜라니는 별달리 친한 영식이 없었으니까.
혼자 참석하는 게 부끄러워 파트너를 구할 수도 있겠지만, 급하게 구해 봤자 기껏해야 가신의 아들 정도일 거다.
‘나만큼 괜찮은 남자는 흔하지 않아. 오늘 내 모습을 보고 많이 후회하라고, 멜라니.’
그렇게 느긋하게 폴리우스가 클라라와 함께 샴페인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클라라. 으음?”
갑자기 황궁 무도회장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폴리우스는 의아함에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일이죠?”
“왜 클로틸드 영애가 벨데르트 영식과 입장한 겁니까?”
폴리우스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의 이름이 왜 멜라니가 입장할 때 함께 나온단 말인가. 오늘은 클라라와 함께 참석했는데?
“벨데르트 영식이라니, 저는 오늘 클라라 마르티스 영애와 파트너…… 어어?”
그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멜라니가 자신의 뒤통수를 대차게 후려칠 줄.
“아니, 폴리우스 벨데르트 영식이 아니라 형님이신 다미안 마탑주님 말입니다. 아, 지금은 벨데르트 성을 버리셨긴 했지만……”
폴리우스는 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지 못했다.
이복형과 팔짱을 낀 제 연인이 나란히 무도회장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빛나는 미소를 띠고서.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폴리우스 영식?”
“클로틸드 영애는 폴리우스 영식과 사귀는 것 아니었습니까?”
자신과 어울리던 몇몇 영식들이 당황해서 물어보는 것이 들렸다.
“클로틸드 영애에게 영식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준다면서요?”
“다른 여자와 있는 자신을 보는 클로틸드 영애의 얼굴을 잘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게……”
영식들과 오가는 말을 들은 클라라가 멈칫해서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소중함을 느끼게 해 주겠다니.”
“아하하…… 그게 말이지. 잘못 들은 거야. 클라라가 잘못 들었어.”
“제가 그렇게 멍청한 줄 알아요? 제대로 들었다고요. 말 돌리지 말아요. 저는 단순히 클로틸드 영애의 질투를 유발하는 도구였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파트너는 제가 아니라 어떤 여자든 상관없는 거였냐고요! 얼마나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드레스를 골랐는데……”
클라라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차올랐다. 평소라면 달래 주어야 하겠지만 폴리우스는 그럴 경황이 없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파트너로 참석한 거지? 다미안과 멜라니는 전혀 친분이 없는데?’
오히려 파트너가 아닌 영식이 옆에서 우는 클라라를 보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마르티스 영애. 울지 마십시오. 폴리우스 영식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닐 겁니다.”
“당사자가 아닌 영식은 빠져 계시고. 폴리우스, 대답해 보라니까요!”
폴리우스는 지금 이 상황이 짜증 났다. 자신이야말로 당장 멜라니에게 달려가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인데.
‘클라라는 평소에는 순하다가 오늘따라 왜 귀찮게 구는 거야?’
폴리우스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짓씹듯 말했다.
“잠시만. 시끄러우니까 좀 조용히……”
“뭐라고요? 지금 저보고 시끄럽다고 한 건가요?”
멜라니에게 정신이 팔린 탓에, 자신이 하면 안 될 말을 내뱉었다는 걸 알아차린 건 나중이었다.
“클라라 마르티스 영애와 폴리우스 벨데르트 영식이 싸우는 건가요?”
“지금 마르티스 영애가 울고 있는 것 같은데요?”
주변에서 싸우는 두 사람을 보고 웅성대는 것이 들렸다.
멜라니와 다미안의 조합과는 다른 종류의 소란이었다. 좋지 않은 가십거리에 불과한.
“아냐. 나는 클라라를 정말로 좋아해. 도구 같은 게 아니야.”
“좋아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폴리우스는 난감함에 클라라를 달래려 했지만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너무해. 정말로, 너무해요……”
“클라라.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고.”
“듣고 싶지 않아요!”
클라라는 기어이 뛰쳐나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폴리우스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클라라가 아니야.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었으니 잘됐어.’
클라라는 멜라니에 비하면 처지는 감이 있다. 멜라니는 클로틸드 공작가의 후계자고, 클라라는 고작해야 남작가의 영애니까.
딱히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이번 기회에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클라라를 달래려다가 멜라니와 다미안이 있는 지금 아무것도 못 하게 될 수는 없으니.
“폴리우스 영식. 어서 마르티스 영애를 잡지 않고 뭐 하는……”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폴리우스는 성큼성큼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멜라니에게 다가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감정적인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함께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왜 둘이 함께 참석한 건데? 언제부터 둘이 그렇게 친했다고?”
“어머, 영식. 혼자 오셨나요?”
멜라니는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성난 자신과는 다르게 평온한 태도였다.
‘나는 지금 화나는데, 웃어?’
만약 자신의 관심을 끌려는 멜라니의 의도라면 제대로 성공했다.
낯선 조합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연인이라 알려진 폴리우스가 나타나자 더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둘이 헤어졌다는 소문이 돌더니 진짜인가 봐요.”
“그런데 오히려 더 잘 어울려요. 클로틸드 영애와 다미안 마탑주는 정말 선남선녀로군요. 역시 외모로 따지면 다미안 마탑주 쪽이 더…… 두 사람 정말 우아하네요.”
“외모도 외모지만 사실 혈통도 그렇고……”
폴리우스는 붉어진 눈으로 소곤거리는 쪽을 노려보았다.
“흠, 흐음.”
그들이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얼굴은 외워 두었다.
지금 일만 해결되면 당장 저들에게 달려가서 오해를 풀라고 멜라니에게 요구할 것이다!
‘뭐, 다미안 저 자식이 멜라니와 더 잘 어울린다고?’
자신과 사이가 안 좋은 다미안을 왜 비교했냐고 멜라니에게 화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흘러내리는 라벤더색 머리카락에 고아한 진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멜라니. 똑같이 붉은 눈동자지만 자신과는 다르게 온통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다미안.
둘 다 무도회에 어울리는 복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이목구비가 묻히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거짓말같이 잘 어울린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고상한 얼굴이라니, 수수하다는 말을 듣는 자신과는 참 차원이 다르다.
그 모습이 폴리우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둘 다 곱게 자라서 사생아인 내 서러움 따위는 알지도 못하겠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고생한 줄 아는 폴리우스는 흉흉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고 그들의 앞에 섰다.
“둘이 무슨 사이길래 파트너까지 하는 거야?”
자신을 잘 아는 멜라니다. 애써 화를 삭이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멜라니는 오히려 부채를 펴며 여상하게 대답하는 게 아닌가.
“그냥. 얘기하다 보니 생각보다 잘 통해서 무도회까지 같이 오게 됐네요.”
폴리우스는 속으로 몇 번이고 욕을 지껄였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대놓고 할 수는 없었다.
지금 다미안 자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제 여자를 파트너로 빼앗았으니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멜라니가 사랑하는 건 나라고!’
폴리우스는 다미안에게 시비를 거는 대신 멜라니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이 자식은 상종하지 말라고 했잖아.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어머, 지금 형을 깎아내리는 건가요? 너무하다. 동생답게 착하게 행동하면 안 되나요?”
멜라니는 자신이 얼마나 다미안에게 상처를 받았는지, 다미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다.
“사람 없는 데서 이야기 좀 해.”
“싫은데요. 곧 무도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거라서.”
“지금 나랑 장난해?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당장 이리 와.”
하지만 자신이 다른 여자와 어울리는 게 질투가 나서 이런 행동까지 하다니?
이건 지나쳤다. 제대로 선을 넘었다.
“멜라니. 지금 내가 조용히 말하니까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
폴리우스는 멜라니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목을 잡아챘다. 짧은 말로는 안 될 것 같으니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생각이었다.
폴리우스는 저 역시 다른 여자와 입장한 것은 까맣게 잊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은 올곧은 피해자였다.
‘아무리 질투 유발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자식은 건드리지 말아야 했어.’
사생아라고 자신을 무시하며 항상 경멸 섞인 시선을 보내던 자신의 이복형제 다미안.
멜라니도 저 우아한 얼굴에 속아 넘어간 걸까?
저 얼굴로 형제니까 잘 지내자고 다가간 내게 사생아라며 매몰차게 군 걸 잘 알면서!
“지금 힘으로 영애를 끌고 가려는 건가?”
다미안은 역시나 지금 또다시 자신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거 놔.”
“그건 내가 할 소리야. 클로틸드 영애를 잡은 손 당장 놔.”
멜라니를 끌어당기던 폴리우스의 손은 다미안에 의해 저지당했다.
얼마나 죄는 힘이 강한지 그 정도 되는 성인 남성이 몸부림치는데도 다미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