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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14)화 (14/90)

<14화>

“폴리우스, 우리는 소중한 친구잖아요. 그렇죠? 내가 항상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주기로 했잖아요.”

“으응, 그렇지.”

“그러니 이렇게 있어 주세요. 오늘 저는 너무 슬펐답니다.”

폴리우스의 품에 파고들며, 클라라는 멜라니가 한 말을 떠올렸다.

“전에 말했던, 폴리우스와 한 침대를 썼던 여자가 바로 조세핀 잉그다 영애거든요.”

클라라는 다시 한번 조세핀을 보며 약 올리듯 웃었다.

“똑같이 그녀의 앞에서 폴리우스의 품에 안긴 채 웃으면 굉장히 좋아할걸요?”

본인이 멜라니의 앞에서 웃을 때는 통쾌했겠지. 하지만 역으로 당해 보니 기분이 어떨까?

“마르티스 영애, 당신……!”

아니나 다를까 애써 우아해 보이려던 표정까지 무너졌다. 부채까지 떨어뜨린 채 손을 부들부들 떠는 걸 보니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클라라는 폴리우스의 시선이 조세핀에게 가지 않도록 고개를 끌어당겼다.

“어어……”

폴리우스는 안겨 오는 클라라를 보며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나 클라라를 밀쳐 내지도 않았다. 그저 난감하다는 표정만 지어 보일 뿐.

조세핀의 얼굴에는 열이 점점 더 오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디서 착한 척을……”

“히잉, 폴리우스. 잉그다 영애가 절 노려봐요. 무서워요!”

결국 클라라의 행동에 조세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트렸다.

“폴리우스! 클라라 마르티스가 저런다고 넘어가지 마세요. 오늘 이 여자도 나를 망신 준 사람 중에 하나란 말이에요!”

“망신이라니?”

“그러니까……”

그러나 조세핀이 사정을 설명할 동안 클라라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여기까지 내가 왜 왔는데?’

클라라는 천연덕스럽게 입술을 삐쭉 내밀며 울먹울먹한 표정을 지었다.

“폴리우스, 조세핀 영애와 약혼한다는 게 사실이에요?”

“그건……”

“영애가 끼어들 바는 아니죠, 그리고 당장 폴리우스에게 떨어지지 못해요?”

“아하하, 그렇지만 클라라도 사정이 있는 것 같고……”

클라라는 폴리우스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것을 보며 새삼 여러 가지를 느꼈다.

멜라니를 약혼녀로 두고 싶어 하는 것, 조세핀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 자신을 놓치기 싫어하는 것 모두 폴리우스의 진심이다.

폴리우스와 헤어지겠다고 한 멜라니를 공격할 정도로 그에게 진심인 조세핀인데, 그녀의 앞에서 자신을 품에 안고 있다니.

‘난 왜 여태까지 폴리우스를 착하다고 생각했을까?’

폴리우스가 착하고 다정하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만났다. 크게 아픈 곳은 없지만, 그가 가진 요정의 축복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효과도 있었고……

“나는 사생아니까…… 언제든 클라라가 떠나도 괜찮아. 상처받는 건 익숙하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 자신이 떠나면, 사생아라 그를 욕하던 사람들과 똑같아질 것 같아서……

“저는 폴리우스가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아는걸요!”

“고마워. 클라라는 다른 여자들과 다르네.”

클라라는 자신이 폴리우스를 위해 유일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이 세상에서 그를 위해 주는 건 자신밖에 없다고.

대체 폴리우스가 이런 식으로 꼬신 여자가 몇 명일까. 어째서 한 여자에게 진심을 다하지 않는 걸까.

그의 곁에 있는 여자들이 모두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는 걸 모를 수가 없을 텐데.

멜라니의 말을 듣고서야 지금 이 기묘한 구도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깨닫다니.

“폴리우스 개인은 사실 별거 아니에요. 그를 도와주는 조력자들이 대단한 거지.”

“그렇다면.”

“네, 우선 잉그다 영애와 폴리우스의 사이를 벌리는 게 중요해요. 저와 파혼했다고 잉그다 영애와 더 가까워지면 안 되죠.”

멜라니와 했던 대화를 떠올리며, 클라라는 다음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폴리우스. 오늘 사교 모임에서 멜라니 클로틸드 영애를 만났어요.”

움찔, 폴리우스의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여기 있는 잉그다 영애가 폴리우스와 약혼할 사이라고 하니, 멜라니 클로틸드 영애가 눈에 띄게 동요하던데……”

“뭐, 멜라니가?”

“아니, 클로틸드 영애는 폴리우스에게 전혀 미련 없어 보이던데요?”

조세핀이 클라라의 말에 당황하며 치고 들어왔다. 클라라는 여유롭게 다음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잉그다 영애가 화가 난 거죠? 클로틸드 영애가 있으면 자신이 안 될 거라 생각해서?”

폴리우스가 좀 더 멜라니 클로틸드에게 목을 매게 하고, 그동안 옆에 있는 조세핀의 속을 까맣게 태워야지.

“폴리우스 님, 저 여자의 말에 속지 말아요!”

“으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폴리우스가 딴청을 피우는 사이, 조세핀은 거짓을 늘어놓는 클라라를 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클라라 마르티스, 지금 왜 거짓말을 하는 거죠!”

“그리고 클로틸드 영애가 마탑주님과 어떤 사이라고 말하지 않는 걸 보면…… 별 사이는 아닌 듯해요.”

그러나 폴리우스는 지금 조세핀이 무슨 말을 하든지 관심이 없다.

오직 멜라니의 이야기를 하는 클라라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

“약혼 상대를 다미안으로 바꾸겠다거나…… 그런 식으로 확정을 짓겠다는 말은 없었어?”

“그런 말은 없었는데요. 옆에서 어떤 관계인지 물어보는데도 대답을 안 한 거 보면 사실 깊은 사이가 아닐지도 몰라요.”

폴리우스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른다면서 질문은 잘도 하고, 고개도 잘 끄덕인다.

‘결국 클로틸드 영애를 놓치기 싫다는 거잖아, 나랑 잉그다 영애는 품에 두면서?’

그리고 이 시점에서 클라라는 폴리우스가 바라는 말을 해 준다.

“저는 폴리우스가 클로틸드 영애를 좋아한다고 해도…… 기다릴 수 있어요. 그만큼 폴리우스를 제가 더 좋아할 테니까……”

“클라라……”

촉촉한 눈망울로 달콤하게 말하니, 요즘 클라라가 당차게 굴었다고 싫어하던 폴리우스의 마음도 풀린 지 오래.

그리고 클라라가 이렇게 나오면, 조세핀의 상황은 더 난감해진다. 오늘 일을 털어놓을 수가 없다.

게다가 조세핀과 약혼을 하지도 않겠지. 클로틸드 영애 쪽이 좀 더 탐나니까.

“클라라 마르티스, 폴리우스에게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이 저택에서 나가요!”

“왜요? 나갈 거면 같이 나가요!”

“저기, 싸우지들 말고……”

“저는 클로틸드 영애와도 정정당당하게 겨룰 거예요. 잉그다 영애처럼 폴리우스의 눈과 귀를 막거나, 비겁한 소문 같은 거 내지 않고 폴리우스가 절 제일 좋아하게 만들 거예요!”

이렇게 말은 하고 있었지만, 사실 클라라는 폴리우스가 좋아하는 걸 보며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폴리우스가 가장 좋아하는 위치거든요. 자신에게 특정한 무언가가 되어 달라 부담은 주지 않으면서 친구라는 명목하에 유사 연애 하는 거.”

모든 게 멜라니의 말대로였다.

처음 찾아갔을 때부터 느꼈지만 보통 사람이 아니라며 클라라는 혀를 휘둘렀다.

‘와, 이렇게 되었으니 혹시 나중에라도 조세핀 영애가 떠들어 봤자 폴리우스는 클로틸드 영애가 자신에게 미련이 남았다고 믿겠네.’

조세핀의 말을 전부 질투로 여길 테니, 그녀를 온전히 신뢰하기 어려울 거다.

‘그럼 잉그다 영애의 속은 장난 아니게 타오를 게 분명하고!’

클라라는 키득키득 웃었다. 모든 게 멜라니의 계획대로 돌아가자 신기하기도 했고, 통쾌하기도 했다.

그리고…… 폴리우스와 조세핀이 단둘이 있지 못하게 계속 방해하다가, 조세핀이 돌아가야 할 저녁 무렵이 돼서야 같이 백작저를 나왔다.

“클라라 마르티스…… 당신, 오늘 일 후회하게 될 거예요.”

오늘 자신이 한 일로 조세핀은 잔뜩 약이 올랐겠지.

사교계를 휘어잡고 있는 그녀라면 지금 자신을 치워 봤자 오히려 폴리우스의 호감을 깎아 먹는 일이 될 거라는 걸 잘 알 것이다.

클라라는 조세핀이 마차에 오르는 걸 본 다음 자신도 마차에 올라탔다.

오늘 있었던 일을 나중에 클로틸드 영애에게 말해야지. 시킨 일은 굉장히 제대로 하고 나왔다고.

어느덧 하늘에는 달이 제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

사교 모임에 연이어 백작저에서 폴리우스와 조세핀을 상대한 일로 피곤했지만, 상당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아, 잠시만. 마차 돌려 봐.”

하지만 클라라는 이쯤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마부에게 지시를 내렸다.

“네?”

“벨데르트 백작저로 다시 가자는 이야기야.”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클라라가 떠났다고 생각한 조세핀이 다시 마차를 돌린 것을 발견했다.

“잉그다 영애, 또 만났네요!”

“아악, 돌아간 줄 알았더니 어떻게!”

기겁하는 잉그다 영애를 보며 클라라는 천진하게 다시 손을 흔들었다.

‘이왕 하는 일, 제대로 해야지.’

오늘은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 *

[모든 게 클로틸드 영애의 말대로여서 놀랐어요.

잉그다 영애가 폴리우스와 약혼하려 했다는 건 전부 거짓말이에요. 기가 막혀서!]

이후, 마르티스 영애에게서 비밀스럽게 편지가 왔다.

나는 내용을 읽어 나가면서 미소 지었다.

발랄하고 거침없는 어투만 봐도 일이 잘 풀렸다는 걸 알겠다.

[……클로틸드 영애가 부탁한 대로, 앞으로도 잉그다 영애와 폴리우스의 신뢰를 팍팍 떨어트리도록 노력하겠어요.

그 외에도, 폴리우스의 옆에 붙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할게요.

-어장 속 물고기에서 유능한 스파이로 진화한 클라라 마르티스가.]

하지만 이런 일을 겪었는데도 잉그다 영애가 폴리우스를 전혀 포기할 기미는 없어 보였다고 했다.

그녀에게는 폴리우스를 좋아하는 마음만 있는 건 아니다.

역시 ‘클로틸드 영애가 죽고 못 살던 전 약혼자’라는 게 중요한 거야.

아직 다미안 마탑주가 약혼에 동의하지 않아서 걱정되었는데, 마르티스 영애는 생각보다 좋은 성과를 내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당분간 폴리우스 쪽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마르티스 영애가 잉그다 영애와 폴리우스 사이에 끼어서 이목을 끌어 준다면, 그동안 두 사람이 오늘처럼 사교 모임에서 시비를 거는 식으로 나한테 헛짓거리할 정신은 없겠지.

본격적으로 사업을 해야 하는데, 바쁘단 말이야.

나는 이내 편지를 접어 두고는 다미안 마탑주의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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