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래, 내가 만나 주지 않자 폴리우스는 다른 여자를 찾아갔을 거다. 얼마나 불쌍한 척을 했을지 안 봐도 선했다.
‘괜히 잉그다 영애가 내게 이렇게 이를 내보이겠어?’
여기에서 잉그다 영애와 내가 싸워 봤자 영 보기에 좋지 않다. 잃는 게 더 많은 싸움이니까.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어떨까?
“아가씨, 마르티스 영애가 뵙자고 청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잉그다 영애는 알아야 할 것이다. 폴리우스의 어장에 있는 건 그녀만이 아니라는 걸.
“마르티스 영애. 나를 만나자고 한 건……”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하러 왔어요.”
놀랍게도 폴리우스가 가엽다며 적대시하던 마르티스 영애가 내게 사과를 해 왔거든. 제대로 고개를 숙여 가며.
그리고 그동안 폴리우스가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도 알려 주었다.
“폴리우스는 사실 클로틸드 영애가 가문의 힘으로 자신을 안 놔주는 것처럼 말하며, 곧 나에게 올 것같이 굴었거든요.”
“음……”
“하지만 아니었죠. 건국제 때 나를 그렇게 무시하면서 영애한테 갔잖아요. 나는 그래서 말은 그렇게 했어도 폴리우스에게 클로틸드 영애가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했어요.”
들어 보니 폴리우스는 과연 소설에서처럼 여자들에게 어지간히 여지를 주고 다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폴리우스가 여지를 주며 어장 관리를 했기 때문에 말과 행동에 앞뒤가 안 맞은 거라니!”
마르티스 영애는 거칠게 식탁을 때렸다. 큰 소리와 함께 찻물이 튀었으나 방의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여자도 좋고 저 여자도 좋고. 그럼 나는 진짜 사랑에 밀린 여자가 아니라 그냥 어장 속 물고기 중 하나라 이거냐고요!”
그렇다. 여태 마르티스 영애는 폴리우스를 향한 사랑에 빠져 드라마를 쓰고 있었다.
자신은 사랑하는 남자의 진정한 사랑을 응원하며 아련히 사라지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나잖아요! 지는 불륜으로 태어난 주제에 얼마나 백작가 영식이라고 잘난 척을 했는지. 나는 남작가 영애라 모를 거라면서. 그걸 내가 참아 가면서. 얼마나. 이 망할……”
음, 그 이후 온갖 험한 욕을 내뱉었었지. 귀엽고 오밀조밀한 인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충격적이었다.
‘폴리우스랑 같이 있을 때는 얌전하지 않았나? 나처럼 성격 억누르며 만났는데 어장 관리를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복수심이 불타오를 만도 하지.’
그런 그녀를 보고 나는 손을 내밀었다. 내가 생각해도 썩 괜찮은 계획이었다.
“제가 얼마 전에 클라라 마르티스 영애와 대화를 나눴거든요.”
“……누, 누구라고요? 같잖은 장난하지 말아요. 지금 여기엔 클라라 마르티스 영애는 없는데!”
순간 살기등등하던 잉그다 영애의 얼이 빠졌다.
그야 그렇겠지.
저번 건국제에서 마르티스 영애가 폴리우스와 파트너로 참석한 걸 모를 리도 없고.
‘왜 본인이 폴리우스의 유일한 여자인 것처럼 행세하는지 모르겠네. 약혼할 거라면서 허세 부려 봤자 어차피 들통날 텐데.’
나는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었다.
“마침 오늘 생일 파티에 초대했거든요…… 조금 늦는다고 하더니. 저기 오네요!”
이야, 타이밍 한번 죽이네.
나는 살랑대는 드레스를 입고 경쾌하게 걸어오는…… 아니, 살기를 품고 걸어오는 마르티스 영애에게 웃으며 물었다.
“마르티스 영애. 잉그다 영애가 폴리우스와 약혼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리고 내가 본 바로…… 마르티스 영애는 참지 않는다.
“약혼이라니 이상하네요. 어젯밤만 해도 폴리우스는 나랑 같이 있었는데?”
마르티스 영애가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는 것이 보였다. 옆에 앉아 있던 나만이 볼 수 있는 미소였다.
“잉그다 영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당신이 뭘 알아요! 정말로 미래의 이야기를 꺼냈……”
“약혼 얘기는 나도 들었거든? 뭐만 하면 폴리우스 영식이 결혼 얘기 하는 거 가지고 혼자 망상하는 거 아닌가요?”
애써 침착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우아하기 짝이 없던 잉그다 영애도 이제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듣자 하니 도가 지나치군요, 마르티스 영애!”
그래, 이렇게 막 나가는 귀족 영애는 처음이겠지……
나는 마르티스 영애가 어쩐지 말티즈와 겹쳐 보였다. 체구도 조그마한데, 저렇게 들이받는 걸 보면 성깔이 보통이 아니다.
‘저번에 나한테 다짜고짜 달려들 때부터 알아봤어.’
공작 영애한테도 그러는데 잉그다 영애쯤이야 뭐……
“한미한 평민 출신 남작가 주제에!”
“그 평민 출신한테 돈 빌린 주제에!”
“무, 무슨!”
“자꾸 까불다가는 이자 올리는 수가 있어. 알아?”
그리고 폴리우스 같은 주인공이 별것도 아닌 여자하고 노닥거릴 리 없다.
폴리우스가 사생아 출신이라 신분을 중요시해서 그렇지, 클라라 마르티스 영애는 제국 최고의 상단인 마르티스 상단주의 딸이다.
보수적이기 짝이 없는 제국에서 평민 출신이 작위를 샀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돈을 쥐고 있다는 거다.
저거 봐. 잉그다 영애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거.
“마르티스 영애는 귀염 상에 키도 조그마한데 정말……”
“사교계의 장미라는 잉그다 영애가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네요.”
음, 나와 만났을 때보다 전투력이 상승한 것 같다.
‘마르티스 영애의 마음 정리가 다 끝났군.’
그녀의 눈에 광기가 언뜻 보인다.
폴리우스, 나랑 더불어 마르티스 영애까지 적으로 돌리다니. 앞으로의 인생이 쉽지는 않을 거다.
“마, 마르티스 영애는 예의를 갖추……”
“너나 잘해, 멍청아!”
개판이었다.
마르티스 영애와 잉그다 영애의 싸움에 다미안 마탑주과 내 사이의 이야기는 완전히 묻혔다.
“영애들. 이거 알아요? 멜라니가 아이디어를 줘서 만든 디저트인데……”
“어머, 어머.”
한국에서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든 디저트가 추가로 나왔다.
“이름은 ‘팝콘’이라고 해요.”
역시 싸움 구경에는 팝콘이 제격일 것 같아서.
품종 차이로 현대의 팝콘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맛있다는 건 변함없다.
판매하게 된다면 내가 판매 경로를 개척할 거지만 스칼렛의 영지에서 옥수수가 많이 나서, 만약 팝콘이 후일 잘 팔린다면 둘 다 이기는 일이 될 테다.
‘오늘 영애들이 잘 먹는 모습을 보니, 홍보가 잘되겠어.’
그리고 내 친구의 생일 파티는 올해 최고의 파티로 소문이 나, 오지 못한 영애들은 땅을 쳤다고 한다.
* * *
그렇게 어영부영 생일 파티가 끝난 후, 모두가 돌아가는 분위기가 되었다.
모두가 혼잡한 그 순간, 나는 슬쩍 마르티스 영애와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어떤 말도 서로 건네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르티스 영애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며 나도 속으로 피식 웃었다.
‘생각대로 잘 돌아가서 다행이야.’
사실 마르티스 영애가 처음부터 나에게 협조한 건 아니었다.
“뭐야. 폴리우스 그 자식, 나 말고도 다른 여자들한테도 돈을 빌렸다고요?”
처음 마르티스 영애에게 폴리우스가 단순히 어장 관리만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했을 때는, 흥분해서 당장이라도 폴리우스에게 달려가려고 했으니까.
“남작가 영애라면서 은근히 무시하더니, 날 만난 건 결국 내가 상단주 딸이라서잖아. 생각해 보면 나를 무보수로 부려 먹은 것도 여러 번이고!”
집안이 흔들릴 정도로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 돈을 폴리우스에게 가져다 바치기 위해 아버지에게 혹독한 수모를 겪었다며 분통을 터트렸더랬지.
“그나마 내가 금전 관계로 더 얽히기 전에 폴리우스와 틀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소름이 돋네요!”
그리고 돈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눈을 빠르게 빛냈다.
나 역시 폴리우스가 내 명의로 대출을 받게 한 걸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사람 아니던가.
나와 마르티스 영애, 둘의 공통점이 보였다. 잘만 하면 눈앞의 여자를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어 보였다.
“이대로 곱게 폴리우스와 헤어지기에는 너무 억울해요! 가서 멱살이라도 잡아야지! 아니, 와인이라도 얼굴에 끼얹을까요?”
“그렇게 되면 오히려 폴리우스에게 동정이 쏠릴 수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폴리우스한테 농락당하고, 뜯어 먹힌 돈이 얼만데!”
마르티스 영애가 만족하지 못하겠다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나는 그녀와는 반대로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마르티스 영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해요. 폴리우스의 옆에서 그를 계속 사랑하는 것처럼 붙어 있는 거죠.”
“뭐라고요?”
“그리고 만약 이렇게 된다면, 마르티스 영애가 폴리우스에게 빌려준 돈도 회수할 수 있을 거예요.”
“돈을 회수할 수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
“일단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시죠.”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마르티스 영애에게 내가 생각한 계획을 말했다.
“그래요. 단순히 멱살을 잡거나 와인을 얼굴에 끼얹는 것보다는 훨씬 건설적이고 현명한 복수 방법이네요.”
처음에는 흥분으로 숨소리가 거칠던 클라라 영애는, 내 말이 진행됨에 따라 진정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 말을 모두 들은 마르티스 영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 잘 풀린다면 내가 폴리우스에게 뜯긴 돈은 회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까까지만 해도 분노로 달아올라 있던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새 예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쉽지는 않은 일이네요. 하지만 두근거리고 흥분되는 계획이에요!”
폴리우스가 뭇 여자들에게 가증스럽게 굴던 것처럼, 자신 역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오늘 생일 파티에서 마르티스 영애는 내 생각보다 잘해 주었다.
‘일단 첫 번째 계획은 잘 끝났어.’
마르티스 영애는 이제 나와 폴리우스의 사이, 그리고 폴리우스와 잉그다 영애의 관계에 대해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내가 침대에서 조세핀을 목격했을 때, 그녀가 나를 보며 히죽 웃던 것을 떠올렸다.
‘잉그다 영애. 똑같이 당해 보라고.’
아까 정말 놀랐겠지? 하지만 정말 재미있는 건 방금의 생일 파티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거다.
내가 마르티스 영애에게 지금 잉그다 영애를 따라가라고 한 참이거든.
* * *
“클라라 마르티스, 그 영애는 왜 여기서 끼어들어서! 진짜 미친 거 아냐?”
클라라는 조세핀이 씩씩대며 마차에 탄 것을 확인하고 파티에서 빠져나왔다.
‘절대 들키지 않게 잉그다 영애 뒤를 밟아야지.’
잉그다 영애가 향할 곳은 뻔했다.
클라라는 마부에게 벨데르트 백작저로 향할 것을 지시했다.
“거리를 두고 따라가. 하지만 너무 멀어지지는 말고. 알았지?”
그리고 잠시 후, 클라라는 역시나 벨데르트 백작저에 잉그다 후작가의 마차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모든 게 멜라니가 미리 예측해서 알려 준 그대로였다.
‘세상에. 클로틸드 영애는 어디까지 내다본 거야?’
클라라는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어서 오십시오, 영애.”
이런 늦은 시간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건 분명 무례다.
하지만 온갖 여자들이 폴리우스를 만난다고 찾아오는 터라, 벨데르트 백작저의 사람들은 젊은 영애를 상대로는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다.
그리하여 클라라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폴리우스의 방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글쎄, 폴리우스. 당신, 오늘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아야 해요! 멜라니 클로틸드가 저에게……”
그리고 폴리우스를 상대로 분통을 터트리는 조세핀의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는 예상된 그대로였다. 그럼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폴리우스!”
클라라는 조소가 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으며 폴리우스에게 달려갔다. 강아지처럼 순수하고 해맑은 얼굴로.
“어어, 클라라?”
“아니, 당신이 왜 여기에!”
클라라는 폴리우스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웃었다.
“제가 오면 안 되는 자리인가요?”
“아니,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러나 폴리우스의 품에 안긴 클라라를 보는 조세핀의 얼굴은 서늘하고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클라라는 오히려 폴리우스의 목에 팔을 둘렀다.
히죽.
그리고 씨익 웃었다. 폴리우스에게는 보이지 않고, 조세핀은 보이는 각도로.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