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 *
저번 건국제 무도회 이후, 엄청난 수의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이제 본격적인 봄이 시작되려는지, 삭막했던 정원도 꽤 화려해졌다.
추운 공기 때문에 닫혀만 있던 내 방의 창문이 꽤 자주 열리기 시작했다.
일교차가 꽤 컸는데,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별거 아닌데도 불구하고 허약해진 몸에는 이따금 무리를 주었지만 말이다.
[봄볕이 따스한 오월입니다. 어느덧 꽃향기가 향긋하네요.]
[뜻깊은 모임에 클로틸드 영애께서 참석해 주시면 무한한 영광이겠습니다.]
나는 날씨가 따뜻해졌다고 활발해진 각종 모임의 초대장을 건성건성 넘겼다. 이런저런 명분을 대 봤자…… 그 속뜻이 훤히 보였다.
‘결국 그 다미안 벨데르트랑 만난 얘기를 더 듣고 싶다 이거잖아?’
역시 건국제 연회에 파트너로 그를 데려간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다미안 마탑주는 그간 영애들과 스캔들이 전혀 없었다. 미혼의 영애와 파트너로 입장한 것조차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자는 물론 남자들에게도 철벽으로 유명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폴리우스와 헤어지자마자 그와 함께 무도회에 입장했으니, 다미안 마탑주를 어떻게 녹였는지 다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겠지.
나는 턱밑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다미안 마탑주가 아닌 외모가 못난 영식이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여태까지 영애들과 스캔들이 나지 않았다고 한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절벽 위의 꽃이 아니라 절벽 위의 돌멩이인 양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
‘다미안 마탑주의 신분이 처졌다면?’
앞에서는 축하한다고 한들, 은근한 비웃음을 보이며 키득거렸을 것이다. 폴리우스와 계속 만나는 게 나았을 거라면서.
‘역시 다미안 마탑주를 고른 건 탁월한 선택이었어.’
사교계에서 이별은 약점이 되는데, 오히려 내 주가는 폭등하고 있었다.
저번 무도회에서의 삼자대면이 워낙 극적인 탓도 있을 것이다. 두 남자 사이에 낀 한 명의 여자 구도는 내가 생각해도 썩 훌륭했지.
‘하지만 사교 모임에 나가는 건 아직 섣불러.’
다미안 마탑주와 내가 어느 정도 친해진 건 맞지만, 공식적으로 어떤 사이가 된 것은 아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질문해 오면 난감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칼렛의 생일인데 빠질 수가 있나.’
스칼렛은 내가 다미안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서, 혹시 부담스러우면 안 와도 된다고 배려해 주었지만……
“사실 내가 갔으면 좋겠지?”
“……네가 여태까지 내 생일 파티에 안 온 적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래, 누가 무서워서 내가 어릴 때부터 함께해 온 소꿉친구의 생일 파티에 못 간다는 건 말도 안 됐다.
내가 악녀라고 불리며 매도당해도, 폴리우스에게 눈이 멀어 멍청한 짓을 해도 끝까지 곁에 있어 준 친구였다.
‘게다가 저번 연회에서 폴리우스가 얼마나 망신당했는지 편지로 알려 주었잖아.’
나는 스칼렛이 초대할 사람에 대해 경고해 준 걸 떠올렸다.
“잉그다 후작가 사람들이 마침 딱 우리 저택 부근에 놀러 왔다고 하네. 이웃들을 다 초대하는 마당에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잉그다 후작가의 사람 중에 초대할 사람이라면 딱 한 명뿐이었다. 조세핀 잉그다 영애.
“평소 친한 건 아니었지?”
“응. 별다른 말을 해 본 적도 없으니 초대장 보내도 안 올 가능성이 있지만……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야. 잉그다 영애는 폴리우스 그 새끼랑 스캔들이 있었잖아.”
단순히 폴리우스와 염문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한 침대를 썼으니 말이다.
‘분명 그때 나랑 눈 마주쳤는데 웃었어.’
폴리우스의 어장 속 다른 여자들은 약혼녀인 나를 적당히 질투하는 것에만 그쳤는데, 조세핀 잉그다 영애는 나한테 대놓고 시비도 걸었다.
심증이지만, 내가 악녀니 뭐니 소문이 심하게 난 것도 사교계의 꽃인 잉그다 영애가 손을 쓴 것 같단 말이지.
나를 특히 싫어하는 영애들이 다 잉그다 영애와 친하잖아.
‘단순히 폴리우스를 좋아해서 질투한다기보다는, 나에 대한 악의가 느껴져.’
잉그다 후작가가 클로틸드 공작가에 라이벌 의식을 느낀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말이다.
‘소설에 나온 미래에는 거의 영지전까지 갈 뻔했지?’
내가 죽고 아버지가 실의에 빠지는 바람에 공작가의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고 붕 뜬 틈을 타서, 클로틸드를 사사건건 라이벌로 여기던 잉그다 후작가가 영지를 삼키려고 든 것이다.
사교계를 장악한 걸 이용해서 그럴듯한 명분을 세우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추악하던지.
잉그다 후작 역시 오랜 세월 클로틸드 공작가에 열등감을 느끼던 모양인데. 그 때문인지 부녀가 아주 죽이 잘 맞았더랬다.
‘물론 이번에도 그렇게 흘러가도록 놔둘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생일 파티니까 건들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좋은 날이니까 좋게 가자고.’
* * *
“어서 와, 멜라니!”
“생일 축하해, 스칼렛. 네 생일이라 고심해서 골라 봤어.”
스칼렛이 선물을 받아 들어 무게를 가늠했다. 그리고 묵직함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와, 우리 클로틸드 공녀님이 이번에 힘 좀 쓰셨나 봐? 어깨에 힘 들어간 것 같은데?”
야외에서 열린 생일 파티 현장은 화려하지만 깔끔한 인상을 줬다. 엄청난 공이 들어간 것이 한눈에 보였다.
내가 등장하자 먼저 와 있던 영애들이 눈을 빛냈다.
“어머, 클로틸드 영애가 오셨네요!”
“역시 스칼렛 영애와 친하시니 여기서 뵐 줄 알았어요.”
예상했던 반응이다. 보내는 초대장마다 내가 죄다 거절 의사를 밝히니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겠지.
“이렇게 반겨 주셔서 고마워요.”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에 놓인 꽃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났다.
“이 장미는 정원에 핀 장미와 똑같은 거죠?”
그것을 눈치챈 영애 한 명이 칭찬을 건넸다.
“스칼렛 영애, 저택의 정원이 정말 아름답네요. 영애의 머리카락과 꼭 닮은 장미가 특히 그래요.”
“맞아요. 탁월한 선택이신 것 같아요. 정원사가 솜씨가 좋네요!”
귀족 영애들답게 내가 오자마자 다미안에 대해 묻는 일은 없었다. 생일 파티에서의 예의가 아니니까.
주인공인 스칼렛을 위주로 대화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얼마나 대화가 무르익었을까. 몇몇 영애가 서로를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운을 띄웠다.
“클로틸드 영애. 저번 무도회에서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빨리 돌아가 버리셨잖아요. 길게 이야기하지 못해서 정말 아쉬웠어요.”
“맞아요. 다미안 마탑주도 클로틸드 영애를 부축해서 바로 돌아가 버리시고……”
그리고 훅 치고 들어오는 본론.
“어쩐지 부쩍 아름다워지신 것 같은데, 혹시 사랑의 힘일까요?”
“다미안 벨데르트 영식과 무슨 관계이신지 여쭤봐도 되나요?”
물론 이 정도 이야기가 나오는 건 예상했었다. 귀여운 수준이기도 하고.
‘내 좋지 않은 평판을 생각하면 참 용기 있는 행동이네. 그만큼 궁금하다는 거겠지?’
내가 대답하지 않고 은은하게 웃고 있노라니, 옆에서 스칼렛이 끼어들었다.
“속상해요! 파티의 주인공은 저인데 너무 멜라니의 이야기만 하시는 거 아니에요?”
“어머, 미안해요. 그게 아니라!”
“오늘은 저한테 집중해 주세요! 조금 섭섭해지려고 해요.”
귀족 영애들은 바로 물러났다. 호기심이 컸지만,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스칼렛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오늘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고마워, 스칼렛.’
나는 스칼렛에게 몰래 눈을 찡긋했다. 스칼렛이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이 영애들은 문제가 아닌데 말이다……
“그게 뭐 별거라고 대답해 주지 않으세요?”
여기에는 스칼렛에게 호의적인 영애만 있는 게 아니라서.
“……잉그다 영애.”
어느 정도는 예상하였기에 나는 동요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기애애하던 파티에서 아까부터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던 사람. 그녀가 평소 사교계에서 주목받는 걸 생각하면 의아한 모습이다.
“혹시…… 대답을 못 하시는 걸 보니 어떤 사이도 아닌 건 아닌가요?”
잉그다 영애는 화려하게 웃었다. 꼭 말에 품은 가시를 숨기려는 듯이.
“그렇잖아요. 사실 파트너만 잠깐 한 건데…… 너무 다미안 마탑주의 이름을 거론하는 건 아닌지. 누가 나쁘게 생각할까 봐 걱정되어서요.”
물론 정말 나쁘게 생각하는 건 잉그다 영애 본인이라는 걸 모두가 알 거다.
섣불리 대답하면 안 되는 나 대신 스칼렛이 나섰다.
“잉그다 영애야말로 남의 일을……”
“남은 아니에요. 저, 곧 폴리우스랑 약혼할 예정이거든요. 남편 될 사람의 형인데 신경 쓰일 수밖에요. 안 그래요?”
순간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도 조금 화가 났고.
‘지금 내 친구의 생일 파티를 망치려고 작정을 한 건가?’
걱정하던 바가 실제로 벌어졌다. 폴리우스를 가운데에 끼고 치정 싸움을 벌이게 되는 거.
옆에서 스칼렛이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폴리우스를 그렇게나 좋아하던 나였으니 헤어졌다고는 하지만 동요할까 걱정되는 거겠지.
물론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폴리우스 같은 놈은 너나 가져라. 하나도 안 아까우니까.’
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비록 지금은 헤어졌지만, 저는 폴리우스 님이 행복하길 바라요. 약혼하신다니 그건 정말 충분히 축하드릴 일이긴 한데……”
우선 밑밥을 충분히 깐다. 그리고 잉그다 영애의 말에 전혀 마음 상하지 않았다는 얼굴로, 정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들은 이야기랑은 조금 다른데요……?”
“다르다니 무슨 말씀이신가요. 혹시…… 제가 약혼하는 게 기껍지 않아 그러시는 건 아니죠?”
잉그다 영애는 사교계에서 젊은 영애들의 중심이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거다.
그녀에게 유리하게 짜인 이 구도에서, 말을 조금만 삐끗해도 나는 전 약혼자인 폴리우스에게 아직도 집착하는 여자가 되어 버리겠지.
하지만 나도 바보는 아니었다. 만일을 대비해 준비해 둔 것이 있다.
“나쁜 뜻은 없고, 저는 다른 분이 하신 말을 들었을 뿐이라서요.”
“다른 분이라니요?”
혹시 몰라 이 파티에 오기 전에 그녀를 만났다. 나 대신 싸워 줄 용사를.
“클라라 마르티스 영애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승자의 상쾌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