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11)화 (11/90)

<11화>

“그냥 전 폴리우스 놈과는 다르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그러더니 무슨 말을 중얼거리며 덧붙였다.

“……아까도 편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뭐라고요?”

“못 들었다면 됐습니다.”

작게 말해 놓고 약간 토라진 듯이 고개를 돌리는 건 또 뭐람. 다 큰 성인 남자가 저래 봤자 별로 귀엽지 않은데.

‘음…… 편들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한 건가?’

웅얼거려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다미안 마탑주가 한 말의 발음을 곱씹어 보니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내가 이런 눈치는 또 빠르다.

나는 왜 갑자기 이런 맥락의 이야기를 했나 곰곰이 생각하다가 해답을 찾았다.

‘마르티스 영애에게 한 말을 들어서 나한테 마음의 문을 조금 열었나 봐.’

경계심 많은 남자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순진한 것 같다.

나는 즐겁게 디저트를 다 먹고는 다미안과 헤어졌다.

“그럼 다음에 또 뵙죠.”

그리고 순조롭게 다음 약속도 잡았다. 약혼 이야기에 바싹 날을 세우던 처음에 비하면 대단한 발전이다.

귀족 영애가 ‘대가리’니 뭐니 별 이야기를 했는데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걸 보아하니, 생각보다는 대하기 조심스러운 타입은 아닌 것 같다. 같잖은 내숭은 안 떨어도 되겠군.

‘그리고 싫어하는 타입이 똑같다는 건 알겠어.’

저쪽도 폴리우스 같은 놈을 질색하는 것 같다. 취향이 비슷해서 다행이다. 이 점은 긍정적이군.

* * *

다미안이 멜라니와 만난다는 것은 벨데르트 백작의 귀에도 들어갔다.

“아버지, 다미안이 제 여자에게 추근대는 걸 도저히 묵과할 수 없습니다!”

멜라니에게 만남을 거절당한 폴리우스가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추근댄다고.”

“그렇습니다!”

벨데르트 백작 역시 다미안이 멜라니와 건국제에 파트너로 참석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듣기로는 너와 헤어졌다고 하던데?”

“아닙니다. 저는 동의한 적 없습니다. 다미안이 옆에서 꼬드겨서 그런 말을 한 것이 분명……”

“어리석은 놈.”

그러나 벨데르트 백작은 더 들어 보지도 않고 폴리우스의 말을 딱 잘랐다.

“네가 다른 여자들과 만나는 걸 더는 못 참겠다고 했다지.”

“멜라니가 질투가 심해서 그런 겁니다. 아니, 진짜 문제는 다미안인데 왜 제 탓을……”

“듣기 싫다.”

클로틸드 공녀는 남 주기에는 너무 아까운 신붓감.

요즘 부쩍 다른 귀족들이 멜라니를 보며 아깝다는 티를 내는 것이 거슬려, 슬슬 폴리우스를 멜라니와 결혼시켜 쐐기를 박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오며 가며 보던 멜라니 클로틸드는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았고, 후계자인 그녀가 죽는다면 클로틸드 공작가를 삼키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으니까.

“여자 하나 간수 못 한 게 무어 자랑이라고 떠드느냐? 빼앗긴 게 멍청한 거다, 폴리우스.”

“아버지!”

“실망이 크구나. 다미안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네가 유일하게 나은 점이 사람에게 호감을 사는 것이었는데.”

“……그건.”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자를 뺏겨? 너를 다시 보아야 할 것 같구나. 여태까지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어.”

벨데르트 백작의 눈이 냉정해졌다. 폴리우스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섰다.

“하, 하지만. 다른 여자도 아니고 형제의 여자를……”

그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멜라니 클로틸드는 다른 가문에 빼앗겨서는 안 돼. 네가 놓친 여자를 다미안이라도 잡아서 다행 아니냐?”

“그건……”

“어차피 약혼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니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지……. 다미안 그놈은 벨데르트 성을 버린다느니 어쩐다느니 헛짓거리만 하는 줄 알았더니.”

벨데르트 백작은 오히려 다미안을 칭찬할 뿐이었다.

“다시는 이런 시답잖은 일로 다시는 나를 만나자고 하지 마라.”

쾅, 벨데르트 백작이 나간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폴리우스는 지금의 현실을 믿을 수 없어 손에 얼굴을 묻었다.

‘말도 안 돼. 아버지가 내게 큰소리를 내시다니……’

평소 벨데르트 백작은 폴리우스가 여러 여자와 어울리는 것을 남자답다고 칭찬했었다. 반면 다미안이 어떤 여자와도 염문이 없는 것을 한심하다 혀를 찼다.

그런데 멜라니 하나로 지금의 상황이 뒤바뀐 것이다. 폴리우스는 제 여자도 못 챙기는 머저리로, 다미안은 폴리우스의 바보짓을 수습하는 현명한 놈으로!

“젠장. 다미안 벨데르트, 망할 새끼가!”

벨데르트 백작이 냉정한 성격이긴 해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오늘처럼 차가운 눈으로 폴리우스를 바라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러다가 다미안에게 후계자 자리를 주는 건 아니겠지?’

다미안은 벨데르트 성에 미련도 없었지만, 후계자 자리가 절실한 폴리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멜라니 클로틸드라니. 제대로 된 여자를 건졌구나. 잘했다.”

멜라니의 마음을 얻었을 때 아버지에게 들었던 칭찬이 아직도 선명했다. 클로틸드 가문의 가호를 업은 뒤로는 사교계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벨데르트 성 따위 필요 없다고 뛰쳐나갔지만 멜라니와 약혼하려는 이상 다미안 그 간사한 놈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벨데르트 백작은 다미안이 집안을 뛰쳐나간 지 몇 년인데도 아직 폴리우스를 후계자로 확정하지 않았다.

다미안이 마탑으로 간 뒤로 벨데르트 성을 한 번도 붙인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한창때 투정이려니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폴리우스는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나는 사생아로 태어나 안 그래도 불리한데…… 다미안 그 자식이 나간 뒤로는 방계까지 설쳐 대고……’

폴리우스는 이를 악물었다. 역시 이 상황에서 최선의 수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황녀가 없는 현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인 클로틸드 공작 영애와 이어지는 거다.

‘멜라니를 놓쳐서는 안 돼. 그렇게 나를 좋아했던 여자니, 내가 다시 한번 매달리면 달라질 거야.’

건국제에서 그렇게 치욕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멜라니에게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편지를 썼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굽히는 건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늘의 치욕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골치 아플 거야, 멜라니.’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뭐? 다시 한번 말해 봐. 그럴 리가 없다!”

“죄송합니다. 드릴 답신이 없다고……”

아예 이쪽을 무시해?

‘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는 건데. 어떻게 나를 등질 수가 있지? 다른 누구도 아닌 멜라니가?’

남들이 차갑다고 해도 그게 오해라고 생각했건만. 다른 여자와 몇 번 만난 것으로 멋대로 이별을 통보하다니.

‘남자는 얼굴이 전부가 아닌데. 어떻게 다미안 같은 남자와……’

폴리우스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버지도, 멜라니에게도 냉정하게 내던져진 지금……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는 빠르게 말을 타고 달려, 잉그다 후작가에 당도했다.

“어머, 폴리우스!”

“조세핀.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폴리우스는 저와 각별한 사이잖아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답니다. 이렇게라도 폴리우스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기쁜걸요?”

자신이 만나자고 하는 것을 차갑게 거절하는 멜라니와는 달랐다. 조세핀은 자신이 연락도 없이 왔는데 환하게 웃으며 맞이해 주었다. 이것 역시 냉정한 멜라니와는 다른 점이었다.

“……폴리우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요.”

“조세핀, 너는 날 버리지 않을 거지?”

조세핀은 잉그다 후작가의 영애였다. 비록 가문은 멜라니의 클로틸드보다 약간 격이 낮다고 해도, 조세핀은 특유의 성품으로 사교계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사교계는 가문의 세와는 또 다른 세계. 이제 믿을 것은 조세핀밖에 없었다.

폴리우스는 자연스럽게 조세핀에게 안겼다.

“어, 어어?”

“조세핀…… 난 너밖에 없어. 너까지 내게 등 돌리면 난…… 죽어 버릴지도 몰라……”

“그런 소리 말아요! 제가 왜 은인인 폴리우스에게 그러겠어요.”

조세핀은 화들짝 놀라며 폴리우스를 토닥여 주었다.

‘내가 팔이 부러졌을 때 통증을 줄여 주겠다고 폴리우스가 축복을 걸어 주지만 않았어도…… 클로틸드 영애가 약혼을 파기하지는 않았겠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폴리우스와 함께 침대에 있다가 그 모습을 들킨 건 행운이었다.

가문의 역사는 클로틸드 공작가와 잉그다 후작가가 비슷한데, 멜라니가 괜히 얼마 살지 못할 몸이니 하니 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게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폴리우스의 진정한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이다!

멜라니 클로틸드가 가지지 못한 남자를 차지하면 얼마나 짜릿할까!

‘지금 폴리우스를 제대로 도와줘서, 나를 더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

폴리우스가 이렇게까지 슬퍼하는데, 자신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멜라니 클로틸드를 만날 기회를 마련해야겠어.’

조세핀은 야심 차게 속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자신이 멜라니를 적대하는 것이 폴리우스가 노린 바라는 걸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