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10)화 (10/90)

<10화>

“뭐, 뭐, 뭐라고요!”

다시 한번 높은 고성이 나왔다. 누가 들으면 지구가 멸망한다는 말을 한 줄 알겠어.

“폴리우스 님이 상처받든 말든 클로틸드 영애는 상관없다 이건가요? 어쩜 그렇게도 이기적인……”

“아, 정말로 상관없는 건 마르티스 영애고.”

“네?”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눈앞의 상대 덕분에 귀가 아플 지경이다.

“마르티스 영애가 나나 폴리우스 영식과 무슨 사이라고 이렇게 와서 조언까지 하는지 모르겠군요. 도를 넘은 오지랖은 사양하고 싶은데요?”

“당신은 몰라요.”

“뭘요?”

“그분의 상처를 말이에요! 폴리우스 님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안다면 이렇게 장난식으로 나올 수 없어요!”

마르티스 영애는 비련의 드라마 주인공처럼 입술을 깨물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이랬다.

‘드라마를 쓰고 앉았네.’

지금 마르티스 영애가 보는 나는 지독한 악녀일 거다. 언제나 폴리우스가 피해자,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상황이 지독하게 싫다.

“지금 영애의 눈앞에 있는 다미안 마탑주…… 보이는 것처럼 빛나는 사람 아니에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요.”

내가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동안 마르티스 영애는 비장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폴리우스 영식이 영애에게는 말하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분이 여려서 비밀로 해 왔겠지만…… 나는 꼭 말해야겠어요.”

“으음.”

“왜냐하면 폴리우스 영식이 진짜로 사랑하는 건 클로틸드 영애니까요. 분하지만, 정말로 분하지만…… 나로서는 안 돼요.”

본인에게 너무 심취해 있으니 어디서 말을 끊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더는 못 들어 주겠군.’

나는 냉정한 눈으로 말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나더러 폴리우스를 받아 주라 이건가요? 본인도 폴리우스에게 약혼자가 있는 걸 알고도 만났으면서 비련의 여주인공이 따로 없네요.”

“그분의 마음을 받으면서 마탑주하고 만나지 말라고요!”

두 손을 꼭 쥔 마르티스 영애가 바들바들 떨며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외쳤다.

“사실 폴리우스 영식은 평생을 사생아라 폄하당했고……”

“아, 본인이 상간녀의 아들이라 차별받는다고 징징거린 거요?”

별거 아닌 거 가지고 하도 무게를 잡길래 내가 모르는 게 나오나 했다.

“무, 무슨!”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 마음 따위, 본처 아들의 입장에서는 안 궁금할 것 같은데요. 차라리 다미안 마탑주님 마음을 헤아리는 게 정상적이지 않나요?”

소설 <서자인데 사업으로 제일 잘나가!>는 분명 폴리우스가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에게 유리한 시점에서 전개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내 신경을 건드리는 대목은 분명 존재했다.

“하긴 다미안 넌 사생아가 아니라 모르겠지.”

“……뭐?”

“똑같이 아버지의 아들인데 왜 나는 더럽고 너는 깨끗해? 우리 어머니는 그냥 아버지를 사랑한 죄밖에 없는데!”

그게 불륜으로 태어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잖아. 그 밖에도 소설에 있던 구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실 폴리우스 도련님이 모시기 더 쉽지 않아?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우신지……”

“후계는 아직 정하지 않겠다. 차후 너희의 성과를 보고 공정하게 평가할 테니 그리 알도록.”

결국 마땅히 후계가 되어야 할 다미안 마탑주가 집안에서 뛰쳐나왔다.

‘자신에게 당연하게 돌아와야 할 후계자 자리를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거면 솔직히 폴리우스에게 주겠다는 거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주인공의 세상에서 상처받았을 다미안 마탑주의 마음은 어땠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인 폴리우스가 마음에 들지 않던 건, 조연인 멜라니나 악역인 다미안 마탑주의 사연이 인상 깊게 서술되어서다.

내가 허무하게 죽는 조연인 멜라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주인공이 아닌 캐릭터로서 동질감이 들기도 하고.

나는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폴리우스 그 사람. 원래 자기가 사생아라서 힘들었다는 거 쉽게 말해요. 그래서 조금만 본인을 지적하면 내가 더러운 핏줄이라 그렇냐며 말한 사람을 나쁘게 만들죠.”

특히 본인의 상처를 말하는 건 여자들한테 잘 먹히는 것 같다. 모성애와 측은지심을 자극하는 건지.

“막 폴리우스를 지켜 주고 보듬어 줘야 할 것 같고 그래요? 이 상처를 아는 건 나뿐이라고 생각했어요?”

“…….”

“아, 놀랐어요? 영애한테만 말한 건 줄 알았나? 그 사람 모두한테 그래요.”

물론 나 역시 내 통증을 줄여 주니 폴리우스를 보듬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멍청이 중 하나긴 했다.

나는 비웃듯 말을 이었다.

“뭐, 폴리우스는 바람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본인만 세기의 피해자인 척할 수 있었겠죠. 그러니까 저랑 사귀면서 영애랑 만나기도 하고요.”

마르티스 영애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사실 난 걔가 영애랑 잘되든 말든 상관없어요. 그런데 본인 혼자 모든 걸 아는 척, 세기의 사랑을 하는 척하지 말아 줄래요. 어차피 임자 있는 사람하고 놀아난 거면서.”

“나, 나는……”

“그리고 영애를 위해 한마디 하자면, 폴리우스의 건국제 파트너를 한 정도로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시죠. 침대까지 같이 간 다른 여자도 있으니까.”

“!”

그걸로 끝이었다.

“나, 나는…… 이만 실례하겠어요!”

마르티스 영애는 충격을 받은 듯 가게를 뛰쳐나갔다. 비틀거리던 그녀는 중간에 한 번 넘어졌는데도 꿋꿋하게 일어나 달려 나갔다.

휴,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나는 이미 식어 버린 물을 조용히 들이켰다. 맹물이긴 해도 따뜻한 편이 마시기엔 좋았는데……

쯧, 바람을 피운 사람이 도리어 훈계질을 하다니. 이 세상은 주인공에게 너무 상냥하다.

‘그런 원작 따위 내가 부숴 주겠어.’

속으로 약혼자에서 악역으로 전직하겠다는 사악한 마음을 품고 있노라니 다미안이 맞은편에 앉았다.

“왔어요?”

“…….”

그런데 나를 보는 표정이 조금 묘했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자리를 비운 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고.”

오히려 잘됐다고 해야 하나. 마르티스 영애가 하는 말을 다미안 마탑주가 들었다면 아무리 그라고 해도 상처받을 수 있잖아.

나는 싱긋 웃었다. 차는 식었지만 디저트는 여전히 맛있었고, 간만에 쏘아붙였더니 기분도 꽤 괜찮았다.

“영애.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그럼요.”

그리고 의외로 다미안 마탑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에게 궁금한 점이 생겼다니 긍정적인 움직임이다.

그런데 허락을 받고 나서도 다미안 마탑주는 꽤 머뭇거렸다.

“폴리우스와 왜 헤어진 겁니까? 무도회에서 말했던 대로…… 여성 편력 때문에?”

“아무래도 그렇죠? 뭐가 아쉬워서 굳이 그런 남자를 이해해 주면서 만나야 하나요. 뭐, 그것 말고도 여러 부분이 안 맞았고.”

“예를 들면 어떤?”

“세상에서 본인만 제일 고통스럽고 힘들다고 생각하는 점?”

다미안 마탑주는 금방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너는 편안한 처지라서 모른다, 사생아의 일생이 어떤 건 줄 아냐. 뭐 그런 것 말씀입니까?”

“정확하시네요.”

“그러면서 본인은 착하고 선하니까 참아 주겠다는 듯이 아련한 미소를 짓는 것?”

역시 폴리우스에게 직접 당해 본 사람이라 바로 알아듣는군.

나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청순한 타입의 남자는 안 만나기로 했어요.”

“영애는 그럼 우락부락한 남자를 좋아하시는 건가요. 남자가 청순한 게…… 나쁜 겁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아뇨. 폴리우스의 대가리가 청순하다는 뜻이었어요.”

“크흡.”

다소 점잖지 못한 내 말에 다미안 마탑주는 찻잔을 엎질렀다.

“마탑주님. 첫 만남 때에는 찻물을 뿜을 뻔하더니, 차와 상성이 좋지 않으시군요……”

“제 문제가 아니라 영애께서 저를 놀라게 하는 거라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대가리가 어때서요?”

꼰대스러운 발언을 하려나 기다리고 있는데, 의외로 다미안은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영애에게는 어울리는 화법입니다.”

오,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보는군. 하지만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던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절 놀리시는 건가요?”

“그냥 솔직히 말한 겁니다.”

의외로 다미안 마탑주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폴리우스 귀에 들어가라고 사람들에게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겸 사업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시간이 금방 갔으니까.

‘나야 원래 처음부터 다미안 마탑주를 편하게 대했으니…… 변한 건 다미안 마탑주인가?’

어쩐지 처음보다 나에게 경계를 푼 느낌이 들었다.

“만약 제 약혼 안 받아 주시겠다고 해도, 저 만나는 동안 다른 여자와 염문설 나시면 안 돼요.”

“전 원래 여자 쉽게 안 만납니다.”

다미안 마탑주는 약간 발끈한 듯이 말했다. 나는 놀리듯 말끝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이야, 마탑주님의 그런 점이 좋다니까요.”

“영애의 마음에 들려고 그런 건 아닙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냉정하게 뚝 자른담. 사람 무안하게.

잠깐 풀어지나 싶은 분위기가 다시 냉각되려는 찰나, 다미안 마탑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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