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 조합으로 나를 만난 게 퍽이나 우연이겠다.
게다가 천연덕스러운 시늉을 하기는 하지만 내게 시비를 걸려는 의도를 애써 숨기지는 않는다.
“어머님과 함께 나온 길에…… 클로틸드 영애를 만날 줄은 몰랐네요?”
잉그다 영애는 나를 보며 승리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밀라 부인과 팔짱을 낀 팔을 좀 더 가깝게 붙이기까지 했다.
‘너는 폴리우스와 헤어졌고, 나는 그 폴리우스의 어머님과 화기애애하다 이거지.’
본인이 예비 며느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피식 웃음이 나온다.
저번 생일 파티에서 마르티스 영애와 한바탕한 이후로, 나에게 어떻게든 한 방 먹일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사교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니, 어떻게 나를 노릴까 했는데……
겨우 이런 유치한 수라니. 오히려 반갑다고 해야 하나?
‘요즘 내가 콘텐츠 준비한다고 사교 모임은 안 가면서 이 근방을 자주 지나다녔더니 소문이 돌았나 보네.’
잉그다 영애만큼이나 밀라 부인 역시도 희희낙락한 얼굴이었다.
“잘 지냈니, 멜라니…… 아니, 이제는 클로틸드 영애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예전과 달리 밀라 부인은 내게 존대를 했다.
하지만 말투만 그렇다뿐이지, 표정은 그다지 반가워 보이지 않았다.
저번에 내게 내쳐진 앙금이 남은 게 분명했다.
‘처음엔 일부러 반말하다가 존대로 말 고치는 건, 내가 저번에 한 말을 비꼬는 거지.’
그리고 내 안부를 물어본 주제에 대답도 듣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오호호. 나는 여기 있는 조세핀이 잘해 주어서 잘 지냈답니다.”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걸요.”
나는 별말도 하지 않았는데, 눈앞의 두 사람은 잘도 대화를 이어 간다.
“그런데 요즘 다미안 마탑주랑 만난다던데…… 사실이야? 우리 폴리우스랑 안 되니까 대신 형제를 노리는 건 아니죠? 그 남자는 영……”
애초에 제대로 된 존대를 하려는 것 같지도 않다.
그저 나 따위의 대체품은 얼마든지 있고, 오히려 네가 아니라 조세핀과 있어서 행복하다는 태도다.
비웃듯이 내려다보는 눈빛. 그러면서도 악의는 없다는 듯 덧붙인다.
“아니, 내가 그래도 예전에는 친했던 사이니까 클로틸드 영애가 걱정되어서…… 왜 하필이면 형이냐는 거지. 오호호.”
“그러게요, 왜 하필 그분을……”
“있지, 클로틸드 영애. 마탑주 그 애는 내가 잘 아는데……”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이곳에서 만나려던 남자가 나타났다.
“저를 잘 안다고 할 정도의 친분은 없는 듯합니다만, 부인.”
밀라 부인과 잉그다 영애가 지금 대화에 올린 당사자.
다미안 마탑주였다.
“꺄아악!”
밀라 부인은 갑자기 나타난 다미안을 보고는 놀라서 경기를 일으켰다.
“다, 다미안?”
그래, 놀랄 만도 하겠지. 내 앞에서 신랄하게 욕하려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마십시오.”
그래, 내가 밀라 부인과 잉그다 영애가 지껄이는 걸 내버려 둔 이유는 이곳이 다미안 마탑주와의 약속 장소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카페 안에서 만나기로 하긴 했는데.
“나…… 나는.”
여태까지 욕을 할 것처럼 말해 놓고 정작 다미안 마탑주와 마주하니 밀라 부인은 덜덜 떨었다.
다미안 마탑주는 냉정하게 말을 잘랐을 뿐, 특별히 위협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뭐라도 되는 듯이 굴더니만.
결국 본부인의 자식 앞에서 상간녀는 작아질 수밖에 없는 건가?
“저기요.”
힘이 다 빠진 밀라 부인을 지탱하며 잉그다 영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그러나 잉그다 영애가 간신히 꺼낸 말은 다미안 마탑주에게 쉽게 무시당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기다리느라 무리하지는 않았습니까?”
다미안 마탑주가 나를 챙기느라 자연스럽게 잉그다 영애의 말을 무시했거든.
오,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힘들어하는 걸 바로 알아차리더니.
‘그렇지 않아도 지금 다리에 힘이 없어서 곤란하던 차였는데.’
드레스 자락은 발목까지 오니까, 다리가 떨리는 건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오늘 너무 오랜 시간 바깥에 나와 있었지만, 하나같이 중요한 일정이었기 때문에 미룰 수가 없었다.
차라리 한꺼번에 일을 처리하고 며칠 앓는 게 효율적인 면에서는 낫기도 하고 말이야.
“앉아 계시기라도 하지, 힘들게 서서 기다리시다니요.”
“아뇨, 오 분도 기다리지 않았는걸요. 뭣보다 제가 일찍 끝나서……”
생각보다 극단과의 이야기가 일찍 끝나서 내가 약속 이십 분 전에 왔다.
다미안은 십오 분 전에 왔으니 절대 늦은 게 아닌데 말이야.
그러나 내 말에 다미안 마탑주는 잘생긴 미간을 찌푸렸다.
“하긴, 이 사람들 때문에 들어가지도 못했겠군요.”
그의 살벌한 시선이 밀라 부인과 잉그다 영애에게로 향했다.
“몸도 약한 사람 앞을 막고 앉지도 못하게 하다니, 공녀를 대하는 예의범절은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
“하긴, 지능이 없으니까 상간녀 노릇이나 하겠지만.”
신랄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나는 우아하지 못하게 입이 떡 벌어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와, 진짜 세다.’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맞은편에 있는 잉그다 영애도 사기를 전부 잃은 채 넋이 나가 있었다.
“그, 그런 말을 어떻게 함부로!”
“아들이 덜떨어진 것도 역시 어미를 닮아서겠지요. 제 분수를 모르고 함부로 설치는 게 비슷하군요.”
쏟아지는 폭언.
나는 무어라 입을 열지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다미안 마탑주와 친해지려고 한 사람이 한둘이었을까.
그런데도 그와 친하다는 지인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그는 그런 빌미조차 주지 않았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감히 다가가기 어려운 성격이라고 들었던 것 같아.’
나에게는…… 굉장히 예의를 갖춰서 친절하게 대하고 있던 거구나.
예전에 다미안 마탑주와 만났을 때, 내가 폴리우스에게 ‘대가리가 청순하다’고 한 말을 그냥 넘어갔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음, 이 정도 폭언에 비하면 내 말 정도야 애교지.
나는 아무리 그래도 밀라 부인 앞에서 폴리우스 욕은 이렇게까지 못한다.
“가뜩이나 오늘 일하고 와서 힘들었을 텐데, 편히 쉬지도 못하고 시간을 낭비했겠군요.”
“저야 뭐……”
“그럼 이만 자리를 옮기실까요. 벌레가 꼬이지 않는 괜찮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우와, 마무리까지 제대로 하네.
하지만 벌레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반발은 나오지 않았다.
마탑주의 나지막한 목소리, 훤칠한 키.
특유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는지 잉그다 영애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오늘은 제대로 짓밟혔으니 그냥 물러나는 게 낫지.’
그러나 다미안은 끝까지 말을 더 보탰다.
“저는 누구와는 다르게 여자 돈 뜯어먹는 놈은 아니라서요.”
“!”
“그리고 저는 아들 팔아서 욕심 채우는 어머니도 없고요.”
이야, 아까 다 끝난 게 아니었어?
나는 속으로 박수를 짝짝 쳤다.
잉그다 영애의 이가 악물리는 게 보였지만, 다미안 마탑주는 여상하게 말을 또 이었다.
“개인적으로 여자에게 효도를 대신 시키는 남자는 최악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모습 보지 마십시오. 괜히 눈만 낮아집니다.”
잉그다 영애와 밀라 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러나 어떤 말도 꺼내지는 못했다.
‘그래, 내가 괜히 다미안 마탑주를 선택한 게 아니라고.’
둘이 같이 모이더니. 오히려 제 꾀에 자신이 당하는 모습이잖아?
나는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제 발등을 자기가 찍네.
피식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나는 그다지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잉그다 영애에게 상냥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저는 마탑주님과 약속이 있어서요.”
“…….”
“없으신가 보네요? 방금까지만 해도 굉장히 많아 보이셨는데.”
지금 내 얼굴에 걸린 거야말로 진정한 승리의 미소가 아닐까?
폴리우스 같은 놈이나 잘 잡고 살아라, 두 사람은.
‘사실 이미 잘생긴 남자가 옆에 있는 시점에서 내가 이긴 것 같지만.’
오늘 다미안 마탑주는 유난히 근사하다.
평소에도 단정하게 입는 편이긴 했지만, 오늘은 꾸며서 나왔다 보니 더 빛이 난다. 화려한 스타일까지 잘 어울릴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이런 남자를 옆에 두고 걷다니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군. 폴리우스와 함께 있을 때는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우쭐한 마음이다.
“그럼 가지요.”
나는 피식피식 웃으면서 다미안 마탑주의 리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