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그리고 두 사람이 보이지 않을 무렵 입을 열었다.
“정말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서, 적절하게 말하셨네요.”
은근 딱딱한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역시 밀라 부인이 상대라서 그런가, 생각보다 말을 잘하잖아?
다미안 마탑주는 얼굴을 굳히더니 말했다.
“제가 더 일찍 왔어야 했습니다. 저런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들으시다니.”
“아하하, 그래도 통쾌했는걸요? 그리고 이건 마탑주님 잘못이 아니에요.”
그래도 다미안 마탑주는 찝찝하다는 얼굴이었다.
“쓸데없는 사람을 만나서 피곤하실 텐데, 회의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할까요.”
아니, 오늘은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다 모여서 회의를 하는 날이잖아.
다미안 마탑주가 마법사들을 총괄하는 건 맞지만, 그들도 시간을 맞추는 게 보통 일인가.
일정을 미루겠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해?
‘그냥 내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건데, 저 사람들 핑계를 대주고 말이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까부터 손발이 저릿저릿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은 해치우고 쉬는 게 마음 편하다.
“아뇨, 차라리 오늘 일을 다 해치우고 내일은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러시다면야……”
나는 다미안 마탑주를 따라 광장 모퉁이 길을 돌았다.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허름한 골목길, 장사하지 않는 가게 이 층으로 올라가 문을 여니 마탑으로 향하는 통로가 나왔다.
위이잉-
공기 중에 떠다니는 색색의 빛, 마법사가 아닌 나조차도 느낄 수 있는 마력의 기운.
다른 사람들은 여기에 마탑으로 향하는 길 같은 게 있는 줄 모르겠지?
그렇게 우리는 수도의 광장에서 순식간에 마탑으로 이동했다.
* * *
회의까지 시간이 남아서 다미안 마탑주와 나는 각각 사무실에서 회의 준비를 마저 하기로 했다.
나는 책상 위 서류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최근에 검은 달의 영상석 사업뿐만 아니라 틈틈이 상단 일까지 들여다보느라 요즘 나는 굉장히 힘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클로틸드 상단의 일부가 나를 도와주러 와서 수월하게 일이 진행됐다.
상단의 인력들은 다들 검증된 사람들이니.
“배송 단가 건은 이번 주 안으로 검토해서 보내 드린다고 해요.”
“공녀님, 많이 바쁘신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조금 쉬엄쉬엄하는 게 어떠세요?”
“난 늘 상단 직원들에게 도움을 받았잖아요. 이 정도는 내가 할 일이에요.”
허울뿐인 상단주였던 내가 일을 많이 한다고 염려 받는 날이 올 줄이야.
클로틸드 상단에서 온 직원이 나를 말리는 일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검은 달의 모든 사람이 나를 긍정적으로 보는 건 아니었다.
신입 직원들을 제외하고 클로틸드 상단에서 오거나, 아예 적을 옮긴 직원들은 날 ‘상단에는 관심 없고 아픈 공작 영애’라고 여겼다.
“연극에 관심이 많다고 했는데, 말한 연극 중에서 최근에 공연한 건 없네요?”
“영상석을 통한 연극의 대중화가 주제인데, 극장 좌석은 초점이 좀 어긋난 것 같군요.”
그래도 상단 관련 직원들은 나와 대면하는 일이 많았다.
“채용 권고는 저희가 했다지만, 면접을 보신 건 대표님이잖습니까. 예리한 질문을 하시는 걸 보고 솔직히 놀랐습니다.”
나와 함께 일을 하면서 조금씩 시선이 바뀌는 게 느껴졌지만……
‘마법사 몇 명은 여전히 나를 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아.’
내가 도맡아서 하는 일이 수없이 많고, 그중에는 굵직굵직한 일도 적지 않은데.
마탑에서 기술 쪽을 담당하는 마법사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나 보다.
내가 주로 돌아다니며 영상용 콘텐츠를 계약하고 다른 사무실에서 마케팅 계획을 세우는 동안 다미안 마탑주와 같이 일하는 마법사들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마탑은 가장 강한 마법사인 마탑주가 이끄는 집단인데, 나는 마법사가 아니다.
그런데 다미안과 대등한 위치에서 그들을 이끌게 되었다.
마법사들이 혼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야, 역시 귀족 영애다우십니다. 대단해요. 마법사들과는 다르네요.”
이렇게 대놓고 시비 거는 건 아닌데, 가끔 묘하게 들리는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는 한편.
“그, 그…… 귀족 영애께서 이런 작업을 하는 건 괜찮으신지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보는 제가 불편하단 말입니다. 연약한 분이실 텐데.”
지나치게 ‘귀족 영애’라는 신분에만 얽매여서 나를 같은 일을 하는 동료로 안 보는 일이 있었다.
‘뭐,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여기에서 태도가 불편하다고 소란을 떠는 게 더 위화감을 느끼게 하지 않을까?
함께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괜찮아질 거다.
어차피 내가 맡은 분야는 마법사들과 얽히는 일이 적기도 했다.
곧 회의 시간이 되어 나는 회의장으로 향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할까요? 클로틸드 대표님.”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다미안 마탑주 뿐만이 아니었다.
오늘은 총괄 회의라 마탑의 마법사들 외에 나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참석했다.
“영상석 크기는 이 정도로……”
“배송 과정에서 영상석이 깨지지 않을 방법이 필요합니다.”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있으니 어색한 공기가 흐르던 것도 잠시.
조용하게 시작된 회의는 어느덧 열정적인 말이 오고 가게 되었다.
“연극 영상을 만드는 속도가 생각보다 느리고, 품질도 떨어집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연극을 녹화할 때 이런 장비가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기존에 영상석을 연구했거나 연극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참여하게 된 마법사부터 연극 감독이나 마케팅 전문가까지.
각각 다른 분야에서 모였기 때문인지 다들 영상석에 관한 다양한 관점을 쏟아 냈다.
덕분에 이야기는 끊길 새가 없었다.
메모해 가며 회의에 집중하던 나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마력석 품질 관련해서 건의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운 걸 숨기려고 알도 없는 안경을 쓴 마법사였다.
“마력석의 커팅 방식을 떠나, 애초에 자투리 마력석을 쓰는 것부터가 문제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법사가 되지도 않는 시비를 걸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커팅 방식을 논의하는 건 가장 훌륭한 가성비를 찾아가는 과정인데, 이미 끝난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
“알라 급과 네인더 급. 마력을 부여했을 때의 결과는. 100니베와 25니베, 1000헤리나와 80펠르. 단순히 숫자만으로는 이만큼 차이 나지만, 아이에리나 급의 마력석은……”
그는 어려운 마법 단어들을 줄줄이 꺼내며 한참 말을 이어 가더니 돌연 피식 웃었다.
“아, 제가 방금 한 말들. 클로틸드 영애를 비롯한 다른 직원분들께서는 마법사가 아니라서 모르시겠군요.”
이번에는 아예 노골적인 시비였다.
프린츠 마법사의 말을 듣고 있던 내 담당 쪽 직원들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
특히 클로틸드 상단에서 오래 일한 직원들의 표정이 그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상단주니까.
내가 잘못해도 본인들이 욕하고 싶어 하지 남들이 욕하는 건 기분 나쁠걸.
“그 건은……”
프린츠가 말을 꺼낼 때부터 탐탁지 않은 표정의 다미안 마탑주가 나서려 했지만 내가 먼저 대꾸했다. 마법사가 아닌 직원들을 대표해서.
“영상석 사업이 대중화 노선을 띠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데, 마력석 등급은 이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나는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혹시 알아듣지 못하는 직원들을 위해 짧게 프린츠 마법사의 말을 정리했다.
물론 나도 마법사가 아니라서 저 말들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부는 안다.
‘알라 급과 네인더 급? 사어가 되다시피 한 단어를 굳이 들먹이는 건 시비 거는 거지.’
나랑 다른 직원들의 마법 지식이 얼마나 되는지 떠보는 것 같은데 이건 경우가 아니었다.
‘다른 분야로 따지면, 일러스트를 그리는 사람한테 왜 게임 회사에서 일하면서 컴퓨터 언어를 모르냐고 따지는 격이잖아.’
자꾸 마법사가 아니라는 걸 언급하면서 논점을 흐리는데, 핵심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사업 노선은 프린츠 마법사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닙니다.”
나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일이 시작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아직도 담당해야 할 부분이 뭔지 이해하기 어렵다면, 회의 시간에 발언하지 말고 같은 팀의 마법사에게 물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