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18)화 (18/90)

<18화>

“……영애야말로!”

프린츠 마법사는 일순 말문이 막혔으나, 다시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려고 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격해지려는 것을 다미안 마탑주가 나서서 막았다.

“영애가 아니라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게 그렇게 어렵나?”

“그건!”

“마법사가 아닌 다른 직원들도 ‘검은 달’의 일원이야. 이곳은 마탑의 회의가 아니라 ‘검은 달’의 회의라는 것을 생각해서 발언했으면 좋겠군.”

“…….”

“쓸데없이 잘 쓰지도 않는 언어를 쓰면서 지식을 뽐내지 말고, 청자를 고려해. 그쪽이 훨씬 똑똑한 거라는 걸 말해 줘야 하나?”

프린츠 마법사는 분한지 이를 악물었다.

옆에 있던 마법사가 당황한 시선으로 프린츠 마법사를 팔꿈치로 건드렸다.

“아, 아하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이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과의 회의는 처음이다 보니. 클로틸드 ‘대표님’께 얼른 사과드려.”

다미안 마탑주도 제 편을 들어주지 않고, 옆에서 마법사들이 눈치를 주자 고민하던 프린츠 마법사는 결국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괜찮습니다.”

그래, 몇몇 직원들은 아직도 내가 대표라는 걸 잘 받아들이지 못하니 오늘같이 분명하게 선을 긋는 사건이 벌어진 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뭐, 나는 여상하게 프린츠 마법사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

클로틸드 상단 직원들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능숙하게 받아치는 모습이 상당히 의외인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나를 ‘무능하고 몸이 약한 예민한 공녀’ 정도로 생각했을 텐데.

‘내가 폴리우스에게 목매는 모습만 봤으니 당연하지. 하지만 이제는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으니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줘야지.’

어쨌든 어색한 분위기에서 눈치를 보던 직원 하나가 능수능란하게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하하, 그럼. 이번에는 제가 발표해도 될까요? 제 생각에는……”

마법사들의 긴긴 발표가 끝나자, 다미안 마탑주는 깔끔하게 회의를 정리했다.

창밖은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

“다음 회의 때 뵙지요.”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여태까지 한 회의 중에 가장 많은 인원이 진행한 회의답게 많은 사람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고 남았다.

좀 더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마찬가지로 최종 결정권자인 다미안 마탑주와 같이 시범용 영상석을 보기로 했거든.

“이건 다른 사람과 일정이 잡힌 것도 아니니 미뤄도 될 것 같습니다만……”

“아뇨, 제가 당분간은 앓아누울 것 같아서요. 그럴 바에 오늘 다 끝내는 게 낫죠.”

“…….”

어차피 아까 몸 상태가 안 좋다는 건 들킨 지 오래니 솔직하게 말했다.

다미안 마탑주는 이런 나를 보며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나에게 자리를 옮기자고 말했다.

“……이게 뭔가요?”

자리를 옮긴 곳은 회의실보다 편안한 느낌의 공간이었는데…… 공작 영애인 나도 처음 보는 희한한 물건이 있었다.

이건 소파도 아닌 것이, 빈백도 아닌 것이, 뭐지?

“그럼 편한 자세로라도 보시죠.”

“오.”

물렁물렁하게 생긴 의자는 내가 누우다시피 앉으니, 내 몸에 딱 맞게 변형되어 편하게 딱 잡아 줬다.

‘좋은데?’

여태까지 앉아 본 것 중에 최고다. 내가 눈을 빛내자 다미안 마탑주는 여상하게 말했다.

“필요하시다면 가져가셔도 됩니다.”

“그냥 제가 사고 싶은데요. 이거 굉장히 편한데, 상용화는 안 하시나요?”

“재료 구하는 게 까다로워서요.”

“저런.”

안타깝다. 의자 시장도 제대로만 공략하면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일으켰던 몸을 다시 뉘었다.

곧 다미안 마탑주 역시 비슷해 보이는 종류의 의자에 눕다시피 앉았다.

내 바로 옆이었다. 그야 영상석 크기가 작으니 어쩔 수 없긴 한데.

‘음, 이러고 있으려니 꽤 가깝잖아?’

자세를 다시 다잡노라니 다미안 마탑주보다 내가 약간 높은 자세가 되었다.

조금 위에서 내려다보니, 눈을 잠시 감았다 뜰 때마다 긴 속눈썹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잘 보였다.

새삼스럽지만 참 예쁜 눈이었다.

여태까지 앉아서나 서서만 보다가, 느슨한 자세로 나란히 있는 것도 처음이고 말이야.

‘……아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네.’

나는 너무 빤히 쳐다보는 실례를 저지를까 봐 바로 시선을 돌렸다.

여태까지 다른 사람과 계속 시끄럽게 떠들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니 그 간극이 더 크게 느껴진다.

나는 조금 민망함을 느끼면서, 정적을 깨고자 챙겨 온 가방을 열었다.

“영상을 보면서 먹기 좋은 팝콘이란 걸 제가 만들었는데.”

하지만 나는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아까 다미안 마탑주를 보고 있던 것처럼, 그 역시 나를 보고 있어서……

눈이 딱 마주쳤다.

아까 감탄했던 속눈썹 아래에는 보석 같은 붉은 눈동자가 자리해 있었다.

왜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놀란 건지 모르겠다.

선명한 눈에는 용케도 놀란 티를 내지 않은 내가 비치고 있었다.

“음, 평소에도 심심풀이로 먹기에 좋아요. 다른 분들에게도 이야기해 두었는데 드셔 보셨나요?”

“……여러 종류의 시즈닝을 뿌릴 거라는 계획도 세워 두셨다면서요.”

“네. 이것저것 다 시도해 보고 싶어요.”

나는 당황하지 않고 바로 말을 이었다.

자세를 뒤척거리는 옆 사람을 무심코 볼 수도 있는 건데, 괜히 과민 반응할 뻔했다.

“<프리세니아의 봄>, 최근에 나온 꽤 유명한 연극이어서 녹화 허락을 받느라 꽤 애썼죠. 기대작이라 가장 먼저 완성된 건데, 이건 마지막 버전이에요.”

연애 이야기긴 한데, 그게 주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여주인공의 성장기랄까.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상황에서, 여자가 새삼 남자의 말과 행동을 되짚는데……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지 넘기고, 그다음에도 좀 이상하지만 이해하려고 하다가. 점점 이런 일이 반복되자.

-저기. 어머님이 내 명의로 너무 많은 일을 하시는 것 같아서……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마. 예쁨받으면 좋잖아?

-하지만.

-어차피 결혼하면 가족이 될 사이잖아.

여주인공이 애써 연인에게 항의하지만,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린다.

그리고 제삼자가 보기에, 지금 두 사람의 상황은 일반적인 연애 관계가 아니다.

나는 아까 잠시 부끄러워하던 것도 잊은 채, 영상에 몰입했다.

영상 소리만 가득하던 그때, 다미안 마탑주가 뜻밖에 먼저 입을 열었다.

“밀라 부인이 혹시 영애에게도 금전적 요구를 자주 했습니까?”

확실히 이런 내용이다 보니 아까 밀라 부인이 안 떠오를 수가 없다.

“불편하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뇨, 확실히 많이 당하긴 했죠. 제가 사라지자 잉그다 영애로 대상을 바꾼 듯하지만.”

“그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군요.”

둘만 있으니 크게 말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기분이다.

짙은 눈썹을 찌푸리는 다미안 마탑주의 표정이 아까보다 훨씬 자세히 보인다니까.

나는 대답하느라 돌렸던 얼굴을 정면으로 돌리며 피식 웃었다.

‘하긴 밀라 부인 싫어하는 건 나보다 다미안 마탑주가 더 심한 것 같아.’

좀 이해받는 느낌인걸? 내가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겠어.

“그러고 보니 아까는 정말 감사했어요. 제 속이 시원하더라니까요.”

“……굳이 영애 때문에 한 건 아닙니다.”

“아아, 원인이 제가 아니라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제 기분이 좋았으니 감사하다고 할게요.”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다미안 마탑주는 그렇게 입을 다물더니 고개를 돌렸다.

……귀 끝이 붉어진 것 같은데, 영화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그런 거겠지?

부끄러움 타는 건 아닐 것이다.

으음, 사실 소설에서 다미안 마탑주는 무조건 주인공 폴리우스를 적대하는 나쁜 놈 정도로 나와서 어떤 성격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밀라 부인은 엮여서 좋을 게 없는 여자입니다. 폴리우스와 헤어지길 잘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밀라 부인이 아들 내세워서 참 별일을 다 했긴 하죠. 저는 그렇게 제 이름으로 외상을 많이 진 줄도 몰랐어요.”

앞으로 다미안 마탑주와 같이할 일이 많으니 친밀해져서 나쁠 건 없지. 나는 씨익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야, 이런 말을 어디에서 하겠어요. 마탑주님 앞이니까 시원하게 말하네요.”

아까 밀라 부인이랑 잉그다 영애를 노려보던 거 보면 정말 살벌한 사람인데, 나는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다니 희한한 일이다.

“밀라 부인이 영애를 대하는 태도는 지나쳤으니까요.”

“제가 다 들어준 문제도 있어요. 엄청 호구였죠.”

“……그런 뜻은 아니고. 영애가 폴리우스에게 과분한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입에 발린 말은 잘 못 할 것 같으면서, 이런 말은 잘하네.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짓는 마탑주에게 밝게 웃어 보였다.

“아하하, 무슨 말인지 알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왜 폴리우스와…… 아니, 아닙니다.”

마탑주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요. 왜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 폴리우스를 만났는지 궁금하시다는 거죠?”

뭐, 대답하지 못할 거 있나. 내 계획대로라면 어차피 다미안 마탑주와 나는 함께 가게 되어 있다.

나는 그의 의문을 친절하게 해소해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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