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19)화 (19/90)

<19화>

“아무래도 저에겐 고통을 줄여 주는 요정의 축복이 절실했으니까요.”

소설 속 멜라니였던 내가 폴리우스를 한 사람으로서 좋아한 게 맞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잘 모르겠다.

어떤 점이 좋은지 말해 보라고 하면 그냥 상냥하다, 착하다…… 정도밖에 대답 못 했으니까.

이복형인 다미안 마탑주도, 아버지인 벨데르트 백작도 가지지 못한 ‘요정의 축복’.

벨데르트 백작가에서도 드물게 타고나는 그 힘을 폴리우스가 가지고 있는 것. 나에겐 그게 중요했던 거다.

그리고 이야기하면서 다시금 깨닫는 건, 나는 폴리우스를 사랑한 게 아니라 그가 가진 고통을 줄여 주는 힘을 사랑했다는 거다.

“솔직히 의존이었어요. 약물 중독과 비슷하달까. 하지만 이제는 벗어나야죠.”

“그럼 축복을 받지 못하는 지금은 진통제를 굉장히 많이 드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뭐, 힘들겠지만 어쩌겠어요. 그래도 폴리우스랑 만나는 게 정신적으로는 더……”

그러나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미안 마탑주의 질문이 대답하기 힘든 내용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흐읍.”

“영애?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나는 힘들게 숨을 들이켰다. 순식간에 밀려오는 통증 때문에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편안하게 영화를 보고 있었고, 어떤 무리한 움직임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를 하면서 들고 있던 팝콘 봉투에 손을 뻗었을 뿐이다.

그런데 별안간 식은땀이 흐르며 몸이 이상 증상을 드러낸 거다.

‘이런…… 오늘 아침부터 일해서 피로가 쌓였다고는 하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견딜 만해서 생각도 못 했네. 전조도 없이 증상이 나타날 줄이야.’

갑자기 나타났지만 익숙한 통증이었다.

많은 양의 진통제를 먹어서 생기는 부작용, 근육의 경련쯤은 당연히 알고 있다.

“……괜찮아요, 잠깐 쥐가 나서요.”

하지만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익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다미안 마탑주에게 웃어 보였다.

“죄송한데, 우리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그러나 다미안 마탑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역시 이 시간까지 활동하신 것이 크게 무리셨나 봅니다. 이렇게 갑자기 경련을 겪으십니까?”

“…….”

“이건 영애의 병입니까, 아니면 진통제의 부작용입니까?”

“별거 아니에요. 오늘 움직일 일이 많아서 진통제를 많이 먹었을 뿐이에요.”

그냥 다른 사람들은 내가 아프면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하던데.

아아, 역시 아까 슬며시 진통제를 입에 털어 넣던 거. 다 봤구나.

“진통제의 부작용은 점점 심해질 겁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점점 진통제에 대한 내성이 쌓여 가겠지.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이 먹어야 할 거다.

‘만약, 아주 만약에 일이 틀어져서 성녀의 축복을 못 받는다고 해도……’

폴리우스에게 미친 듯 의존하다가, 그저 보호받아야 하는 아픈 영애로 사는 것보다.

어느 순간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지금의 내가 좋다.

소설을 읽었던 전생의 기억은 많이 흐릿해졌지만, 영화에 관한 경험만큼은 선명하다.

영화관에 밥 먹듯 다닌 것이나 OTT 서비스에 사족을 못 썼던 것까지.

그러니까, 만약 성녀가 나타난다는 걸 몰랐더라고 해도.

나는 지금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저는 폴리우스와 파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

다미안 마탑주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내 눈을 오랫동안 주시했다. 나는 아까처럼 피하지 않았다.

* * *

회의가 끝나고 일주일 뒤, 나는 다미안 마탑주와 함께 영상 제작 현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얼마 전 생각보다 영상석용 촬영이 늦어진다는 보고를 받은 게 마음에 걸려서 말이다.

‘속도는 물론이고 질도 떨어진다고 했던가.’

나는 저번에 다미안 마탑주와 함께 보았던 <프리세니아의 봄> 영상석을 떠올렸다.

물론 기존에 있던 연극이니만큼 내용은 훌륭했지만, 영상석으로 보니 군데군데 아쉬운 연출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영상석 콘텐츠 계약 성사 때는 제가 그 자리에 없어서, 오늘 처음 뵙게 되는군요.”

나와 다미안 마탑주가 현장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던 연출가가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반갑다는 말과는 다르게 긴장과 경계가 깔려 있었다.

아무래도 처음에 이야기한 것보다 영상석 제작이 느려지는 것도 있고, 계약금을 준 당사자인 내가 과한 간섭을 할까 봐 걱정되는 거겠지.

“저야말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침묵이 흐를 것 같았다.

상대가 방어적인 태도로 군다는 걸 모르는 척하며, 나는 바로 간단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온 건 다름이 아니라, 연출 장비를 쓰시면서 불편한 점이 없으신가 해서요.”

“아…… 괜찮게 잘 쓰고 있습니다. 마탑에서 기껏 귀한 장비를 빌려주셨는데……”

“잘 쓰고 계시다니 다행이네요.”

나는 일단 칭찬을 늘어놓으며 눈치를 보는 연출가에게 생긋 웃었다.

“그런데 다른 연출가분께서는 무대 조명 장치의 색상이 추가되었으면 또, 명도 조절이 세세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주셨거든요. 연출가님은 어떠세요?”

물론 다른 연출가 같은 건 없다. 내가 찾아온 건 이 사람이 처음이다.

하지만 연출가는 일단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징조다.

“아아. 물론 추가되면 연출할 때 더 편리하고 좋겠지요.”

“그리고 저희가 나눠 드리기 전에 시험해 보았을 때 장치 가동 후 몇 초 정도 뒤에 작동되는 시간 차가 있었는데, 그 부분은 괜찮으신가요?”

그렇게 나는 윗사람이 시찰하러 왔다기보다는, 진짜 불편한 점을 들으러 왔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결 편안해진 연출가는 이내 아까보다 풀린 얼굴로 나를 현장으로 이끌었다.

“그 부분은 말로 설명하기보다, 일단 한번 보여 드리는 게 낫겠군요.”

나는 자연스럽게 현장에 따라 들어가는 데에 성공했다.

“대단하시군요.”

나를 신기하다는 얼굴로 보고 있던 다미안 마탑주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다미안 마탑주님은 회의에서 정리를 잘하시잖아요.”

그가 마법사들을 잘 이끄는 것처럼 내게도 이런 재능이 있다.

처음부터 네 연출은 영상석에 어울리지 않고, 미흡하다고 말하면 내용이 어쨌건 반감을 살 가능성이 있다.

여기 있는 이들이 보기에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멜라니 클로틸드’는 상단을 운영하고 있어도 문화계 쪽에서 일한 경험이 전무한 공작 영애지 않나.

물론 환생하기 전 기억을 찾은 지금도 연극 연출을 하는 전문가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정도로 지식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전생에서 영화를 포함한 여러 문화 콘텐츠를 많이 접했다.

수준 높은 전문가들이 몇 번이고 고심한 완성본을 본 것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다미안 마탑주와 함께 왔으니, 필요한 연출 장비에 대한 대화도 실시간으로 나눌 수 있을 거고.

영상석 사업의 핵심은 영상석에 들어가는 영상이다.

나는 전생에서 본 것처럼 뛰어난 영상을 제작하고 싶다. 내 아이디어, 지식과 다미안의 마법 능력이 합쳐지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빌려주신 촬영 장비는 투명화가 되어서 굉장히 편리하고 좋습니다만…… 아무래도 연극 스태프들은 촬영 경험이 전무하니까요.”

게다가 마탑에서 마법 아티팩트로 만든 촬영 장비는 전생의 촬영 장비보다 절대적으로 좋은 점이 있다.

마이크와 카메라가 투명화 마법으로 보이지 않으니 촬영할 때 각도가 더 자연스럽다.

또, 연기할 때 배우가 더 몰입할 수도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촬영에 있어 연출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라서 말이다.

“그럼 촬영 장비의 각도를 다르게 하는 방향은 어떠세요? 다미안 마탑주님, 그거 가능한 거 맞지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미안 마탑주에게 말을 거는 척 은근슬쩍 연출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처음에는 연출가가 아닌 내가 하는 말에 거부감을 느꼈을 사람도, 제공한 마법 아티팩트에 의견을 반영하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니 쉽게 마음을 열었다.

“아무래도 연극과 영상석은 다르니까요. 이 장면에서는 감정 연기가 중요하니, 상반신 위주로 배우들의 얼굴이 크게 보이게 잡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호.”

“주인공이 쓰러졌을 때는 정면이 아니라 위에서 쓰러진 모습을 잡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촬영 장비도 띄울 수 있는데.”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연출가와 현장 제작진들은 금방 응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영상을 찍으면서 추가적인 연출이 들어가도 좋을 것 같은데……”

“방금 떠오른 아이디어인데요, 주인공 성격에 따라 촬영하는 카메라도 같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정신 사납지 않을까?”

“아니죠. 다른 부분도 아니고 이 부분은……”

아까까지만 해도 진도가 안 나간다며 막막해하던 사람들이 바로 의견을 내놓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기존에 시도해 보지 않은 연출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역시 기술의 발전이……”

그러나 촬영 장비를 두고 즐거워하던 연출가는 순간 말을 멈추고는 중얼거렸다.

“아아, 다양한 시도를 누구보다 하고 싶어 하던 분이 계셨는데. 정작 지금 이런 장비를 만져 보지도 못하고 있으시니.”

“그분이 누구신데요?”

“아, 벨데르트 극단에 계신 분인데요.”

벨데르트 극단은 내가 의도적으로 영상석 계약을 빼놓은 곳이었다.

‘거긴 내 전 약혼자의 가문이자 다미안 마탑주의 가문……’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신은 더 이상 벨데르트가 아니라며 뛰쳐나온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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