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자리를 옮겨 다미안 마탑주가 있는 대표실 앞에 서니 이미 대화 중인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미안 마탑주도 이 상황이 썩 반가운 눈치는 아니었다.
“이미 회의로 결정된 사항을 왜 자꾸 바꾸려 들지? 다른 사람이 바보라고 생각하는 건가?”
“대중화 노선으로 가면 마탑에서 판매하는 기존의 마법 아티팩트들에도 타격을 입겠죠. 마탑의 마법사들은 친근하다 못해 별거 아닌 싸구려 느낌이 될 겁니다. 매출에는 오히려 악영향일 거예요.”
와,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되풀이하고 있었다. 지겹지도 않나?
“다른 사람은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굴 거면 그만두지 그래?”
“마탑주님!”
“이따위로 구는 마법사가 마탑에 들어온 것도 신기하군.”
프린츠 마법사는 믿었던 다미안 마탑주까지 자신의 편을 들어 주지 않자 억울한 듯했다.
나야말로 어이가 없는데 말이다.
* * *
‘클로틸드’ 상단은 작고한 클로틸드 공작 부인이 만든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단 사람들이 모두 그 딸인 멜라니 클로틸드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상단에 충성심이 있느냐 없느냐와는 별개의 문제였는데.
직원 중 가장 오랜 세월 일한 안드레가 누구보다 멜라니를 고깝게 보는 것부터가 그랬다.
‘마탑과 협업이라니. 그 무능한 공작 영애가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벌여 온 거야?’
이제까지 폴리우스라는 남자에게 상단으로 번 돈을 가져다주는 것 말곤 상단주로서 딱히 하는 일도 없었다.
‘유능하다 소문난 공작 부인만큼은 바라지도 않아. 차라리 가만히나 있지.’
안드레는 작고한 클로틸드 공작 부인의 후원 덕에 상단에서까지 일하게 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 딸인 멜라니가 어머니의 명성을 더럽히는 것 같아 보였다.
‘상단을 더 키우지는 못할망정 말아먹을 것처럼 구는군.’
난데없이 영상석 사업, 뭐 그런 걸 한다고 하더니. 영상석 배송 업무까지 클로틸드 상단에서 하겠다고 했단다.
멜라니가 하는 사업이 잘된다면 협업을 하는 클로틸드 상단의 규모도 커지겠지만.
일을 하는 주체가 멜라니 아닌가.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공작 영애께서 무슨 헛바람이 든 건지. 언제부터 사업에 관심이 있으셨다고.’
상단은 어머니가 경영하던 것이라 자신이 물려받겠다는 생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듯하더니.
사업 감각이 없는 본인이 큰일을 벌이면 안 된다는 생각은 못 할까?
작고한 상단주가 잘 구축해 놓은 체계가 아니었으면. 또, 직원들이 그녀에게 아직까지도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으면.
애송이가 상단주가 되었을 때 벌써 열 번은 더 망했을 거다.
아무리 공작가의 후광이 있다 해도 말이다.
“그래도 열심히는 하는 것 같던데요?”
“그래 봤자지.”
“예전에는 솔직히 서류에 도장만 찍다시피 하셨잖아요. 그래도 지금은 일을 하긴 하시는 것 같은데?”
다른 직원은 올린 서류에 대해 정확한 피드백이 돌아온 게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하지만 안드레는 시큰둥했다.
“자네가 상단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래. 클로틸드 공녀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뭐…… 그런가요?”
그런 안드레가 멜라니를 조금 눈여겨보게 된 건 멜라니가 직접 직원을 뽑기 위한 면접을 보면서부터였다.
“본인이 꼼꼼한 성격이긴 하지만, 가끔 자신의 가치관에 지나치게 얽매인다고 하셨잖아요. 창의적인 사고가 필요한 업무를 잘하실 수 있을까요?”
수많은 지원자가 한 말을 다 기억해서 예리하게 지적하긴 했으니까.
“사람은 바뀔 수 있다고, 클로틸드 님이 좀 달라지시긴 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럴 리가. 남의 말에 딴지 거는 것만 잘하나 보지.”
안드레는 직원의 말에 코웃음 쳤다.
“영상석 사업도 말이야. 다미안 마탑주야 극단이 있는 가문 출신이라고 하지만 공녀님은 그런 것도 없잖아. 뭘 알겠어? 무리하다 쓰러지지나 말아야 할 텐데.”
“으으음, 하긴 그렇죠?”
그래도 기억력은 좋아서 면접자에게 그런 질문을 했나 보다 하면서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있었던 어느 날.
안드레는 다른 직원이 다 퇴근한 날에도 늦게까지 혼자 남아 서류를 처리하는 멜라니를 보았다.
‘쓸데없이 사업한다고 하더니, 역시 제 능력에 부쳐서 제시간에 못 끝냈나 보군.’
그런데 마탑과 일하면서 일손이 부족해 새로 뽑힌 직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 멜라니가 성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좀 나아진 것 같다고 생각할 무렵. 일이 터졌다.
프린츠 마법사라는 놈이 회의에서 멜라니를 대놓고 들이받더니만, 또 소란을 일으킨 것이다.
“사람들이 문화에 얼마나 관심이 많을까요? 귀족들도 의문인데 하물며 평민은 말할 것도 없지요!”
프린츠 마법사라는 놈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마탑주의 방문이 열려 있는데,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감히 대표 깎아내리는 말을 다른 사람들까지 다 들리게 해?’
멜라니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까면 같이 일한 직원들이 까지, 네가 뭔데?
멜라니와 회의에서 말해 본 게 처음인 주제에!
“검은 달 가입자 수가 50만 명 이상 나오면 제가 마탑을 그만두겠습니다!”
그러나 프린츠 마법사는 적정선을 모르고 가입자 수 운운하며 큰소리를 쳤다.
‘저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나서려던 순간, 당사자가 나타났다.
“잠시 비켜 주시죠.”
여리고 무능한 공작 영애…… 라고만 생각했던 안드레는 솔직히 그 순간 조금 놀랐다.
일개 직원이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상황에서 멜라니는 의연하고 침착했다.
그녀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그러고는 씨익 웃었다.
“아, 그래요? 대단한 자신감이네.”
“아니, 언제 거기에……”
멜라니의 손에는 이 상황이 찍히고 있는 녹화 장비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여유롭게 손을 흔들었다.
“프린츠 마법사. 방금 한 말 책임질 수 있어요?”
“저, 저야말로 대표님께 책임을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대중화 노선으로 갔다가 망하면 대표님이야말로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지금……”
다미안 마탑주는 자신의 부하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는지 나서려 했지만, 놀랍게도 멜라니가 가로막았다.
안드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클로틸드 대표가 해결하는 게 보기 좋지. 그게 쉽게 넘어갈 수는 있어도, 자칫하면 다미안 마탑주의 보호만 받는 이미지가 되잖아.’
“프린츠 마법사. 그럼 내기라도 할까요?”
“클로틸드 대표님은 뭘 거실 겁니까? 저만 거는 건 손해지 않습니까.”
마법사는 더더욱 건방진 발언을 지껄였다.
하지만 멜라니는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그럼 나는…… 공동 대표 자리를 프린츠 마법사, 당신에게 넘기겠어요.”
여유롭게 팔짱까지 껴가며 말이다.
“하지만 마탑을 그만두는 건 졌으니까 꼬리 내리고 도망가는 개랑 비슷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뭐, 원하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하라는 대로 해요. 그게 뭐가 됐든지.”
“하, 좋습니다. 굉장한 자신감이시군요.”
그렇게 내기가 성립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은 성실하게 지냈다지만, 그 이후로 멜라니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안드레는 지나가는 길에 목격해 버렸다. 다미안 마탑주의 식사 요청도 단칼에 거절하는 것을.
“죄송하지만 바깥에 나가서 먹을 시간이 없어요.”
“……마탑의 식당이 딱히 건강식은 아닐 것 같은데요.”
“뭐, 다들 먹는 거잖아요.”
그러나 안드레는 멜라니가 마탑의 식당에서도 밥을 먹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간이 없으면 가까운 곳에서 먹는 게 편할 텐데도.
들리는 말로는 멜라니가 그래도 대표인데, 공동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다른 직원들이 불편해할 거라는 이유인 듯했다.
그래서 몸도 안 좋은데 식당에서 적당히 오늘의 음식으로 만든 샌드위치 정도만 받아 오고 말았다고……
‘아니, 몸도 안 좋은 사람이면서 왜 그러는 거야?’
안드레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이 바뀌었다.
“샌드위치가 왜 이렇게 커졌답니까?”
“식당 예산이 늘어서, 샌드위치에 넣을 재료들이 풍성해졌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다미안 마탑주가 식당 예산을 늘린 거였다.
그래, 프린츠 마법사 놈이 시비를 걸어서 열심히 일하는데 밥이라도 잘 먹어야지.
실로 안심되는 일이었다.
이쯤 되니 안드레는 자신이 멜라니를 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크흠,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우리도 열심히 하긴 해야겠지.”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멜라니를 보며 응원의 말을 건넸다.
“내기하셨다는 거 들었어요. 저도 진짜 열심히 할게요, 대표님!”
“저도 그 마법사 우월주의 놈에게 한 방 먹여 주고 싶습니다!”
멜라니뿐만이 아니라 대중화 노선에 찬성하던 기획 쪽 직원들까지도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