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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61)화 (61/90)

<61화>

사실 벨데르트 백작가는 선대 백작이 된 이후로 예전 명문가의 위상을 잃은 지 오래였다.

모두가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인정하던 첫째가 우연한 사고로 죽고, 갑작스레 백작이 된 것이 지금의 벨데르트 백작이었다.

“역시 재능있는 첫째와 재능 없는 둘째를 자신에게 대입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다미안 마탑주가 처음부터 지원을 제대로 받았으면 더 큰 일을 해냈을 겁니다. 쯧쯧, 제가 아버지였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요.”

벨데르트 백작 역시 자신을 두고 무슨 말이 오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부와 혼외 자식을 백작저에 들이다니, 당신에게는 더 실망할 것도 없어요.”

“저를 당신의 아들이라 생각지 마십시오.”

하지만 정말, 형처럼 꼿꼿하기 그지없는 여자와 그 여자를 닮은 첫째.

“누가 뭐래도 저한테는 당신이 제일 멋진걸요!”

“아버지. 진짜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거예요? 신난다!”

자신을 하늘처럼 떠받들어 주는 정부와 사랑스러운 둘째.

혼외 자식 역시 똑같이 자신의 아들이 아닌가.

자신은 그저 책임을 지려는 거였고, 폴리우스를 싸고돈 것은 어린 시절 백작저 밖에서 자라 다미안처럼 교육받지 못한 아이에게 미안해서였다.

그리고 애초에 성품조차 달랐다. 누구든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거였다.

주변은 아들이 집을 나가서 걱정되지 않느냐며 염려했지만, 오히려 벨데르트 백작은 태평했다.

항상 화나게 만들던 부인도 죽고 다미안도 없겠다, 오히려 밀라 부인과 폴리우스를 대동하고 공개적으로 다닐 수 있으니 이득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두가 다미안을 잊어 갈 무렵.

어머니를 잃은 소년은 마탑주가 되어 나타났다.

“다, 다미안 벨데르트 영식이 마탑주라고요?”

“제 이름 뒤에 성을 붙이지 말아 주십시오. 버린 지 오래니까요.”

신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실력만을 신봉하는 마탑의 우두머리가 되다니.

죽은 제 부인이 마법사이긴 했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마탑주가 되었으니 여러모로 쓸모가 있겠다 싶었지만, 자존심 굽혀 가며 구슬리는 것도 귀찮았다.

집을 뛰쳐나간 놈에게 뭐가 이쁘다고 먼저 돌아오라고 어른단 말인가.

‘제 어미가 죽고 나서 괜히 내 탓을 한단 말이야.’

생각해 보면 사교계에서 요란스럽게 행동하며 시끄러운 것보다는, 동떨어진 마탑에 가 있는 게 나은가 싶기도 했다.

항상 자신을 원망하는 눈빛을 하는 다미안과는 다르게, 아버지라며 엉겨 붙는 폴리우스에게 후계를 물려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하지만 폴리우스는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던 클로틸드 공녀를 놓치기까지 했고, 무단으로 가문의 건물을 팔아 치운 주제에 황실을 모독한 잉그다 후작가와 깊게 얽히기까지 했다.

‘폴리우스가 사업을 하니까 형제끼리 같이 도우라고까지 했는데, 일절 답장도 없고.’

처음의 결심과는 달리 슬쩍 손을 내밀었는데, 그 정도면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고 와야 할 것 아닌가.

역시 제 어미를 닮아 전혀 귀엽지 않은 놈이었다.

그래도 이런 사정은 잘 모르는 주변에서는 아드님이 대단하다는 말을 건네곤 했다.

“여태 마탑주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큰 성과를 낸 분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누구의 아들인데요.”

아들이면 뭐 하나. 연락은커녕 얼굴도 가물가물한 지경인데.

“아드님이 잘되셔서 하는 말인데, 저는 사실 백작님과 사이가 안 좋아서 집을 뛰쳐나간 줄 알았습니다. 허허허.”

“투정을 부리기에 받아 주지 않고 마탑에 가서 열심히 해라. 그렇게 가르쳤을 뿐인데. 물려받은 재능이 있는 건지 곧 잘하더군요. 하하.”

그는 그래서 자신이 아들을 강하게 키운 척 굴었다. 가출이 아니라 혹독하게 훈련을 시킨 것처럼 엉큼하게 말을 흘렸다는 뜻이다.

“다미안 마탑주님께 부탁 하나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아버님이신 백작님께서 말을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들어 보니 굉장히 사이가 좋은 것 같으신데.”

“그, 그건 어렵겠군요. 아버지가 되어서 부담을 줄까 싶어서 말입니다. 허허.”

하지만 회피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꾸 피해 대니 역시 진짜 집을 나가서 연을 끊은 것이 아니냐고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들은 연을 끊었는데 아버지인 백작만 모르나 봅니다.”

“벨데르트 백작은 아니라고 하지만 가출한 게 맞다니까요? 항상 자신을 벨데르트라고 부르지 말라 선을 긋지 않습니까.”

검은 달이 잘되면 잘될수록, 사람들은 다미안을 칭찬하면서 자신을 이죽거리는 얼굴로 봤다.

“아드님이 참 잘되셨는데……”

너는 그 아들 내쫓았지.

“돌아가신 백작 부인께서 마법사셨다고 들었는데.”

널 닮아서 잘된 건 아니구나.

점점 사람들이 하는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은 항상 벨데르트 백작을 비웃고 있었다.

‘젠장, 잘난 아들을 못 알아보고 내쫓은 멍청한 아버지 같은 꼴이 되었잖아!’

검은 달이 잘되면 잘될수록 벨데르트 백작에 관한 이야기도 꼭 나왔다.

타인의 성공이 재수 없다고 느끼면서도, 정작 면전에 가서 시비를 걸지는 못하니 꼭 자신에게 푸는 양.

“품에 낀 아들은 바람이나 피우고 과분한 약혼녀에게 차이지를 않나. 어쩌면 마탑주가 잘된 것도……”

그리고 그건 폴리우스가 사업을 말아먹고, 다미안이 승승장구할수록 심해졌다.

진짜 보석을 두고 가짜 보석을 들고 자랑한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폴리우스 건 다미안이 건 어쨌든 내 아들이 잘된 건데, 왜 내가 우스워지는 거느냔 말이다!’

어떻게든 다미안과 사이가 좋은 모습을 사람들 앞에서 한 번은 보여야 한다.

사람이 많고, 클로틸드 공녀 앞이라면 자신에게 냉정하게 굴기는 어렵겠지.

그런 계산으로 기껏 미혼 귀족이나 가는 연회까지 갔건만…… 자신이 없는 사이에 약혼 같은 커다란 일을 상의도 없이 터뜨렸다!

‘건방지기 짝이 없어. 투정 정도로 봐줄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나쳤다.’

그렇지 않아도 다미안이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는데, 폴리우스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쥐고 있는 패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깨달았다.

“다미안더러 백작가로 오라고 일러라. 그렇지 않으면…… 가문에 온 클로틸드 공작가의 청혼서의 상대를, 폴리우스로 바꾸겠다고 해.”

“알겠습니다, 아버지!”

폴리우스는 그저 신난 모양이지만, 벨데르트 백작은 이번 일로 다미안을 길들일 생각에 깊은 조소가 나왔다.

‘이 기회에 다미안은 벨데르트 집안사람이라는 걸 각인시켜야겠어. 그래야 폴리우스가 이번에 망한 것도 다미안을 내세워 묻을 수 있을 거야.’

결국 이러나저러나 자신의 아들, 자신이 잘난 것이라고 보여야 한다.

‘아버지가 갑자기 너무 순순해진 것이 이상해.’

그러나 벨데르트 백작의 그 묘한 표정을 본 폴리우스는 불안해졌다.

다미안이 집을 나가고,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 아버지의 눈치를 본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벨데르트 백작의 앞에선 신나게 돌아서긴 했지만……

‘혹시 다미안을 이번 기회로 집에 오게 하려는 거 아니야?’

저번 연회에서 다미안을 보겠다고 미혼 귀족이나 참석하는 연회에 갔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억측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이대로 아버지만 믿고 바보같이 기다리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폴리우스는 아예 선수를 치기로 했다.

갑자기 약혼 상대를 다미안에서 폴리우스로 바꾸겠다고 하면 멜라니의 귀에 안 들어갈 리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약혼 상대를 바꾸는 건 아버지의 독단적인 행동처럼 보이게 하고 자신은 슬쩍 선택지를 주는 척 선량하게 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러니 나를 선택해, 멜라니.”

“…….”

“아버지는 약혼 상대를 나로 바꾸겠다며 클로틸드 공작가에도 귀찮은 말들을 할 거야. 사돈을 맺는 빌미로 많은 재물을 뜯어낼지도 모르고.”

폴리우스는 오랜만에 순한 얼굴로 멜라니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우리 아버지지만…… 네가 욕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네. 하지만 우리가 먼저 약혼한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든 사랑으로 포장해 볼 수 있어. 아버지에게서 너를 지켜 줄게.”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 나직하게 말했다.

자신이 작정하고 내는 저음은 여자들에게 꽤 인기가 좋았다.

‘자, 이제 멜라니의 반응을 볼 차례인가.’

그러나 고개를 든 폴리우스는 흠칫 놀랐다.

“……?”

이야기를 다 듣고도, 멜라니는 팔짱을 낀 채로 냉담한 표정 그대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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