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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62)화 (62/90)

<62화>

‘어?’

폴리우스는 빠르게 두 눈을 깜빡이며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방문 요청을 해도 항상 거절당했었는데, 오늘은 우연히 공작저로 돌아가는 멜라니와 마주칠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모든 것이 잘될 것 같다는 희망을 품었었다.

그런데 이토록 표정 변화 없는 얼굴과 마주하게 될 줄이야.

‘내가 상황을 알리러 와 줬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멜라니…… 내 말 다 들었어? 아버지가 네가 다미안과 약혼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거라니까?”

“내 귀 안 막혔어요.”

멜라니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태도였다.

‘짧게 대답하지 말고, 지금 무슨 생각인지 말하라고. 아니면 최소한 웃기라도 하든가.’

폴리우스는 순간 솟구치는 분노를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아직 숨을 고를 때다.

조금만 기다리면 예전의 관계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 태도를 지적하고 사과를 받아도 늦지 않다.

“멜라니, 그동안 내가 너한테 서툴게 대한 건 미안해.”

“막 대했다는 걸 아름답게도 포장하네요.”

흡, 폴리우스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나도 많이 후회했고, 많이 슬펐어.”

“…….”

멜라니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삐딱하게 낀 팔짱에서 그녀의 대답을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멜라니. 우리 예전에는 정말 좋았잖아.”

“…….”

“정말 나 없이 괜찮아? 나는 아니야. 너 없는 인생은 지옥이더라. 사실 몇 번이고 너에게 달려가고 싶었어.”

그러나 멜라니가 낀 팔짱은 풀리지 않았다. 자신이 애써 건네는 말에도 전혀 감동받지 않는 것 같았다.

계속 묵묵부답인 상대를 보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멜라니,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험한 욕 듣는 거 좋아해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폴리우스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멜라니가 자신에게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생각했다.

‘설마 입을 열면 나한테 욕할 것 같다는 뜻인가?’

뒤늦게 멜라니의 말을 이해한 폴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턱을 떡하니 벌렸다. 다소 추한 몰골이라는 걸 알았지만 몸이 주체가 안 됐다.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하려는 말이 그것뿐이라면 난 이제 일어나겠어요.”

멜라니의 냉담한 눈동자에 잔뜩 당황한 남자가 비친다.

폴리우스는 멜라니의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하는 꼴사나운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럴 수 없었다.

“복수한다더니, 겨우 하는 게 이건가?”

시린 듯한 조소가 폐부를 찌르듯이 아파 왔다.

“……멜라니.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폴리우스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 와 무슨 말을 해 봤자 추해지기만 할 것 같았다.

‘내가 알던 멜라니는 이제 없는 건가? 정말로?’

그래, 사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그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애달파하며 기다리던 멜라니 클로틸드는 이제 없다고.

그냥 자신이 눈앞의 소녀는 폴리우스 벨데르트가 아니면 안 된다고 믿고 싶었던 것뿐이다.

‘멜라니는 항상 나만 바라볼 줄 알았는데.’

폴리우스의 말과 행동에 설레어하던 소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귀찮다는 듯 대화가 빨리 끝나길 바라는 한 귀족 영애만 있을 뿐이다.

‘멜라니가 변했어.’

하지만 곧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그렇지만 다시 나를 좋아하게 만들면 되잖아?’

다른 누구도 아닌, 멜라니의 마음을 빼앗는 건 쉬운 일이다. 폴리우스가 그동안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아서 그렇지.

그동안 그는 요정의 축복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목소리가 좀 날카롭네. 오늘 좀 예민해 보여. 그, 그래.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이리 와 봐.”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폴리우스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던 축복의 힘을 끌어당겨, 멜라니에게로 흘려보냈다.

우웅-

폴리우스의 손에서 흰빛이 반짝이며 일렁이는가 싶더니, 멜라니에게로 향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동요가 없던 멜라니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며, 폴리우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진통제 부작용이 얼마나 심한데, 여태까지 얼마나 예민하고 힘들었겠어.’

그렇게 생각하면 멜라니가 폴리우스에게 앙칼지게 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청혼서를 통해 강제로 널 가지고 싶지 않아. 우리 옛날에는 좋았잖아.”

폴리우스는 다른 사람에게는 까칠하고 날을 세워도, 자신을 보면 표정이 풀어지던 멜라니를 기억했다.

“당신은 잉그다 후작 영애와 약혼했고……”

“그건 네가 다미안과 약혼한다는 말에 감정적으로 뱉은 말에 불과해. 정식으로는 어떤 청혼서도 오가지 않았는걸.”

정확히 말하면 청혼서가 오가기도 전에 잉그다 후작가에 그 사달이 났지만 말이다.

“그러니 너도 그동안 다미안과 만났던 걸 용서해 줄게. 어차피 나만큼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을 것 같고……”

요정의 축복을 쓰고 나니 한결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끝없는 고통 속에서, 축복의 힘을 받으면 편안한 표정을 짓던 멜라니가 떠올라서였다.

지금도 분명, 그렇게 미소 지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라?’

그러나 멜라니의 표정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냉담하기만 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그걸로 끝?”

게다가 심드렁해 보이기까지 했다.

폴리우스는 자신이 요정의 축복을 쓰면 그 어느 때보다 안온한 표정을 짓던 멜라니를 떠올리다, 눈을 다급히 깜빡였다.

“뭐야, 축복의 힘이 부족했나? 예전처럼 손이라도 잡고……”

그러나 멜라니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손을 잡으려는 시도는 호위 기사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거 놔! 내가 누구인지 알고……”

“누구긴 누구야, 나랑 아무 사이 아닌 남이지.”

“왜 내가 너랑 남이야! 내가 요정의 축복을 왜 가지고 태어났는지 알아? 너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야. 우리는 운명이라고!”

폴리우스는 호위 기사에게 붙들려 아등바등하면서도 멜라니에게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멜라니, 다미안이 진짜 너를 사랑할 것 같아? 그놈은 너를 이용만 할 거고……”

“이용하는 건 당신이었고.”

멜라니는 심드렁하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어째서? 폴리우스는 멜라니가 자신을 향해 이런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멜라니, 요정의 축복이 제대로 너한테 닿지 않은 거야. 그렇다면 내가 다시!”

“아, 이제는 그 요정의 축복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뭐?”

“다미안 마탑주님이 쉽게 해결해 줬거든. 그분이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쉽게.”

그랬다. 요정의 축복은 폴리우스가 있지 않은 이상 멜라니에게 고통을 덜어 주지 못했다.

폴리우스는 이따금 나와 만나기로 한 약속에 늦었고, 멜라니는 고통을 호소했다.

숨이 넘어갈 듯 가빠도 곧 있으면 폴리우스가 올 거라는 생각에 진통제를 먹지도 못하고 버티고 있노라면……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먼저 진통제를 먹으면, 그 이후에 와서 폴리우스는.

“정말 미안해! 조세핀이 아프다면서 갑자기 우는데 달래 주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

멜라니가 고통으로 우는 건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오늘은 오는 길에 웬 할머니가……”

“아이가 넘어졌는데 집까지 데려다주느라……”

폴리우스는 착했다. 주인공답게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풀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지 않을까.’

모두에게 축복의 힘을 나누어 주느라 정작 제 약혼녀가 고통에 떠는 걸 모른 체 하는 건.

특히 젊은 여자들만 왜 그렇게도 아픈 곳이 많은 건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

다미안이 준 마법 아티팩트 덕에, 멜라니는 더 이상 부작용이 있는 진통제를 삼키지 않아도 됐다.

그의 마음이 변하면 혹시라도 축복을 받지 못할까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

‘새삼스럽지만 다미안 마탑주님은 정말로 담백하셨구나. 폴리우스는 대체 얼마나 생색을 냈던 거야.’

폴리우스는 항상 자신을 멜라니의 구원자인 것처럼 이야기했었는데.

“뭐……? 다미안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믿을 수 없다는 듯, 폴리우스가 소리쳤다.

멜라니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병을 고치는 것도 아니고, 고통만 덜어 주는 건데. 꼭 그 방법이 요정의 축복일 필요는 없지 않나요?”

“말도 안 돼. 나는…… 너는…… 우리는 함께여야 하는데……”

패닉에 빠진 폴리우스에게 더 캐낼 것은 없어 보였다.

멜라니는 자리에서 즉시 일어났지만 폴리우스는 그녀를 잡지 못했다.

요정의 축복 없이, 그녀에게 사랑받을 자신이 없었다.

그가 여태까지 공작 영애인 멜라니 앞에서 당당하게 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고통을 잊게 해 주는 축복의 힘 덕분이었는데.

‘요정의 축복이 더는 필요 없다고 하면, 더 이상은……’

자리에서 일어난 멜라니는 일어날 생각도 없어 보이는 폴리우스를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역시 이 남자는 축복의 힘으로 자신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것을 늦게서야 알아차린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정신 차리면 치워.”

“네, 아가씨.”

차갑게 돌아선 멜라니는 공작저의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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