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똥파리도 아니고.’
날도 점점 더워지는데 귀찮은 놈이 와서 짜증 나게 구는군.
그렇지만 지금은 같잖은 폴리우스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성큼성큼 공작저의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벨데르트 백작에게 편지를 받은 다미안 마탑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편지에 쓰여 있는 것처럼, 저와 폴리우스의 약혼을 구실로 삼는 건 맞는 것 같아요.”
처음엔 편지를 보고 도대체 벨데르트 백작이 무슨 생각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로 폴리우스를 만나 본 결과, 벨데르트 가문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다미안 마탑주에게 하는 말이다.
내 약혼 상대가 폴리우스가 되는 꼴을 보기 싫으면 집안으로 기어들어 와 고분고분하게 굴라는 거다.
“이미 폴리우스와 헤어진다고 수없이 말한 데다가, 본인 역시 다른 여자와 약혼하겠다 말했는데……”
“…….”
“기존처럼 폴리우스와 약혼을 유지하는 쪽으로 갈 거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다미안 마탑주는 일견 겉모습은 침착했지만, 나는 그가 절대로 평소 같지 않다는 걸 알았다.
짓씹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흥분이 잔뜩 묻어 있었다.
“편지는 짐짓 저를 생각해 주는 척하지만, 결국 클로틸드 대표님을 담보로 저에게 협박하고 있는 겁니다.”
돌아가신 백작 부인도 형편없이 대접하고, 다미안이 집을 박차고 나올 때도 아랑곳하지 않더니.
폴리우스가 몰락하고, 마탑주인 자신이 잘나가니 태도가 한순간에 바뀐 것이라고.
“클로틸드 대표님이 폴리우스와 다시 만나는 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나는 다미안 마탑주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다.
“그리고 마탑주님 역시 벨데르트 백작가에 숙이고 들어가는 건 안 되고요.”
내 말에 다미안 마탑주가 흠칫했다.
그래, 그가 극도로 흥분하기 전에 내가 저지할 필요성이 있었다.
“우리가 분명 저쪽에 휘둘리지 않고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제국법으로 정해진 청혼서의 주체가 가문과 가문이라는 겁니다.”
그랬다. 혼담은 가문끼리 말이 다 오간 다음에 형식적인 서류를 건네는 것이니까.
별일이 없으면 무난하게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실 가문 내에서 약혼 상대가 바뀌는 거나 하는 잡음은 빈번하게 생겨났다.
하지만 이 법이 바뀌지 않았던 건 청혼서를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가주들이 가문 구성원들에게 제 영향력이 약해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인데.
“청혼서를 가문에 보내는 게 아닌, 상대방에게 보낼 수 있게 법을 바꾸어 달라고 할 수는 없을까요?”
“황실 역시 쉽게 움직여 주지는 않을 겁니다.”
“네, 당사자들의 의견을 중요시해 달라는 말로는 안 되겠지요.”
굳이 황실에서 가주들의 심기를 건드려 가며 귀찮은 일을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황실과 귀족을 움직일 이점이 우리 쪽에 있어야 하는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마침 하리미네스 주간이 코앞이긴 한데……”
이번 달에 황후와 만나는 일정이 잡혀 있긴 했다.
하리미네스 주간은 초대 황후가 각 가문을 순방하던 게 전통이 되어서 여태 이어지고 있는 기념행사인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현 황후인 미리엘 황후가 2주쯤 뒤에 클로틸드 공작가에 방문한다는 거다.
‘제국이 건설될 때는 백성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취지로 도입되었지만, 지금은 귀족들끼리 본인이 더 잘났다 싸우는 시간이 되어 버렸지.’
누가, 어떻게, 무엇으로 황실을 만족시킬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암묵적으로 있던 가문의 서열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평가하는 시간이라…… 난 사실 평소에는 좋아하지 않았다.
“최근 하리미네스 주간에 클로틸드 가문이 두각을 드러낸 적은 없거든요.”
보통 하리미네스 주간은 안주인이 전담하는데 어머니는 너무 일찍 돌아가셨고.
난 의전에는 소질이 없는 데다 어리고 병약해서 별 활약을 하지 못했다.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벨데르트 가문은 제 일이니 어떻게든……”
그걸 아는 다미안 마탑주가 나를 배려하듯이 말했지만.
이번 하리미네스 주간에서 황후의 눈에 들어 슬쩍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 거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 법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가 하리미네스 주간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는 둘째 치고…… 이 시기에 미리엘 황후 폐하께 까다로운 부탁을 하는 게 효과적일지 모르겠어요.”
법을 바꾸는 건 몸이 안 좋은 초보 황후가 들어주기에 꽤 큰일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리미네스의 취지가 귀족들의 민원을 들어주는 것 아닙니까?”
“네, 그렇긴 한데요. 미리엘 황후 폐하께서는 하리미네스 주간을 처음으로 주관하시잖아요.”
그래서 더더욱 힘들 텐데……
원래 봄에 하는 하리미네스가, 이번에 잉그다 후작가가 황실을 건드리면서 큰일이 나자 여름으로 미뤄지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미리엘 황후 폐하께서는 여름이 버거우실 텐데, 손이 많이 가는 부탁은 들어줄 확률이 더 낮아지지 않나 싶어서요.”
아무리 하리미네스 주간에 민원을 들어준다고 하지만.
사람이 기분이 좋아야 뭘 들어주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야.
첫 하리미네스 주간이기도 하고, 단순히 보여 주기식으로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 않나?
“황후 폐하께서요? 아, 북부의 에스트리아 왕국 출신이시긴 하시죠.”
그러나 곧 다미안은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프하이젠 제국의 여름은 그렇게 더운 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죠.”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한국과 비교하면 그냥 선선한 봄 정도의 날씨다.
한국의 무더운 더위를 겪어 본 적 없는 프하이젠 제국민들도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봄이랑 별로 다를 게 없다고 느끼거든.
그냥 화창하기만 한 날씨라서…… 나도 소설에서 읽지 않았다면 신경 쓰지 못했을 거다.
“사람들은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지만, 황후 폐하께서는 여름에 외부 행사를 다른 계절에 비해 적게 하시더라고요.”
“예리하십니다.”
자존심이 센 황후는 여름이 힘들어도 싫은 소리를 하거나 일정을 더 미루진 않을 거다.
‘내가 본 소설에 따르면 올해 늦여름에는 결국 더위에 쓰러져서 폴리우스와 엮이는 일이 생기지.’
아름답고 지체 높은 여자에게만 도움을 주는 주인공답게 말이다.
이번 여름이 특히 더워서 황후는 몹시 힘들 거거든.
하지만 축복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잖아?
“하리미네스 주간에 미리엘 황후를 만나는 건 정해진 일인데, 굳이 이 기회를 놓치는 것도 아까운데 말이죠.”
“그렇지만 의전으로 환심을 사는 건 확실한 일이 아니니까요. 하리미네스 주간에 다른 귀족들의 어려운 점들을 들어준다고는 해도, 그게 황후 폐하께서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처럼 무조건 들어준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으으음.”
“차라리 황제 폐하 쪽을 공략하는 게 나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아까 말했듯 제가 만나서 벨데르트 백작을 설득하거나요.”
“하지만 황제 폐하를 뵙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역시 원래 만나야 하는 일정에서 황후를 만나 슬그머니 부탁하는 게 더 보기 좋을 것 같은데.
게다가 하리미네스 주간은 내가 어차피 해야 하는 거고. 이왕 하는 일에서 소득을 거두면 좋잖아?
여름만 아니라면 황후 폐하의 기분이 나쁘시지 않을 텐데.
“날씨가 추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 어라?”
날씨를 춥게 만든다? 나는 내가 뱉어 놓은 말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그래. 미리엘 황후가 더위에 약하다는 걸 알면 그걸 이용할 줄 알아야지.
그냥 부탁을 들어주기 힘들겠다는 생각만 하면 어떻게 해?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요.”
“예?”
“어차피 황후 폐하께 그냥 부탁해 봤자 제대로 안 먹힐 게 뻔하잖아요. 그런데, 황후 폐하께 빚을 지울 방법이 떠올랐다고요.”
아까만 해도 미리엘 황후가 운신하기 어려운 여름이라는 게 걸렸다.
본인을 챙기기도 힘들 텐데, 남의 말이 제대로 들리겠나 싶어서.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게 우리에게는 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리엘 황후 폐하께 부탁드리기 난감한 이유가, 더위에 약하셔서 예민할까 봐 그렇잖아요. 그럼 그걸 공략하면 되죠.”
내 자신감 있는 태도에 다미안 마탑주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찌 보면 무모하다고 할 수 있는 내 말에 다미안 마탑주는 항상 신뢰를 보내 주었다.
“생각하시는 게 있는 거군요?”
“사실 마법 아티팩트의 확장성은 무궁무진한데, 여태 저희가 너무 영상 쪽으로만 집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나는 유쾌한 기분으로 씨익 웃었다.
“마탑주님, 제 이야기 좀 들어 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