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 *
그리고 이번 하리미네스 주간에서 미리엘 황후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영애는 멜라니 한 명만이 아니었다.
기존에 사교계의 꽃이었던 조세핀이 사라진 만큼, 하리미네스 주간에서 황후에게 인정받는 것은 사교계에서 가장 입지를 다지는 좋은 방법.
바이하 백작가의 나탈리 역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후후, 내가 하리미네스 주간에서 제일 인정받는 사람이 될 거라고.’
바이하 백작가의 영지는 제국 남부에 위치한 덕분에 다른 지방에는 나지 않는 아름다운 꽃들이 많았다.
가문 대대로 꽃에도 일가견이 있기도 해서, 꽃차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친하게 지내던 조세핀 잉그다가 자멸한 것은 당황스러웠지만, 동시에 엄청난 행운이기도 했다.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황후의 방문이 여름으로 미뤄졌다는 것.
그것은 기존에 하리미네스 주간에는 보여 줄 수 없는 남부의 꽃들을 선보일 기회였으니까!
‘후후, 제국 사람도 놀라워하는 게 우리 영지의 꽃들이야. 북부 에스트리아에서만 지내던 황후가 우리 가문의 정원을 보면 얼마나 놀랄까?’
프하이젠 제국에서 보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하고 규모가 큰 화원.
나탈리는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들며 황후를 맞이했다.
“미리엘 황후 폐하, 저희 가문의 정원은 어떠신가요?”
물론 괜한 질문이긴 했다. 보나 마나 눈을 휘둥그레 뜰 것이다.
북부에서는 보지 못할, 화사하고 화려한 풍경이니까.
‘좋아. 꽃에 관심을 보이면 자연스럽게 가문의 특산품인 꽃차까지 선보이는 거야!’
기존에도 제법 입소문이 난 꽃차였지만, 황후가 만약 맛있게 마신다면 큰 홍보가 될 것이다.
북부에서 온 황후를 사로잡은 꽃차라고 하면, 꽃차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궁금해서 한 번은 마셔 볼 테니까.
‘황후 폐하가 칭찬을 하면 자연스럽게 꽃이 모양도 아름답지만 향도 좋다고 말을……’
그러나 다음 말을 준비하던 나탈리는 이내 이상함을 감지했다.
‘말을…… 해야 하는데? 왜 꽃차를 안 드시지?’
나탈리의 문제는, 미리엘 황후가 더위에 약하다는 것을 몰랐다는 거였다.
사실 나탈리 말고도 귀족들의 대부분이 실외의 정원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세공 및 장식품으로 유명한 에스트리아 왕국에서 온 황후의 심미안을 맞추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를 쌓지 못한 귀족들도 실내를 선보일 생각조차 못 하고 그나마 있는 정원을 열심히 가꿨다.
물론 적절한 공략 포인트라고 할 수 있었다.
미리엘 황후가 더위에 굉장히 약해서,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다시피 한 것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어…… 음? 황후 폐하, 날씨가 좋아서 티타임은 실외에서 하는 걸로 준비해 봤어요. 이 차는 어떠세요?”
“향이 좋군요. 모양도 참 예뻐요.”
“그, 그렇지요? 화창한 오늘 같은 날씨에는 꽃차가 제격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말과 행동이 달랐다.
칭찬을 내뱉어 놓고 미리엘 황후는 뜨겁게 마셔야 할 차에 손도 대지 않았다.
‘아니, 저 차는 향과 함께 뜨거울 때 마셔야 하는데!’
나탈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미리엘 황후는 백작저에 들어선 순간부터 심기가 언짢았다.
겉으로는 기품 있고 우아한 모습이었으나, 속으로 미리엘 황후는 신랄하게 나탈리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깎아내렸다.
‘제국 사람들은 여름이나 봄이나 별 차이 없다고 느끼는 건가. 이런 날씨에도 꽃이 만개해서 예쁘다고 하는군.’
제국의 여름은 대륙 북부에서 온 사람의 기준에서는 엄청나게 더웠다.
그러나 미리엘 황후는 꿋꿋이 품격을 지키려 애썼고,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그녀가 힘들어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리엘 황후는 땀을 덜 흘리는 체질이었다.
흘깃 보면 더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덥지 않았다는 건 아니었다.
땀은 배출이 되지 않을수록 내부의 열을 올리기 마련이니까.
‘에스트리아에서는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데……’
특히 에스트리아 왕국에서도 추운 지방 출신인 미리엘 황후였다.
그녀는 앞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맞장구를 쳤다.
다행히 그 행동이 전혀 무례하지는 않았다.
“그, 저희 가문의 꽃차……”
“영애, 방금 뭐라고 했나요?”
“아,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원을 보며 한껏 탄성을 지를 거라 기대한 나탈리의 눈에는 미치지 못할 뿐이었다.
나탈리는 꽃차가 완전히 다 식은 후에야 몇 모금 홀짝이는 나탈리 황후를 보며 이를 갈았다.
‘재수 없는 외국 여자!’
향이 다 날아가 버렸는데 꽃차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향이 덜하더라도 맛이 있는 차를 내놓을 것을 그랬다.
아쉬움에 몇 마디 꺼내긴 했지만, 나탈리는 멍청하지 않았기에 애초에 마음먹었던 대로 꽃차를 황실에 납품하겠다는 등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살펴 가세요. 미리엘 황후 폐하. 오늘 방문해 주셔서 저엉말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이하 백작가에 다녀온 미리엘 황후는 나탈리와 헤어지고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기절하듯 늘어졌다.
* * *
미리엘 황후의 속사정을 모르는 귀족 영애들은 자신의 접대가 통하지 않자 분해했다.
특히 나탈리가 가장 심했다. 그녀는 꼭 미리엘 황후가 굉장히 오만하다는 뉘앙스로 떠들었다.
“굉장히 신경 써서 정원을 꾸몄는데, 미리엘 황후 폐하께서는 눈에 안 차시는가 보더군요.”
“너무 괘념치 마세요. 북부에서 오신 분이라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보석을 좋아하시는 모양인가 봐요.”
“우리 가문의 정원도 선대 황후께 몇 번이나 칭찬을 받았는데, 역시 북부 사람이셔서 보는 눈이 제국민하고 다르신가 봐요.”
오히려 미리엘 황후가 북부에서 온 것을 노리고 접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애들은 다소 뻔뻔했다.
그녀들은 황후를 모욕했다고 하지 않는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험담을 이어 나갔다.
“다 일등 하기는 글렀다고 말하는데 어떤 가문이 하르미네스의 날개로 선발될까요. 그래도 뽑히긴 할 텐데.”
“그러게요. 이제 남은 가문도 얼마 없고……”
여상한 잡담을 흘리던 영애들은 은근슬쩍 본심을 내뱉었다.
“뭐…… 클로틸드 공작가는 최근에 이런 행사에서 두각을 드러낸 적은 없었죠?”
클로틸드 공작 부인도 일찍 죽었고, 딸인 멜라니도 의전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영애들은 은근슬쩍 클로틸드 공작가를 깎아내리며 자신들의 처지를 위안했다.
“어머, 클로틸드 공작가를 두 번 죽이시는 것 아닌가요?”
“평소 사교계에서 이름이 난 영애와 부인들도 고전하는데, 클로틸드 영애는 정말로 큰일이네요.”
조세핀이 사라졌다지만, 원래 그녀와 어울리던 무리들이기에 모임의 영애들은 클로틸드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럼 이번에 하리미네스의 날개는 누가 될까요?”
이전까지는 조세핀이 앞장섰다 뿐이지 여전히 사교계는 그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부족한 게 없어서 감히 반기를 들지 못했던 조세핀이 사라지니 이제는 자기가 사교계의 꽃이 되고자 눈치 싸움 중이었다.
“영애들의 말을 들어 보니, 바이하 가문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르신 모양이네요.”
그리고 그 무리에서는 나탈리가 주도권을 잡아 가는 중이었다.
그녀가 나서자 영애들은 말수를 줄이고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영애, 이번에 테이블에 놓았다던 벤터꽃은 황후 폐하께서 좋아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저번에 보라색은 북부에서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걸 잊으셨네요?”
“앗……”
지적을 받은 영애의 얼굴이 붉어지는데, 나탈리는 오히려 까르륵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영애들 역시 눈치를 보다가 호호 웃었다.
방금 행동은 나탈리가 눈치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 기회에 질서를 잡아 놔야지.’
하리미네스의 날개를 직접 뽑는 데에 미리엘 황후도 사교계의 여론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크게 두각을 드러낸 가문이 없다면, 미리 기선 제압을 해서 자신의 이름이 오르게 하는 편이 좋다.
‘흐흠, 어차피 미리엘 황후의 반응은 다 비슷비슷했다고 하니까.’
이러면 사교계에서 여론 좋은 자신이 되지 않을까?
나탈리는 차를 마시며 씨익 웃었다.
꽃차의 홍보는 놓쳤다고 하더라도, 하리미네스의 날개 자리는 절대 빼앗길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