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릴 뻔하다, 일말의 이성으로 황급히 부채를 들어 얼굴을 가리는 모습.
먼저 ‘에어컨’을 마주한 다른 사람들은 당황해서 자빠지거나 기절하다시피 놀랐는데, 대단히 침착한 태도였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는 얘기다.
“클로틸드 영애. 이 시원한 공기는 어떻게 한 건가?”
하지만 감추려고 해도, 미리엘 황후의 목소리에서 흥분한 기색까지 완전히 숨길 수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 침착한 태도를 높게 치는 에스트리아 왕국에서 온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높게 올라간 건 대단한 일이지.’
평범한 제국민의 관점에서 보는 것보다 더 기뻐하고 있는 거다.
더군다나 평생을 공주로 살았고, 지금은 황후가 된 사람인데 흡족한 감정을 다 못 숨기고 있다는 거고.
‘제국민으로 따지면, 지금 황후 폐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본 사람 정도의 반응을 보여 주고 있는 거지.’
나는 미리엘 황후에게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제가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다미안 마탑주와 마법 아티팩트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황후 폐하의 마음에 드셨다니 영광입니다.”
“여름에 숄을 입을 준비를 했는데 말이지?”
나는 순간 움찔했으나, 오히려 좋다는 생각에 다시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래. 오늘 에어컨 같은 물건을 틀어 놓고도 ‘황후 폐하께서 더울까 봐 열심히 준비했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미리엘 황후는 잘난 척하고 생색내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했지.’
굳이 입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미리엘 황후가 내 팔에 걸쳐진 숄을 발견하지 않았나.
‘오히려 좋은 인상을 줬겠어.’
미리엘 황후에게 큰 인상을 주기 위해 아주 차가운 바람을 설정해 두었다.
나는 나중에 숄을 덮을 요량으로 미리 챙겨 왔고.
“고맙네. 내가 지금 북부에 와 있는 줄 알았어.”
과연 미리엘 황후는 잘난 척하지 않는 내 모습을 더 높이 산 것 같았다.
‘밖은 덥고, 응접실은 추울 정도로 기온을 내려 놓는 게 역시 맞았어.’
그래야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더욱더 극적인 효과가 두드러지게 날 테니 말이다.
황후가 들어온 뒤에 점점 온도를 조절해 봤자 서서히 달라질 테니, 아무래도 인상은 좀 약하지.
이런 건 첫인상이 가장 중요한데 말이야.
“이 물건이 ‘에어컨’이라고 했지?”
응접실을 열 때만 해도 기운이 하나도 없던 미리엘 황후였지만, 이제는 눈에 빛이 돌아와서 적극적인 태도로 이것저것 질문을 시작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을 만드는 건 ‘에어컨’이고, 날개가 돌아가는 건 ‘선풍기’라고 합니다. 온도 조절과 풍량 조절은 이렇게 하는 것인데……”
“오오, 이런 것을 생각해 내다니.”
누군가를 대놓고 칭찬하는 분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 정도 극찬이라니.
확실히 목표했던 바를 달성한 것 같다.
뒤이어 함께 따라온 시녀장 역시 감격에 차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 또한 여태 힘들어하는 미리엘 황후를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을 거다.
“그리고 꼭 차가 아니어도 괜찮으시다면, 황후 폐하께 제가 요즘 즐겨 먹고 있는 음료를 대접할까 합니다.”
“차가 아니라고?”
“예, 제가 직접 만들어 본 음료지요.”
아무래도 클로틸드 공작가는 지긋한 명문가라서 당연히 차를 대접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좀 다른 걸 준비했다.
쪼르르-
나는 병에 담긴 음료수를 따르며 힐긋 미리엘 황후를 보았다.
다행히 처음 보는 음료인데도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하긴 가뜩이나 더운데 뜨거운 차만 계속 마시고 있었으니 힘드실 만도 하지.’
그리고 나는 해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듯, 먼저 투명한 음료수를 마셨다.
상쾌하고 청량한 맛.
기존에 홍차나 꽃차와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만들었지만 참 잘 만들었단 말이지.’
좀 더 매력 있는 맛으로 대접하고 싶어서, 어제는 주방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부디 황후 폐하가 좋아하셔야 할 텐데.’
그러나 미리엘 황후는 내가 내놓은 음료를 마시고는 말이 없었다.
“…….”
음, 에어컨과는 다르게 이번 내놓은 물건은 실패인가?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니, 미리엘 황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음료 역시 영애가 만들었다고? 어쩌다가 만든 건가?”
“날이 덥다 보니 계속 갈증이 나더군요. 하지만 기존의 뜨거운 차는 마시기 힘들어 색다른 음료를 고안했습니다.”
내가 미리엘 황후에게 내놓은 건 이온 음료였다.
땀을 덜 흘리는 편이라고 해도, 미리엘 황후에게 제국은 24시간 더운 곳이다. 힘들지 않을 리 없었다.
“물에 설탕과 소금을 타면 힘이 난다기에, 더운 날에는 특별히 챙겨 먹고 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네요.”
“과연 그렇군.”
미리엘 황후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축 늘어져 있던 머리가 도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래, 이온 음료 먹고 시원한 바람 맞으니까 살 것 같겠지.
“이 음료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온 음료라고 제가 지어 보았답니다. 혹 마음에 드신다면 몇 병 더 만들어 황궁에 보내겠습니다.”
이온 음료는 설탕이랑 소금을 타는 게 기본 레시피이지만, 나는 거기에 오렌지 주스를 섞어 상큼함을 더했다.
미리엘 황후가 오렌지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단하군, 과연 대단해.”
이내 나를 보는 미리엘 황후의 눈이 크게 휘어졌다. 그녀는 이제 우아한 척을 하려 들지도 않았다.
이야, 미리암 왕국 사람이 저렇게 웃는 거면 정말 기쁜 거다.
“클로틸드 영애. 오늘 정말로 작정했나 보군?”
물론 작정한 게 맞았다.
나는 폴리우스와 약혼하기도 싫고, 다미안 마탑주가 벨데르트 백작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꼴도 못 보겠거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미리엘 황후 같은 사람 앞에서 작정하고 덤벼들었다고 대답하는 바보짓을 하지는 않았다.
예의상 시침을 떼니, 과연 미리엘 황후는 더 캐묻지 않고 싱긋 웃었다.
“클로틸드 영애는 어떻게 마법 아티팩트를 생각하게 되었는가?”
“처음에 마법 아티팩트 자체에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니었습니다. 영상석을 만들어 볼 수는 없을까 가졌던 호기심이 다른 분야까지 닿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갑자기 마법 아티팩트에 관한 질문?
나는 속으로는 의아해하면서도 술술 대답했다.
많이 생각한 분야이다 보니 딱히 어려운 대답은 아니었다.
“제가 몸이 좋지 않다 보니 외출하기 힘들 때가 있어, 집에서도 연극 같은 걸 볼 수 없을까 생각했거든요.”
“오늘 에어컨을 보니 마법 아티팩트는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단순히 영상석이나 공격용이 아니라 말이야.”
미리엘 황후는 들고 있던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대단하군. 에어컨을 떠올린 건 누구지? 자네인가 다미안 마탑주인가?”
“제 이야기에 다미안 마탑주님께서 발전을 시켜 주신 것이지요.”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하지만, 그것까지는 물으면 안 되겠지. 그렇다면 검은 달은 자네가 기획을 맡고 다미안 마탑주가 기술을 책임지는 건가?”
“검은 달은 저와 마탑주님이 공동으로 설립한 사업체인데……”
질문이 계속해서 쏟아져서 나는 신중히 대답을 고르면서도, 너무 늦게 대답하지 않도록 신경 썼다.
“영상석도 말이야, 2주는 무료로 볼 수 있는 홍보가 굉장히 효과적이었다고 보는데.”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그것 역시 영애가 떠올린 건가?”
“부족하지만 그렇습니다.”
“그 방식을 제안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반대하지 않았나?”
원래 다른 사람들은 사업을 황후에게 소개하고 싶어 바쁜데 나는 오히려 질문을 받아서 대답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업 아이템 자체를 넘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과정까지 말이다.
“그래, 나는 에스트리아 왕국에서 왔지. 하지만 대륙 북부에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은 단순히 눈에 뒤덮여 삭막하게 자랐다고만 생각해.”
“…….”
“몇몇 대륙 북부 사람이 제국의 화원을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제국에 도는 건 알아. 꼭 뜨내기를 대하듯이 항상 꽃만 가져다 대기 일쑤지.”
미리엘 황후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지만, 물론 정말 재미있어서 웃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영애는 다른 방향으로 접근했어. 내가 더위에 약할 거라 생각하고 에어컨을 만들다니 대단해.”
“감사합니다.”
“그런 혜안이라면 단순히 마탑의 기술 아니어도 내 환심을 샀을 테지. 이렇게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과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이 만났다는 건…… 대단하다고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걸.”
미리엘 황후는 부채를 손바닥으로 쥐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가 장차 더 큰 인물이 될 것 같아서, 지금 이런 자리가 생긴 게 기쁘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