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어쩐지 미리엘 황후는 나를 대단히 높게 사는 것 같았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칭찬을 들은 나는 귀에 조금 열이 올랐다.
평소에 말이 그렇게 많은 분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미리엘 황후의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두 사람은 약혼한 사이기도 하지. 어떻게 둘이 파트너가 된 건가?”
“사업차 만나다가 호감을 느끼게 된 것이 계기입니다.”
“두 사람이 사업 파트너로 잘 맞는다는 건 어떻게 알았고?”
사실 다미안 마탑주의 이복동생인 폴리우스가 제 전 약혼자인데, 그놈 복장 터지라고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따위의 대답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적당히 다미안 마탑주와 말을 맞춰 둔 것도 있기에 매끄럽게 나는 답변을 쏟아 냈다.
“과연 이상적인 만남이야. 클로틸드 공작이 흡족해할 것도 같은데. 반면 벨데르트 백작은…… 흐음, 얼마나 좋아하시던가?”
“…….”
중간중간 막히기도 했고,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거의 일방적으로 내가 대답하는 대화의 양상이었지만 꽤 즐거웠다.
사실 내가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 이런 진지한 질문을 받는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내가 영상석으로 시작했다고 영상석만 물어보던데…… 마법 아티팩트 사업 자체에 물어보시다니. 확실히 시야가 넓으신 분이야.’
미리엘 황후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다.
그 점이 무섭기도 하지만, 이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에어컨과 선풍기가 보급된다면 혹시나 더위가 힘든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겠어. 이를 치하하고 싶은데. 혹시 원하는 것이 있나?”
그리고 듣던 대로 시원시원하기까지 했다.
나는 냉큼 대답하지는 않았다.
“황후 폐하께 기쁨을 드린 것만으로 충분……”
“괜찮네. 하리미네스 주간은 백성이 겪는 고초를 황후가 들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리미네스 주간이라는 게 이럴 때는 도움이 됐다.
적당히 황후에게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바라는 게 있으니 굳이 대단한 물건까지 만들어 가며 나에게 환심을 사려고 한 게 아니느냔 말이야.”
하긴 그렇다. 내가 평소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먼저 대화 주제를 틀어 준다면 나야말로 반갑지. 입이 덜 아프잖아.
“실은, 다미안 마탑주님과 약혼을 하는 과정에서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언가?”
“지금 제국에서는 결혼이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라 하여 청혼서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물론 나는 약혼 건으로 폴리우스가 자꾸 질척거린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저는 전 약혼자의 양해를 구해서 편하게 파혼할 수 있었지만, 다시 한번 혼담을 넣을 필요가 없었다는 건 놀라웠습니다.”
내 말을 들은 미리엘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사람이 그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었네. 내가 있던 왕국과는 전혀 달라서 놀라던 차였지.”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다른 사람들은 다 개인적인 곤란함을 말하던데, 이런 요청은 자네가 유일하군.”
오늘 황후 폐하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황후 폐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여름에 약해 사교 모임에 나가는 게 드물어 과소평가가 된 부분이 있었던 듯하다.
‘앞으로는 더 큰 영향력을 끼치시겠지.’
꼭 청혼서 이야기가 아니어도, 황후 폐하께 이렇게 줄을 만들어 둔 건 좋은 일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 유명하다던 홈시어터는 보여 주지 않을 건가? 주문을 해도 몇 달은 기다려야 하는 물건이라 다들 궁금해 안달이라던데.”
“황후 폐하께서 관심을 가져 주시니 영광입니다.”
내가 먼저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홈시어터를 보겠다고 말해 주다니.
원래 사람들이 먼저 황후에게 이거 해 봐라, 저거 봐 달라 그러는데. 요청 안 했는데도 먼저 말을 꺼내 주는 건……
‘영상석은 너무 노골적으로 내 사업이라 굳이 보여 드리려고 하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에어컨과 이온 음료가 미리엘 황후에게 대단히 감명 깊었나 보다.
‘그리고…… 향후 마법 아티팩트의 가능성도 눈여겨본 거고.’
딱히 준비하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되면 또 안 보여 줄 이유도 없다.
“혹시 보고 싶은 영상석이 있으신지요?”
“글쎄, 자네가 추천해 줄 수 있겠나?”
이건 또 한 번 시험당하는 기분인걸.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후가 온 에스트리아 왕국의 영상석을 준비했다.
-우리 마을에는 항상 눈이 내려.
-하얗고, 정말 하얀 풍경이야……
황후에게 보여 줘야 하니 적당히 감동적이고 자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준비했다.
“소녀 시절에 내가 본 연극이군.”
“아, 보신 거라면 다른 것으로 틀겠습니다.”
“아니, 그대로 두게. 저 연극을 내가 참 좋아했는데…… 마음이 포근해지는 기분이야.”
미리엘 황후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이온 음료를 마시던 도중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미리엘 황후를 따라온 시녀장이 소곤거렸다.
“사실 날이 무덥다며 잘 주무시지 못하는 날이 많았답니다. 잠시만 신세를 져도 될까요?”
요 근래 황후가 많이 수척해졌다며 말이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엘 황후를 좀 더 편한 곳으로 옮길까 했지만, 도중에 깰 우려가 있어 그만두었다.
그리고 적당한 담요만을 가져와 둘렀다.
‘계속 더운 곳에 있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에어컨을 틀어 두고 담요 덮고 자는 낮잠……’
천국에 온 기분이겠군.
“황후 폐하께 좋은 대접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녀장이 묘한 뉘앙스로 말했다.
미리엘 황후는 단순한 낮잠이 아니었는지 푹 잠들었다가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내가 퍼뜨리지도 않았는데 황후 폐하께서 무려 공작가에서 잠이 들었다고 소문이 났다.
‘시녀장님이 한 말이 이거였을까?’
얼마 뒤, 나는 하리미네스의 날개로 선정되었다.
* * *
멜라니가 하리미네스의 날개로 선정되자 나탈리는 분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프다는 핑계로 사교계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던 영애가 대체 무슨 이유로 날개가 된 거야?’
내로라하는 귀족 영애들도 미리엘 황후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사교계에서 두각을 드러내지도 않던 공작 영애가 불쑥 나타나 최고의 영예를 안다니.
영상석 사업이니 뭐니 하지만, 솔직히 사교계에서는 벨데르트 이복형제와의 스캔들이 더 유명하지 않은가?
나탈리는 자신 말고도 불만을 품은 영애와 부인이 여럿 있으리라 짐작했다.
“클로틸드 영애가 하리미네스의 날개가 되시다니 정말 뜻밖이네요.”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은근슬쩍 운을 띄우니 몇 명이 기다렸다는 듯 미끼를 물어 온 것이다.
“외국에서 오신 분이라 아무래도 저희와 기준이 다를 수도 있지요. 그래서 훌륭한 의전을 선보였다는 말이 없던 클로틸드 영애께서 신선하셨을 수 있고요.”
외국인이라 아는 게 없는 황후가 별 볼 일 없는 영애를 뽑았다는 뜻이다.
“공작 영애와 친분을 쌓고 싶으셨을 수도 있고요.”
순전히 가문의 힘이라는 뜻이다.
“어제 다녀온 티 파티에서도 많이들 놀라셨답니다. 이번처럼 화제가 된 하리미네스의 날개도 없을 거예요!”
안 좋게 화제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 대부분이 멜라니 클로틸드가 하리미네스의 날개가 되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나탈리는 만족스럽게 모임에서 나오는 말들을 해석했다.
대놓고 미리엘 황후에게 선정 기준이 이해 가지 않는다 따지지는 못해도, 사교계의 여론 한 축은 담당할 수 있었다.
하리미네스의 날개가 된 사람이 평판이 올라가는 것이라도 막겠다는 나탈리의 작전이었다.
‘어차피 클로틸드 영애는 젊은 영애들과 안 친하잖아?’
나탈리는 성격이 무난하고 명랑해서 발이 넓은 스칼렛을 흘깃 바라보았다.
멜라니의 소꿉친구라고 유명한 그녀였지만 그래 봤자 단 한 명.
‘이런 곳에서 뉘앙스가 불순하다는 이유만으로 나서 봤자 발악일 뿐이지.’
가문의 힘과 사교계의 영향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황후와 공작 영애라지만, 사교계에 기반이 부족한 외국인 황후와 몸이 좋지 않아 사교계에서는 얼굴을 보기도 힘든 공작 영애일 뿐이었다.
“저기요.”
“말씀하세요, 스칼렛 유포나 영애.”
“지금 황후 폐하께서 하리미네스의 날개로 왜 클로틸드 영애를 선정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것 같은데……”
“어머, 그럴 리가요.”
“저희는 순수하게 의문을 가졌을 뿐이랍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를 멜라니에게 전해 준다면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나탈리가 새까만 기대를 가지고 입꼬리를 올리려던 그때였다.
“아아아. 듣자 하니 웃겨서 못 들어 주겠네.”
하지만 나탈리가 숫자를 믿고 스칼렛을 유별난 영애로 몰아가려던 시도는 순식간에 막혔다.
“있잖아요~ 여러분은 클로틸드 공작가에 초대되어 본 적이 없죠?”
“……뭐라고요?”
“그러니까 미리엘 황후 폐하께서 내놓은 선정 기준도 이해 못 하는 거 아니에요.”
유순하고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대놓고 껄렁껄렁한 말투.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이라 꼽히는 마르티스 가문의 클라라였다.
“저는 공작저에 방문해 본 적 있어서 바로 알겠는데요? 왜 황후 폐하께서 클로틸드 영애를 하리미네스의 날개로 뽑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