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듣고 있던 귀족 영애 몇 명이 혀를 차며 클라라를 비난하고 들었다.
“마르티스 영애야말로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저희가 꼭 공작저에 초대받지 못한 뜨내기 취급하는 듯한……!”
“어머, 저는 그냥 ‘에어컨’을 여러분이 보지 못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구나 말하려는 것뿐인데요?”
“그렇다고는 해도 말투가 지나쳐요! 좀 더 예의 바르고 현명하게……”
“제가 평민 출신이라서요. 그 부분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넘쳐나는 건 기품이 아니라 돈밖에 없답니다.”
“뭐라고요? 그게 자랑이에요?”
평소 평민 출신이라 욕을 먹는다지만, 어쩜 저렇게 무례할 수가.
이제는 주변의 눈치도 보지 않을 모양이었다.
“얼마나 클로틸드 공작저에서 편하게 지내셨는지, 황후 폐하께서 잠까지 드셨다고 하더군요.”
“그게 정말인가요?”
딱히 멜라니를 비난하지 않던 귀족 영애 몇 명이 관심을 기울이는 게 보였다.
나탈리는 다시 흐름을 자신의 쪽으로 이끌어 오고자 애써 클라라에게 우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리엘 황후 폐하께서 몸이 좋지 않아 쉬셨던 걸 너무 과하게 해석하시는 듯하네요.”
“황후 폐하 본인께서 너무 편안해서 그렇다 하셨어요. 클로틸드 공작저에는 ‘에어컨’이 있다 보니 스르르 잠이 드실 만도 하죠.”
“네? ‘에어컨’이라고요?”
“그것 봐, 바이하 영애는 클로틸드 공작저에 초대받은 적이 없으셔서 모르시잖아요.”
클라라가 자신감 있게 턱을 치켜들었다.
순식간에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 집중했다.
“지금 제국의 날씨가 덥잖아요?”
“덥기는요. 적당히 따뜻하고 화창한 정도죠.”
“어휴, 바이하 영애는 정말 수도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신 분이네요.”
나탈리는 클라라의 말에 발끈했다.
“바이하 가문의 영지는 제국 남부에요. 그곳에 비하면 수도는 정말 적당한 날씨거든요?”
“흥, 제국 남부의 날씨를 수도와 비교하시는 분이 제국 북부도 아니고, 대륙 북부에서 오신 황후 폐하의 생각은 조금도 못 하셨나 보죠?”
“그건 무슨……”
나탈리는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정적을 타, 옆에 있던 호기심 많은 영애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클로틸드 영애가 하리미네스의 날개로 뽑힌 게 그 ‘에어컨’이라는 것 때문인가요? 그게 뭔데요?”
“더위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한 거죠.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마법 아티팩트예요!”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요? 인위적으로? 그게 가능한가요?”
“윈드 마법과 아이스 마법을 이용한 거래요. 정말 대단한 생각이지 뭐예요!”
마법을 어느 정도 아는 영애들은 클라라의 말에 감탄사를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위적으로 차가운 바람을 만들어?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하지만 나탈리는 설명을 듣고서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기색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클라라는 다시 한번 그녀를 비웃듯이 보았다.
“저는 다행히 클로틸드 영애의 친구라서 가 볼 수 있었답니다. 세상에 없던 물건이니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한지 감이 안 잡히실 만도 하지요.”
그리고 클라라가 이렇게 나오자 스칼렛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뒤늦게 말을 보탰다.
“저야말로 친구라 진작에 ‘에어컨’의 바람을 쐤는데, 더운 날에 밖에 나가지 않고 홈시어터로 영상을 볼 때 정말 천국 같더라고요!”
“아니, 우리 저택에도 홈시어터를 설치했는데……”
그리고 이쯤 되자 사람들은 왜 클로틸드 영애가 하르미네스의 날개가 되었느냐보다는, 대체 그 에어컨이라는 게 뭐기에 클로틸드 영애가 뽑혔을까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나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위기가 의도했던 것과는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제가 듣기로 에어컨은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멜라니가 이번에 만든 영화관 일부에는 설치되어 있다고 해요.”
“어머, 저희 영지에 새로 만든다던 영화관이라는 게 홈시어터랑 비슷하다고 하던데……”
아까는 은근슬쩍 나탈리의 말에 동조하던 무리들도 언제 자신이 그랬냐는 듯 클라라와 스칼렛에게 붙는 것이 보였다.
‘나는 가문의 꽃차도 황실에 관심을 못 받고, 하르미네스의 날개도 되지 못했는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기다 이제는 나와 다른 처지도 생각 못 하는 멍청한 사람이 된 거야?’
다른 영애들이 자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굴어서 나탈리만 멜라니를 인정 못 하겠다는 듯 군 멍청한 사람으로 독박을 쓰고 말았다!
‘에어컨이니, 선풍기니. 물건 팔던 평민이라 입은 잘 터나 본데, 실제로 별 반응이 있을까? 새로운 물건이라 잠깐 관심을 가질지는 몰라도 곧 식어 버릴걸?’
하지만 나탈리의 바람과는 달리 미리엘 황후가 마음에 들어 했다는 소식에 에어컨과 선풍기는 빠르게 소문이 났다.
하르미네스 주간이 지난 한여름.
프하이젠 제국은 예년보다 올해 여름 기온이 더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와…… 정말 시원하다. 아니, 오히려 추울 정도야.”
“올여름에 선풍기가 만들어져서 다행이네. 이거 없으면 어쩔 뻔했지?”
영상석 배송이 어려운 지방에 건설한 영화관은 에어컨의 개발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홍보가 되었다.
영화관에 가 본 사람들은 에어컨을 주문하고 싶어 했고.
미처 지방에 가지 못한 수도의 귀족들은 더더욱 애타 하며 에어컨을 사려 했다.
“에어컨은 지금 받아 보실 수 없지만, 선풍기는 즉시 구매가 가능하십니다.”
에어컨은 비싸고 주문이 폭주해 구하기 어렵지만, 선풍기는 상대적으로 싸고 빨리 받아 볼 수 있었다.
제국의 여름 날씨는 사실 선풍기 정도로 충분했기에 선풍기는 금방 보급이 되었다.
가정에 하나의 선풍기는 기본이라고 할 정도로, 영상석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마법 아티팩트를 구매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멜라니는 이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좋긴 하지만, 처음에 내가 원한 건 하르미네스의 날개가 되는 게 아니라 결혼 제도 개선이었는데……’
* * *
미리엘 황후는 멜라니에게 선물 받은 에어컨과 선풍기 덕분에 올여름 들어 가장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클로틸드 가문에 방문할 때보다 시간이 지나 한층 더 더워진 날씨인데도 그랬다.
“이렇게 당신의 건강한 모습을 보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그리고 미리엘 황후가 가장 더운 낮에도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자 가장 기뻐한 건 황제였다.
그 모습을 보며 미리엘 황후 역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쁩니다.”
감당할 수 없는 더위로 지친 몸이 회복된 게 언제라고, 미리엘 황후는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황제는 그런 그녀가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좀 더 쉬지, 뭘 그렇게 본다고 그러십니까.”
그는 자연스럽게 미리엘 황후가 보고 있던 서류를 살펴보았다.
전부 결혼 제도에 관한 것들이었다.
“사실 결혼 제도의 문제점은 클로틸드 영애가 건의한 이야기예요. 물론 내가 에어컨하고 선풍기 받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결혼 제도에 문제가 있는 건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요?”
프하이젠 제국의 결혼은 개인과 개인이 아니라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다.
미리엘 황후가 보던 서류에는 제도의 결함 때문에 여태까지 있었던 피해 사례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가문에 혼담이 묶여, 약혼자가 죽었는데도 원치 않게 결혼한 영애가 자살했다던가.
약혼자와 파혼하기로 했는데 가문에서는 그걸 원하지 않아 불행한 결혼 생활 후 불륜을 저지른 사건……
‘이렇게나 많았던가?’
황제는 서류를 살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막연하게 느꼈던 결혼 제도의 단점이 적나라했다.
“객관적으로 회의에서 다뤄 볼 안건이군요.”
그리고 며칠 뒤, 황제는 황궁에서 열리는 회의에서 귀족의 혼담 개선을 주제로 꺼냈다.
“갑자기 결혼 상대가 바뀌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 본인들의 관계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니라 가주의 뜻에 따라야 하지 않은가.”
“흐음……”
회의 안건을 들은 가주들은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 거라 생각해 시큰둥했다.
제도가 수정되어도 그다지 제게 도움이 될 게 없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리엘 황후가 전보다 한결 생기 있어진 것을 본 황제의 뜻이 강력했고.
클로틸드 공작이 강력하게 지지하며 나섰다.
“그렇습니다. 반드시 바뀌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클로틸드 공작과 척져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가주들이 생각에 잠긴 그때.
“아니요, 절대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유일하게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버럭 반대하는 자가 있었다.
“가주라고 하면 그래도 살아온 시간만큼 지혜가 있을 텐데, 젊은 사람들이 무턱대고 혼사를 진행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
벨데르트 백작이었다.
‘아하, 잉그다 후작가가 몰락하니 폴리우스 영식이 다시 클로틸드 공녀를 잡으려고 했구만?’
‘쯧쯧, 그러게 왜 본부인을 박대해서 첫째가 집을 뛰쳐나가게 해.’
갑작스럽게 법안이 바뀌는 것에 놀랐던, 다소 소식이 느리고 눈치도 없는 사람들까지도.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그야, 벨데르트 백작이 있는 힘껏 막으려고 하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거 참, 결혼 제도가 수정되면 벨데르트 백작이 미쳐 날뛰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반대하는 그 모습이 결정적이었다.
벨데르트 백작을 본 다른 가주들은 순순히 결혼 제도 수정에 동의했다.
다미안 마탑주가 잘나가는 것이 배가 아픈데, 정작 그 아버지인 벨데르트 백작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
‘내가 다미안 마탑주 같은 자식을 뒀다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엇나가는 부자의 모습을 보며, 자신은 벨데르트 백작처럼 나쁜 부모가 아니라는 우월감을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