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건, 그렇지만.”
가볍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바로 대답하는 나를 보며 다미안 마탑주는 허탈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영애는 참 모든 게 명쾌하시군요.”
“아, 물론 먼저 그렇게 말하면 멋이 좀 없죠. 다른 사람들이 후계자가 되어 달라고 애원하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바꾸겠다고 하는 걸로 갑시다.”
나는 시원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잠시 나를 빤히 보고 있던 다미안 마탑주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영애는 처음에 저에게 약혼하자고 말하셨을 때도 비슷한 태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싫으세요?”
“솔직히 막무가내 같기도 하고, 앞뒤 일은 생각 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계획적이지 않다는 느낌도 있지만……”
“말이 심하신 거 아니에요?”
장난기 섞인 내 질문에, 다미안 마탑주는 이내 푸스스 웃었다.
“그래서 좋습니다.”
“예?”
“영애의 말대로 하고 싶어졌어요.”
마탑주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일까, 다미안 마탑주의 얼굴은 항상 굳어 있고 위압감을 주는 듯한 말투가 기본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후련하다는 듯이 웃는 모습은, 꼭 소년 같아서……
“그래요, 이 기회에 영애가 싫어하는 폴리우스에게 적나라하게 비교당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업에 이어서 백작으로서의 능력 역시 월등하다는 걸 보여 주겠습니다.”
다미안은 테라스의 문을 잡더니 먼저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고맙습니다, 영지에 개입할 명분을 만들어 줘서.”
덜커덕, 테라스의 문이 닫혔다. 혼자 남겨진 나는 얼떨떨한 채로 중얼거렸다.
방금 내게 보여 주었던 다미안 마탑주의 표정이 영 생경해서다.
‘방금 환하게 웃은 거, 맞지?’
지금은 꽤 어두운 저녁인데, 분명 달빛과 정원에 있는 마력등 말고는 별로 밝지도 않은데.
왜 그 웃는 모습이 콕 박혀서 뇌리에 안 사라지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가 뗐다. 와, 웃는 모습이 왜 이렇게 잘생겼지.
“뭐야…… 왜 저렇게 웃어?”
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상하지, 아까보다 분명 기온이 떨어진 밤인데 왜 얼굴에 열이 오른 것 같지?
“웃는 모습 이쁘네. 평소에 좀 자주 웃지.”
상대를 비웃거나. 조소하거나. 피식 웃는 정도가 아니라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본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순간 가슴이 덜컹거리잖아.
‘어휴, 미남의 미소란 파급력이 대단하구나. 순간 착각할 뻔했어.’
나는 머쓱해져서는 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고 다미안 마탑주가 사라진 이후에도 조금 더 테라스에 머물렀다.
어쩐지 싱숭생숭한 기분을 좀 가라앉혀야 할 것 같았다.
* * *
멜라니가 미리엘 황후를 접대하는 행사를 해내고, 스칼렛과 클라라를 만나는 동안 다미안은 약혼반지를 만들었다.
예전에 잉그다 후작이 잡아 둔 인질을 구출하러 갈 때, 따라가겠다는 멜라니가 못 미더워 주렁주렁 마법 아티팩트를 달아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멜라니는 부피가 크고 수가 많은 마법 아티팩트를 부담스러워했고, 결국 하나도 착용하지 않고 다녔다.
물론 호위 기사를 데리고 다닌다지만……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 잠시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
링 역할을 하는 마력석에 마법을 층층이 부여하고, 멜라니가 착용하는 것이니만큼 작은 크기로도 좋은 효율을 낼 수 있도록 오랜 시간 인내심을 가지고 주문을 외웠다.
거기에 공작 영애가 끼고 다니는 것이니 창피하지 않도록…… 디자인 공부까지 했다.
마법 공부를 하기도 바쁜데 과거의 자신이 보았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일이다.
그렇게 부단한 노력 끝에 약혼반지가 그저께 완성되었다.
“마탑주님, 약혼반지에 그렇게까지 공들일 필요가 있습니까?”
아니, 당연한 일이다.
멜라니는 미리엘 황후를 만나 그들의 약혼을 위해 일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도 무언가 해야 하는 건 맞다.
자신은 끼어 봤자 별 도움이 안 되니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하는 게 맞았다.
그렇다고 멜라니가 하는 행사에 끼어드는 건 방해가 될 뿐이니까.
‘덕분에 혼담 제도도 개선되었고…… 이제 반지를 줘도 되겠지.’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째서인지 멜라니를 마주하고도 반지를 주는 게 저어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효율을 따지자면 빨리 주면 줄수록 좋은 일인데.
분명 약혼반지가 완성되고 나서는 후련함과 동시에 어서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정작 연회 날이 다가오고, 멜라니를 본 순간부터 뻣뻣하게 굳어서 말도 제대로 못 꺼내는 건지.
‘왜 나는 진짜 약혼도 아닌데 머뭇거리고 있는 거지?’
다미안은 진짜 약혼도 아닌데 굳이 직접 반지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은 신경 쓰지 않은 주제에 그런 생각을 했다.
사업 파트너니까 몸이 걱정되는 건 당연한 거고, 안전을 위해 당연히 주는 게 맞지 않은가.
마탑의 수장인 자신이 공을 들여도 두 달이나 걸리는, 멜라니를 위한 반지를 만드는 데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구하기 힘든 최상급의 마법 재료와 가장 좋은 품질의 마력석을 쓸 때도, 반지에 끼울 다이아를 구할 때도 당연히 멜라니를 위한 것이니 좋은 것으로 골라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왜…… 멜라니에게 전해 줄 시간이 되자 갑자기 몸이 굳어 버린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겠는 건지.
다미안은 몇 번이고 반지를 줄 타이밍을 재고 또 쟀다가, 겨우 사람이 없는 테라스로 왔을 때야 용기를 내어 반지를 건넸다.
“우리가 일단은 약혼 관계니까, 반지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라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그리고 멜라니가 반지를 받아 들고 자신의 검지에 끼우자 그제야 한숨 돌리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잘 쓰겠습니다. 파트너로서 열심히 할게요.”
당연한 그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왜 그러시……”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순간 멜라니의 표정이 변하더니 걱정하듯 말을 걸었다. 하지만 다미안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라는 말을 겨우 입안으로 삼켰다.
왜 ‘파트너’라는 단어가 명치에 걸린 듯 거슬리는지.
‘열심히 한다’는 게 계약으로 묶어진 관계이기 때문이느냐고.
묻고 싶은 게,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고.
‘사업 파트너에 불과하잖아. 약혼도 계약이고……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건데.’
어째서 남자는커녕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에도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걸까.
소꿉친구라며 멜라니가 편해하는 스칼렛도, 자신보다 안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름을 부르는 클라라도 신경에 거슬렀다.
‘예의가 없는 행동이야. 나도 아직 성으로 부르지 않나. 그것도 딱딱하게 대표라는 직함까지 포함해서……’
하지만 당연한 것 아닌가.
멜라니와 자신은 계약으로만 묶인 사이.
사적인 친분 같은 건…… 다미안은 친근감을 느낀다고 해도 일방적인 감정일지 몰랐다.
자신과 만나는 시간은 사업을 제외하면, 전혀 없었으니까.
그나마 사적으로 만난 것처럼 보였던, 지방으로 마차를 타고 함께 꽃을 보았던 때는 어땠던가.
저 영애들처럼 활발하거나 말을 재밌게 하는 것도 아니니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다미안은 스칼렛처럼 멜라니와 오랜 시간 알거나, 클라라처럼 특유의 명랑함으로 멜라니에게 다가가지도 못했다.
‘나와 함께 있을 때보다 즐거워 보여.’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착잡해졌다.
벨데르트의 가신이 자신을 찾아온 굉장히 큰일이 벌어졌는데도, 오히려 멜라니 생각에 그쪽에는 신경이 덜 갔다.
인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게 벨데르트 가문의 문제였는데.
그걸 한순간에 비교적 사소한 일로 만들어 버리다니.
‘당신은 정말 뭐기에……’
* * *
나는 다미안 마탑주와 떠나기로 한 약속을 지켰다.
다음 날, 간소한 준비만 마치고 바로 다미안과 함께 마차에 몸을 실은 것이다.
“비가 올 듯하더니, 다행히 날씨가 좋네요.”
말투는 명랑하게 내뱉었지만, 사실 머릿속은 다소 복잡했다.
‘백작과 폴리우스가 세율을 올렸다니……’
폴리우스는 씀씀이가 헤프다. 나뿐만 아니라 이 여자 저 여자한테 돈을 뜯어서 이런저런 일에 처박았다.
본인은 여기저기서 착하다는 말을 듣고 있지만.
글쎄. 정말로 착한 인간이라면 약혼녀한테 고리대금업으로 대출받게 해서 다른 여자를 구하려고 하지는 않지.
축복을 들먹이면서 위협하듯 말하지도 않을 거고 말이야.
‘으, 결혼하면 가족한테 못할 타입이야. 자기 사람은 못 챙기면서 다른 사람한테만 착한.’
그에 비하면 다미안 마탑주는, 다른 사람한테는 불친절하면서도 나한테는 꽤 다정하게 구니까……
남편으로는 다미안 마탑주가 낫지 않나?
‘아니, 어차피 계약 약혼인데.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람. 목적이 적당히 해결되면 피차 헤어질 사람이잖아.’
애초에 약혼하기 싫어하는 걸 계약 약혼으로 꼬드긴 사람이 나다.
그래 놓고 무슨 남편감 운운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