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73)화 (73/90)

<73화>

* * *

그리고 테라스로 향한 나는, 탁월한 선택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와아.”

하얗게 내려오는 달빛, 낮에는 더웠지만 밤이 되어서 그런지 꽤나 선선한 날씨.

회장 바깥에 있는 정원에서는 풀벌레들이 찌르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딱 쾌적하고, 딱 기분 좋은 산뜻함이었다.

나는 테라스에 기대어 밤의 공기를 들이마시었다.

확실히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와 다미안 마탑주와 둘만 있으니 마음이 편했다.

“춥지는 않으십니까?”

……아니지, 마음이 편한 게 맞나?

갑자기 좁은 테라스로 장소를 옮기니, 이곳에 둘만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연회장의 밝은 조명을 받은 다미안 마탑주와, 어두운 밤에 가까이에서 본 다미안 마탑주는 주는 인상이 사뭇 달랐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약혼이 결정된 건 다 대표님께서 움직여 주신 덕분입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미리엘 황후 폐하를 접대하는 행사는 원래도 해야 하는 건데요.”

“대표님께서 낸 아이디어 덕분에 날개가 되신 게 아닙니까. 에어컨과 선풍기도 덕분에 이제 주력 상품이 되었고요……”

나는 겸손의 말을 꺼낼까, 반대로 다미안 마탑주의 칭찬을 꺼낼까 망설였다.

사실 천덕꾸러기 시한부 공작 영애로 살다 보니 남에게 칭찬을 듣던 적이 없어서……

마르티스 영애처럼 친해지자고 하는 사람이나, 다미안 마탑주처럼 진심이 느껴지는 칭찬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말인데.”

다만 다행인 점은, 다미안 마탑주가 새로 꺼낼 말이 있어 보인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나온 반지.

“저번에 드리지 못했던 반지입니다.”

“어……”

나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달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다이아.

지금, 다미안 마탑주가 나한테 반지를 내밀고 있는 건가?

그대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솟아오르던 생각까지 멈춰 버렸다.

그런데……

“우리가 일단은 약혼 관계니까, 반지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일단은.

그 단어에 나는 잠시 멈췄던 머리가 다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저번에 인질을 구하러 갈 때처럼 호위용 마법 아티팩트를 여러 개 둘러 드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평상시에도 그러기는 쉽지 않죠. 그래서 몇몇 기능을 빼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나는 다미안에게 받은 반지를 조심히 내 손가락에 끼워 보았다.

내 왼손 약지가 아닌, 검지에.

“감사합니다, 어…… 그리고……”

그리고 무언가 더 말했던 것 같은데……

내가 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 내가 아까 그렇게 당황했었지?’

어차피 우리는 계약 약혼이고, 파혼하기로 정해진 사이인데.

폴리우스에게 한 방 먹이자는 목표, 함께 성공을 향해 달리는 사업.

그게 아니면 엮일 일도 없었던 사이가 아닌가.

나는 정신을 빠르게 추슬렀다. 갑자기 내가 당황해서 버벅대고 있으면 상대가 난감할 게 아닌가.

‘그냥 단순한 장신구야. 일시적이어도 약혼반지는 있어야지. 안 그래도 오늘 물어본 사람도 있었고.’

응, 그렇다. 이건 단순히 계약 약혼을 위한 반지에 불과하다.

“잘 쓰겠습니다. 파트너로서 열심히 할게요.”

“…….”

그런데 이번에는 다미안 마탑주가 내 말에 움찔한 것처럼 보였다. 기분 탓인가?

“왜 그러시……”

내가 약간의 어색함을 느낀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제가 열겠습니다.”

다미안 마탑주는 나를 테라스 구석으로 가게 한 뒤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색이 창백한 중년의 남자가 보였다. 나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아까 회장에서 계속 신경 쓰였던 남자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주변을 맴돌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던 중년의 남성.

“무슨 일……”

그리고 내가 묻기도 전에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다미안 도련님, 도와주십시오.”

다미안 도련님이라.

나는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사람들은 보통 내 옆의 남자를 마탑주라고 불렀다. 가끔 벨데트르 영식 정도고.

‘극단 사람들 외에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본 건 처음인데?’

나는 다미안 마탑주의 반응이 궁금해 위를 힐긋 봤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굳어 있기 때문이었다.

“…….”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나는 대신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와 달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벨데르트 영지에는 지금 다미안 도련님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자신을 벨데르트 백작가의 가신, 젤던 남작이라고 소개했다.

‘마탑주님은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던 걸까?’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평소보다 기이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게 느껴졌다.

“벨데르트 영지는 지금 폭동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돌아가.”

“하지만, 다미안 도련님!”

내내 잠자코 있던 다미안 마탑주가 짧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침착하려 애쓰던 젤던 남작은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 많은 영지민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위쪽에 자리한 넥크스 영지에서 물길을 막고 있단 말입니다!”

“나는 이제 벨데르트가 아니야. 매달릴 사람을 잘못 찾았어.”

“도련님께서는 맨몸으로 뛰쳐나가 마탑주까지 되시고 사업까지 훌륭하게 일구신 분이시잖습니까!”

젤던 남작은 털썩 무릎을 꿇더니 다미안의 다리에 매달렸다.

“하지만 벨데르트 백작님과 폴리우스 도련님은 넥크스 영지에 끌려다니기만 할 뿐입니다. 아니, 힘든 상황에 사업에 쓸 돈이 필요하다며 오히려 세율이나 올리지를 않나!”

사업에 쓸 돈이 필요했던 건 검은 달에게 영상석 사업이 상대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으음, 폴리우스의 사업이 성공적이었다면 이웃 영지에서 시비를 거는 일도. 돈이 부족하다고 세금을 더 걷는 일도 없었겠지.’

나는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그게 내 잘못이 아닌 건 알고 있지만 말이다.

“……나는 벨데르트가 아니야.”

“그렇지만!”

언제부터 다미안 마탑주가 앵무새처럼 하던 말만 계속하는 사람이 되었지?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똑같은 말만 되풀이 될 것을 예감한 나는 젤던 남작에게 다가가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상황은 알겠으니 마탑주님과 이야기해 보겠네.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일단 물러가게.”

“아, 알겠습니다……”

젤던 자작은 확답을 듣기 전까지 물러나고 싶은 표정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적당히 눈짓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를 나갔다.

“흠,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어요. 물길을 막으면 벨데르트 영지에서 농사를 짓기 어렵겠어요. 그런데 그걸 잘 따지지도 못하나 본데.”

소설에서도 벨데르트 백작은 무능하다고 나와 있었다.

다만 그때는 약혼자로 내가 있었으니 클로틸드 공작가와 척지게 될까 봐 감히 건드릴 엄두를 못 냈던 거겠지.

‘안 그런 척해도, 신경 쓰이나 본데.’

다미안 마탑주는 아까부터 내내 저조한 기분으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젤던 남작이 나가고 나서 한참을 지난 후에야 내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대표님에게 폐를 끼쳤군요.”

“딱히 폐는 아니었는데요.”

“저는 이제 벨데르트가 아닙니다. 검은 달의 사업과 마탑에만 집중할 겁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저는 뭐라고 한 적 없는데요?”

나는 피식 웃었다.

“마탑주님이 벨데르트 영지에 신경 쓰면 왜 제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제가 몸이 두 개도 아니고 살필 곳이 늘면 당연히 기존에 하던 일에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습니다.”

“있죠, 마탑주님. 애초에 제 목표를 잊으셨나요?”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 폴리우스 벨데르트를 싫어한다니까요. 그리고 한 방 먹이고 싶어 하고요. 아직 저는 만족 못 하거든요?”

“그거랑 무슨 상관…… 아니, 오히려 벨데르트 영지를 도우면 폴리우스 좋은 꼴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죠. 벨데르트 백작님보다, 폴리우스보다 월등하게 일을 잘 해결하면 되잖아요.”

“그게 무슨.”

“마탑주님. 백작저를 뛰쳐나온 상황을 저는 잘 모르지만…… 사실 다음 벨데르트 백작은 마땅히 장자이자 적자인 마탑주님이 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물론 능력 면에서도 말할 것 없고요.”

다미안이 조금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저는 여태껏 벨데르트 백작 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해 왔습니다.”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세요, 그럼.”

“예?”

나는 턱을 치켜들고 대꾸했다.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죽이기라도 한 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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