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사실 다미안 마탑주쯤 되는 파트너와 춤을 춘다고 하면 구두 굽은 지금보다 더 높아야 한다.
하지만 다미안 마탑주는 키가 워낙 훤칠하다 보니 평소보다 높은 걸 신는 정도로는 안 됐다.
……그래서 내가 지금 눈을 잘 못 마주치는 거다.
‘아니, 내가 리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미안 마탑주님이 생각보다 잘 추네?’
원래는 춤에서 남자가 이끄는 방향으로 내가 먼저 움직일 작정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박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의외로 다미안 마탑주가 나를 이끌고 있는 게 아닌가.
덕분에 나는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을 더 빼고, 오히려 상대에게 몸을 맡길 수 있었다.
‘하긴 마탑주님도 귀족 영식이니까. 괜히 기합을 넣었나 봐.’
가까이 붙은 거리가 신경 쓰이고 내 가쁜 숨이 상대한테 닿을까 봐 조심스럽긴 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처럼 가빠지는 호흡,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심장은 없었다.
대신 경쾌한 스텝과 기분 좋은 두근거림만 있을 뿐.
나는 어느새 긴장했던 마음을 모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과거의 어떤 기억도 떠올리지 않고 다미안 마탑주와의 호흡에 집중했다.
“어머, 마탑주님과 클로틸드 영애가 춤을 추고 있네요. 두 분 정말 잘 어울려요.”
“오늘 옷은 맞춰 입은 걸까요? 누가 약혼한 사이 아니랄까 봐, 호호.”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그래, 폴리우스 놈보다는 다미안 마탑주하고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으니 다행이네요.’
‘옷은 당연히 맞춰 입었죠. 계약 약혼인데 사이가 나빠 보이면 큰일이니까.’
사람들의 말에 속으로나마 순순히 대답할 수 있다니. 이런 내 상태에 내가 더 놀랐다.
‘무섭지 않아. 긴장되지 않아.’
파트너 없이 남겨진 나에게 쏟아지는 동정, 비웃음, 조소 같은 건 없었다.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보기 좋다며 웃던 소리가 들린 것도 잠시, 곧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내 앞에서, 내 허리와 손을 붙잡은 다미안 마탑주 한 명 외에는.
‘춤이 이렇게 즐거운 거였나?’
폴리우스가 다른 여자들과 즐겁게 춤추는 걸 연회장의 벽에 붙어 바라보기만 했었는데.
이렇게 내가 아버지가 아닌 또래 남자와 춤을 추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런데 다미안 마탑주…… 무도회에서 여자랑 한 번도 춤춰 본 적 없다더니 잘 추잖아.
그냥 해 본 소리였나?
“마탑주님, 의외로 춤 잘 추시네요?”
“기분 좋은 말씀이군요.”
응, 춤을 추느라 뻣뻣하게 굳어 있을 거라 상상했는데.
내가 갑자기 말을 걸었는데도 여유로운 것 봐.
원래라면 스텝 밟느라 아래만 쳐다보고, 뚝딱거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한번 물었다.
“이렇게 큰 무도회에서만 안 춘 거고, 사실 다른 여자들하고 많이 추셨나 보죠?”
나는 말을 뱉어 놓고는 아차 했다.
이러니까 꼭 내가 다미안 마탑주와 춤을 춘 상대를 질투하는 것 같잖아.
‘뭐 어때. 이왕 내뱉은 말, 수습도 안 되는데 끝까지 밀어붙여 보자.’
나는 태연하게 보이도록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최대한 아무것도 아니란 것처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듯이 말하는 거야.
“아니, 그냥 한두 번 춰 본 솜씨는 아닌 것 같아서요. 아까는 긴장했다고 하더니.”
좋아, 이 정도면 토라진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지?
만족하면서 힐긋 다미안 마탑주를 올려다보았지만, 키 차이 때문인지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잖아.’
춤 초보가 아닌 게 분명하다. 왜 스텝을 밟는 발만 보고 있지 않은 거야.
그가 여느 때처럼 내 눈을 바라보지 않는 이상, 아닌 척 힐긋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시선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항상 내가 말할 때는 내게 눈높이를 맞춰 줬구나.’
깨달음의 여운이 오기 전에 다미안 마탑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춤 실력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래, 나쁘지 않아. 그러니까 왜 나쁘지 않은지 대답하라고.
나는 겉으로는 선선히 웃으며 다미안 마탑주가 이어서 할 말을 기다렸다.
“…….”
“…….”
그런데 뭐야, 이 침묵은.
“그게 끝이에요?”
“예?”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실은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다른 여자랑 춤췄느냐고 물었잖아. 왜 그건 대답 안 해?’
대놓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참았다. 나에게도 사회적 지위라는 것이 있다.
내가 진짜 다미안 마탑주의 약혼자는 아니잖아.
그런데 왜 과거를 궁금해하고 물어보려고 하고 있지?
‘정신 차리자, 정신.’
그래, 대화 주제를 돌리자.
방금 그게 끝이냐고 물어본 건 솔직히 선을 넘은 것 같지만, 응, 어떻게든 넘겨 보자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다른 말을 꺼내면!’
그렇지만 무슨 말을 꺼내지?
내가 잠시 말문이 막힌 사이, 다미안 마탑주는 어쩐지 아까와는 다른 어조로 말했다.
“……춤을 출 일이 있을 것 같아 연습했습니다. 오랫동안 추지 않았다 보니.”
누구랑 연습했다는 거지.
마탑에서 스쳐 지나갔던 여자 마법사들이 몇 명 떠올랐다.
그다지 친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른다.
“마법으로…… 인형을 움직이게 해서 말입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니,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나는 다미안 마탑주가 춤을 잘 추기 위해서 커다란 곰 인형과 뚱땅거리는 상상을 해 보았다. 어울리지가 않았다.
이렇게 차갑고 냉철하게 구는 남자가 마탑에서 혼자 인형과 놀았단 말이야?
“푸흐흡, 와, 그거 정말 대단한데요.”
“웃지 마십시오. 저는 제가 못 추면 파트너인 영애가 부끄러울까 봐……”
“웃긴데 어떻게 해요! 아니, 그래도 저를 위해서라니 감동적인데요. 비웃는 건 아닌데. 크흡.”
나는 애써 말을 덧붙이는 마탑주를 보며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다시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아하하, 진짜 대단한데요!”
지금은 허울상이나마 약혼한 사이였다. 그래서 눈앞의 남자와 첫 춤을 출 수 있는 건 나였다.
‘하지만 잠시뿐이겠지.’
서로의 목적을 위해 뭉친 사이다. 애초에 끝을 전제하고 만난 관계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짝을 이루고 있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도, 이 연회장이 붐벼도 춤을 추는 이 순간만큼은 서로만 보는 사이.
다미안 마탑주도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낀 걸까.
“춤이 이렇게 즐거운 건지는 몰랐군요.”
가까운 거리, 인형과 출 때와는 기분이 전혀 다르다고 중얼거리는, 붉은 눈동자에 내가 비친다.
“영애가 아니었더라면 제가 오늘 이렇게 누군가와 춤을 출 일은 없었겠지요.”
전에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고맙습니다, 오늘 저와 함께해 줘서.”
다미안 마탑주가 웃는다.
평소에는 무표정한 얼굴, 딱딱한 말투만 쓰던 남자의 눈이 보기 좋게 휘어진다.
나는 그 광경을 잠깐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정말 잘생긴 얼굴로 그렇게 웃으면 안 된다니까…… 옆에서 넋을 놓고 쳐다보잖아.’
으음, 저번에 지방에 내려갔을 때도 사람들이 다미안 마탑주를 이렇게 힐끔힐끔 보긴 했지.
하지만 그때는 마탑주라는 걸 몰랐는데 본 거고, 이제는 아는데도 대놓고 보다니.
그나마 잘생긴 얼굴을 평소의 뚱한 태도가 가리고 있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하아.”
“영애, 몸이 좋지 않으십니까?”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런 나를 보고 다미안 마탑주가 손을 쥐어 왔다.
“평상시에는 춤을 안 추시던 분이 추셨으니 확실히 무리한 게 맞군요. 테라스에 가서 좀 쉬시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춤 한 번 췄다고 연회장을 떠나야 할 정도까지는 아닌데.
진통제 부작용도 없겠다. 괜히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저도 오늘 무도회에서 처음으로 춘 거라 긴장했거든요.”
“대표님도 저와 마찬가지로…… 제가 처음이었다고요?”
“네.”
무도회 특유의 달뜬 분위기, 이 순간 나만을 바라보는 파트너, 나를 붙잡은 뜨거운 손.
분위기에 취한 탓일지도 모른다. 솔직한 말을 내뱉은 건.
“다미안 마탑주님이 제 첫 춤 상대라서 기뻐요.”
평소에 수줍음이 많았던 것도 아닌데, 말을 끝내고 나니 순간 뺨이 화끈거렸다.
너무 내 감정을 진솔하게 나타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래도, 뭐…… 내가 못 할 말을 한 건 아니잖아?’
나는 다미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테라스로 향했다.
견딜 만한데도 테라스에 가자는 건 별로 거절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