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사이 나쁘다는 것치고는 둘이 딱 붙어서 사교계에서 내 흉이 나올라치면 편먹고 달려들잖아…… 그럴 땐 환상의 궁합이던데.
‘왜 내가 폴리우스처럼 여자 둘 사이에 껴서 이러고 있지?’
어쨌든 그렇게 사람들에 둘러싸여 정신없는 날은 계속되었다.
“영상석 덕분에 정말 제 삶이 풍요로워졌다니까요?”
“저도 영애처럼 사업을 해 보고 싶어요. 덕분에 용기가 생겼습니다.”
“저희 모임에 들어올 생각은 없으십니까? 클로틸드 영애라면 특별히 끼워 드리겠습니다. 우선 1천 엘바냐만 내시면. 가장 높은 등급의 회원이 될 수 있는데……”
뭐, 때로는 가끔 이상한 사람이 붙어서 무리한 요구를 하며 다가오기도 했지만.
“클로틸드 영애께 무슨 말씀이세요?”
“이상한 소리 하면서 분위기 흐리지 마세요.”
라며,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치워 주었다.
내게 호의를 가지는 사람이 늘어난 건, 스칼렛과 클라라가 여기저기서 떠들어 준 덕분이다. 이건 정말 감사한 일이군.
괜히 힘들게 입을 놀릴 필요가 없으니 편하고 좋았다.
‘그리고 이제 나한테 집적거리는 영식들도 안 보이네.’
저번에 노골적으로 추근거리던 남자들은 주변에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다미안 마탑주의 약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하긴,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대놓고 나와의 관계를 과시했는데.’
“제가 영애의 옆에 설 자격을 주시겠습니까?”
라며, 공개적으로 말하기까지 했으니 말이야. 흠흠.
나는 예전에 그가 약혼을 청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미안 마탑주를 슬쩍 바라보았다.
어쨌든 사람이 몰리는 건 나와 동업을 하는 다미안 마탑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벨데르트 백작저를 뛰쳐나간 뒤로는 사교계와 먼 인생을 살았고, 애초에 사람과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다 보니…… 지금 굉장히 기분이 저조해 보인다.
“벨데르트 백작님께 이야기 전해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통 소식이 없으셔서……”
“가문을 뛰쳐나온 지 오래입니다. 저를 벨데르트 백작가 사람이라 생각하지 마시죠.”
“허업, 실례했습니다.”
이야, 저 명백한 선 긋기 좀 봐. 대화 주제까지 영 좋지 않았군.
저렇게까지 말했으니 검은 달과 접촉할 요량으로 벨데르트 백작가에 접근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다 사라지겠지.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그러나 한 명, 우리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도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래 봬도 공작 영애다 보니 사교 모임에 잘 참석은 하지 못해도, 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귀족들은 다 알고 있는데 말이야.
거기다가 묘하게 다른 사람들과 눈빛이 달랐다.
다들 호의를 가지고 반짝거리는 시선이나,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미안 마탑주에게 접근한다면. 저 사람은 굉장히 우울하고 초췌해 보인달까.
‘사람한테 말 걸기 전에 긴장되는 거랑은 좀 다른 느낌인데?’
하지만 다른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 이제 슬슬 춤을 출 시간인가.’
나는 목뒤가 뻣뻣해진 것을 느끼며 심호흡을 했다.
아까와는 공기가 확연하게 다르다. 설레고 들뜬 분위기.
주변을 둘러보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는 영애.
제 청이 받아들여지자 쑥스러워하는 영식.
긴장한 게 역력하지만, 서로 눈이 마주치자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게. 내 일은 아니지만 꽤 보기 좋네.
갓 데뷔한 티가 나는 두 사람을 보다가, 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아아, 그러고 보니 나도 이제 상대가 있구나. 같이 춤을 출 사람.
‘약혼자니까 춤을 같이 추는 게 자연스럽겠지?’
여태까지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중간에 돌아가는 경우도 잦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때마침, 내가 영애들과 어울리는 동안 거리를 두고 있던 다미안 마탑주가 다가왔다.
낭만적이면서도 경쾌한, 처음 춤을 추는 연인들에게 딱 어울리는 춤곡이었다.
“저에게 영애와 함께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기꺼이요.”
그렇게 우리는 사뿐사뿐 댄스 플로어로 나갔다.
그런데 내 손을 잡은 다미안 마탑주의 손이 어쩐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마탑주님, 긴장하셨어요?”
“……단번에 알 정도로 티가 많이 납니까?”
“아뇨, 제가 아니면 모를 것 같아요.”
다미안 마탑주는 다행이라는 듯 얕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춤을 배우던 어릴 적 이후로 오랜만에 추는 것이라 조금 긴장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다미안 마탑주가 나와 만나기 전에는 딱히 사교계 활동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미안 마탑주와 춤을 추었다는 영애가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혹시 제가 마탑주님의 첫 춤 상대예요?”
“그렇다면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뇨, 문제 될 건 없지만.”
나는 살짝 숨을 들이켰다. 세상에나, 진짜 내가 첫 춤 상대잖아.
아무래도 첫 춤 상대는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첫 춤은 무조건 가족이나 친척, 그게 아니라면 결혼할 상대와 추는 게 보통이니까.’
사실 나도 데뷔탕트 이후 첫 춤을 폴리우스랑 출 뻔했다.
“폴리우스? 어디 가는 거예요?”
“멜라니, 잠시만 기다려! 내가 지금 가서 도와줘야 할 것 같아!”
그때 폴리우스가 드레스에 와인이 엎질러진 다른 영애를 챙긴다고 가 버리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하지만 곧 돌아온다던 폴리우스는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도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결국 데뷔탕트에서 어떤 사람과도 춤을 추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멜라니, 아무래도 폴리우스와 첫 춤을 추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버지……”
나 때문에 데뷔탕트가 끝나지 않도록 막을 수도 없는 노릇.
나는 결국 약혼자를 두고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아버지와 춤을 추는 것을 택했다.
사실 그때 아버지가 같이 계셔 주지 않았더라면 더 큰 문제였을 것이다.
사상 최초로 데뷔탕트에서 누구와도 춤을 추지 못한 영애가 되거나, 약혼자를 두고 다른 남자와 춤을 춘 몰상식한 영애가 될 뻔했으니까.
사교계 데뷔를 하면서 그런 스캔들까지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미안해, 멜라니. 그녀가 너무 울기에 휴게실까지 가서 달래 주고 왔어. 이해해 줄 거지?”
“네…… 물론이죠.”
하지만 내가 어떤 수군거림을, 어떤 동정 어린 시선을 받았는지도 모르면서 다음 날 본 폴리우스는 착하게 웃기만 했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모른다.
왜 내 데뷔탕트를 엉망으로 만들 셈이었냐고 화내기는커녕 순순히 괜찮다고 대답했으니까.
적어도 괜찮다는 말이라도 내뱉지 말지 말든가.
트라우마가 생겨서 아버지가 아니면 춤을 잘 추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버렸으면서.
‘여태까지는 늘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빠지곤 했는데.’
방금까지만 해도 내 눈앞의 사람이 나를 두고 가 버릴 것 같다는 공포감이 엄습해 오니까……
그래도 약혼자를 두고 도망가서는 안 되겠지.
나는 이를 앙다물었다. 아무리 내가 떨려도 처음으로 춤을 추는 다미안 마탑주만 하겠는가.
“하지만 대표님도 무도회에는 잘 참석하지 않으셨다고 하니……”
“아뇨, 괜찮아요. 마탑주님도 긴장될 테니까 제가 같이 있어 드릴게요!”
춤이 얼마나 떨리는지 아는 나니까 같이 있어 주고 싶었다.
‘내가 리드하는 수밖에 없어. 그래도 공작저에서는 꾸준히 춤을 연습했었잖아.’
나는 마탑주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저만 믿으세요, 마탑주님.”
사실 나도 다른 사람과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건 처음이지만 말이야!
‘나도 처음이라고 말하면 다미안 마탑주님이 당황할 게 뻔해.’
후, 나는 눈을 조금 빠르게 깜빡거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가뜩이나 폴리우스와 있었던 일로 긴장이 되긴 해도.
다미안 마탑주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줄 수 있다면. 이 정도쯤이야.
‘다미안 마탑주가 내 발을 밟는다면 좀 아프긴 하겠지.’
그래도 높은 구두 굽은 아니니 다행이잖아?
“네, 영애만 믿겠습니다.”
다미안 마탑주는 이를 앙다문 내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마탑주님이 아까보다는 긴장이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네.’
상대가 웃으니 나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댄스 플로어에서 서서도 다미안 마탑주는 나를 보며 머뭇거릴 뿐, 먼저 움직이지는 못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고는 잡고 있던 다미안 마탑주의 손을 끌어당겨 내 허리에 얹었다.
그가 조금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나는 일부러 경쾌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자, 시작하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