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이제 폴리우스와 전혀 연관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 기분을 알아주는 건지, 다미안은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 말을 받았다.
“하아, 마탑주님이야말로 고생 많으셨죠.”
기쁜 소식도 잠시 우리는 곧장 사업에 관한 일에 몰입했다.
하리미네스 주간 이후 에어컨과 선풍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더 커졌다.
특히나 제국의 귀족들은 황후가 클로틸트 공작저에서 홈시어터와 에어컨을 동시에 이용했다는 것에 흥미를 가졌다.
“황후 폐하처럼 홈시어터에 에어컨을 틀면 좋겠어요! 아무리 제국의 여름이 선선한 편이라지만, 가끔 더울 때가 있는데 잘되었군요!”
홈시어터처럼, 다른 사람들은 쉽게 가질 수 없다는 것에 매력을 느낀 것이다.
어느새 홈시어터를 설치한 귀족들은 에어컨 역시 구입하는 걸 세트처럼 취급했고, 명품처럼 자신을 과시하는 것처럼 되었다.
‘조세핀 잉그다가 바라던 걸 내가 이뤄 버렸네, 프리미엄 라인.’
에어컨은 날이 추워지면 응용해서 난방 쪽에도 손댈 수 있을 듯했다.
다미안과 마법 아티팩트를 보완할 방법을 고민하는데 검은 달 직원이 우리를 찾아왔다.
“영상 구독을 24개월 약정으로 끊으면 선풍기를 증정한다고 하니, 최근 가입자가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선풍기가 영상석의 새로운 고객 유치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보고였다.
“24개월 전에 해지하면 큰 위약금을 문다는 것도 넣었지?”
“네, 잘 보이게 넣었습니다.”
그리고 내 달라진 위상은 뜻밖에도 마탑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가장 잘 느낄 수 있었다.
“어머, 클로틸드 영애께서 오셨다고요?”
짬이 나서 간만에 참석한 연회에서,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달랐던 것이다.
“클로틸드 영애. 저는 네제베 남작가의……”
“아니. 제가 먼저 말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호기심과 동경에서부터, 함께 사업을 하자고 달려드는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모두 긍정적인 신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폴리우스에게 벗어나고 황후 폐하와도 인연이 생기자, 사교계에서도 나에 대한 이미지가 바뀐 것이다.
‘폴리우스에게 매달리는 멍청한 악녀’에서 ‘약혼자가 바람피운 불쌍한 영애’ 정도가 되었었다면, 이제는 내 능력이 좀 더 부각된다고 해야 하나.
사실 불쌍하다는 이미지는 동정을 사기에는 좋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능력 있는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으니 잘된 일이었다.
“에어컨 이야기, 저는 못 들었는데 혹시 다시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제는 바쁘거나 체력이 안 돼서 못 가는 거지, 전처럼 폴리우스와 엮일까 봐 두려워 연회를 피할 이유도 없어졌다.
연회에 자주 참석하다 보니 나에게 이런저런 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잉그다 영애가 사교계에서 군림할 때는 눈치 보여서 다가오지도 못하더니, 이제야 친해지겠다고 접근하는 꼴이 제법 웃겨요.”
“흥. 하르미네스의 날개가 되고, 잘나가던 사업이 더 잘되고 있어서 그렇겠지.”
……라고, 두 사람이 분석해 주었다. 내 소꿉친구인 스칼렛과 클라라 마르티스 영애다.
‘언제 내 옆에 온 거지?’
스칼렛은 팔짱을 낀 채 턱을 치켜들고 있고, 마르티스 영애는 내 옆에 착 달라붙은 채 다가오는 영애들을 째려보고 있다.
사실 두 사람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휴…… 내가 진짜 예전부터 너와 친구였다는 걸 잊으면 안 돼. 알았지?”
나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을 보며 스칼렛은 영애들을 경계했고.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인 폴리우스를 없앤 건 클로틸드 영애잖아요. 날 책임져야 해요!”
폴리우스와 헤어진 이후로도 마르티스 영애는 나에게 자꾸 알짱거렸다.
같이 폴리우스에 대한 복수심으로 뭉친 것까진 좋았는데, 그 이후로도 왜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다.
‘내가 책임을 왜 져야 하지……?’
이해하긴 어렵지만 폴리우스에게서 탈출했다는 점에서 동지애가 생긴 모양이었다.
이상하게 자꾸 언제 시간이 나느냐고 물어본다든가, 몸이 안 좋으면 내가 공작저에 가겠다든지 하는 말을 하곤 하니까.
폴리우스 건으로 도움받은 것도 많고,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몇 번 만나기는 했는데.
그게 스칼렛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늦게서야 친해지겠다고 하는 건 마르티스 영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엄연히 다르죠. 저는 클로틸드 영애가 사업으로 성공하기 전부터 둘이서 만나 남들에게는 절대로 하지 못할 이야기를 했다고요!”
마르티스 영애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제 인생이 바뀌었지요!”
“아, 아니. 무슨 인생까지 바뀌어…… 멜라니, 저 말이 진짜야?”
당당한 마르티스 영애의 말에 스칼렛이 당황하며 물었다.
“음……”
나는 마르티스 영애가 한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둘이서 남들에게 못 할 이야기를 하긴 했지.’
어떻게 폴리우스의 이복형과 만날 수 있느냐며 따지러 왔으니 말이다.
‘인생이 바뀌기도 했고.’
원래 원작이라면 폴리우스를 쫓아다닐 어장 속 물고기였을 텐데, 나를 만난 뒤로는 오히려 폴리우스를 털어먹었으니까.
‘분명 맞는 말이긴 한데……’
내가 부정을 하지 않으니 마르티스 영애의 광대가 점점 실룩실룩 올라갔다.
반대로 스칼렛은 한껏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그,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멜라니랑 지낸 세월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걸요. 영애도 나에 비하면 갑자기 멜라니와 친하다고 하는 거예요. 다른 영애들이랑 비슷하다고요!”
“윽. 하지만……”
“마르티스 영애는 다른 친구 없어요? 그 친구들이랑 가서 놀지 그래요?”
“…….”
마르티스 영애는 참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아까처럼 곧장 받아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티스 영애는 곧 울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친구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안 만나요. 폴리우스한테 조금만 안 좋은 소리를 해도 제가 화냈거든요.”
그것참…… 안타까운데……
옆을 힐긋 보니 스칼렛도 나처럼 아연해진 표정이었다.
“아니, 그러게 왜 그런 놈한테.”
그러나 그것도 잠시, 스칼렛은 다시 클라라에게 날을 세웠다.
“전 마르티스 영애가 별로거든요? 멜라니랑 친하면 나랑도 친해져야 하는데 전 마르티스 영애랑 친구 하기 싫어요!”
스칼렛, 네가 생각해도 그건 좀 유치하지 않아?
내가 어이가 없어서 스칼렛을 쳐다보니 본인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헛기침을 하는 게 보였다.
“여하튼, 저번에는 다른 영애들이 멜라니 욕하니까 잠깐 편먹었던 거고. 저는 마르티스 영애랑 친해질 생각 없어요.”
나중에 듣기로는, 하르미네스의 날개가 되었을 때 스칼렛이 내 편을 들었다가 역공당하자, 마르티스 영애가 끼어들어 함께 막아 주었다고 한다.
나에 대한 여론이 뒤집히는 데 가장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이 두 사람인데……
“저야말로 친해질 생각도 없어요!”
마르티스 영애는 눈에 힘을 주었다.
“저는 클로틸드 영애랑 동지애가 있단 말이에요! 스칼렛 유포나 영애야말로 무난하게 친해졌으니 무난한 우정이고 정말 재미없네요! 우리 둘에게는 엄청 파란만장한 사연이 있거든요?”
“그럼 파란만장한 인생이나 마저 살러 가세요! 멜라니를 이름으로도 못 부르는 사이면서 친한 척은!”
“윽!”
마르티스 영애가 밀리다니……
그 잉그다 영애에게 대놓고 들이받고, 평민이라 무시하는 영애들에게 전혀 주눅 들지 않았던 사람이.
마르티스 영애는 풀이 죽어서는 나를 돌아보았다.
꼭 얼굴 뒤에서 처진 귀 같은 게 아른아른하는 환상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클로틸드 영애…… 저랑 영애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허락 못 받을 사이에요?”
“아니, 별로 상관없긴 한데.”
“그렇죠? 멜라니, 나도 이제 클라라라고 불러도 돼요!”
내게 이름을 허락받은 마르티스 영애…… 아니, 클라라는 갑자기 훅 들어왔다.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유포나 영애보다 더!”
클라라가 나한테 답삭 안기고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스칼렛이 기겁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내가 왜 마르티스 영애 당신을 싫어하는지 알아? 멜라니의 가장 옆자리를 차지하려는 것 같아서야!”
“가장 좋은 걸 차지하려는 게 뭐가 나쁘죠? 영애는 재미없게 도전도 안 해 보고 순응하는 인간인가 봐요?”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는 두 사람을 중재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기…… 둘이 사이좋아 보이는데……”
“뭐라고?”
“전혀 아니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