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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80)화 (80/90)

<80화>

그건…… 에잉턴 영지 쪽에 새로운 물길을 만들자고 한 사람이 나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 꼭 두 사람은 나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보듯 다정하게 보고 있었다.

“그 애가 어머니는 일찍 죽고, 아버지는 그 모양이고…… 외조부인 우리도 할 말 없고.”

“…….”

“가족과도 가까이 지내지 못한 아이잖아요.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닫은 거 같아서 걱정했는데.”

“다미안이 가장 먼저 마음을 연 사람이 영애같이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 다행입니다.”

다미안이 내 앞에서는 한결 누그러지더라, 소문과는 영 다른 사람 같더라.

같이 일하는 걸 보면 관심사도 비슷한 것 같은데, 영애 같은 사람을 만나다니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두 사람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오늘 본 영애를 두고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겠어요.”

그래서. 이런 분위기에 차마…… 진실은 말할 수 없었다.

파혼을 염두에 두고, 계약으로 만난 사이라고 말이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나는 이어지는 말에 그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한 건 짧은 대답뿐.

내가 한 말보다 두 사람이 한 말이 훨씬 더 많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성의가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태도.

하지만 에잉턴 후작 부부는 나를 전혀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았군요.”

“아아, 괜찮습니다.”

“소문에는 굉장히 아프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군요.”

에잉턴 후작이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오늘은 정말 고마워요. 면목 없지만 혹시 나중에 다미안하고 함께 한 번 다시 와 줄 수 있을까요. 다음에는 더 열심히 준비해서 제대로 대접할 테니 말입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다미안과 함께 또 방문하겠다고 했다.

다음에 어떻게든 다미안 마탑주만 에잉턴 영지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하기도 하지 않은가.

“그리고 다미안도 다미안이지만, 영애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사업이 잘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건강이 우선이잖아요.”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결국 짤막한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 * *

벨데르트 백작저로 다시 돌아오는 길, 다미안은 멜라니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영애가 아니었더라면 두 분께서 마음을 바꾸지 않으셨을 겁니다.”

“아니, 전 한 것도 없는데요……”

사실 에잉턴 후작 내외가 왜 마음을 바꾼 건지는 모르겠다.

당시 두 분은 나중에 가서는 울컥해서 쏟아 낸 거다…… 라고 덧붙였다.

“솔직히 다미안 마탑주님이 희생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다 엎고 손목 잡아채서 나올까 했어요.”

“꼭 결혼식에서 신랑을 빼앗는 신부 같군요.”

“오, 저 박력 있었나요?”

“호쾌하셨다고 해 두죠.”

고개를 갸우뚱하던 멜라니는 곧 볼을 긁적이며 마차에 몸을 기댔다.

오늘 일은 골치 아팠으니 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잘 끝났으니 됐다는 표정이었다.

이제 다미안은 그녀의 얼굴을 조금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충동적인 것 같은데 똑똑하고, 치밀한가 싶으면 귀여운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너무 연약해 보여.’

다미안은 멜라니를 예측하기를 포기했다. 들여다볼수록 잘 짐작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미안…… 아니, 마탑주님은.”

“그냥 다미안이라고 부르시죠. 아까처럼.”

멜라니의 눈이 순간 크게 뜨이더니, 아이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 그럴까요. 그럼. 하긴 약혼한 사이에 꼬박꼬박 호칭으로 부르는 것도 웃기긴 하죠.”

그러더니 덧붙였다.

“어쨌든 계약 약혼이어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진짜처럼 보여야 하는데 말이죠.”

그 말은 조금 다미안을 찔렀다.

그래, 두 사람은 언젠가 헤어져야 할 사이였다. 진짜 약혼한 사이가 아닌 것이다.

“음, 그럼 마탑주님. 아니, 다미안도 저를 이름으로 부르세요.”

멜라니의 보랏빛 눈동자가 햇살을 받아서 보석처럼 빛났다.

오묘한 보랏빛의 색깔, 어느 순간부터 다미안은 이 색을 굉장히 좋아하게 되었다.

“멜라니, 라고.”

그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다미안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제게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한 사람은 멜라니가 처음입니다.”

“오오, 대단한 영광입니다.”

멜라니가 장난스럽게 받았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의지 되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잃을까 봐 초조해지고.

걱정되고, 계속 생각나고.

‘왜 헤어지기가 싫지……’

조금 위험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어머니와 헤어졌을 때의 상실감을 또 느끼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을 더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 벽을 세워 왔는데.

“…….”

멜라니의 얇은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눈앞의 여자는 강인한가 싶으면 또 때로는 너무 연약해 보였다.

‘왜 자꾸 신경 쓰이지.’

계약 약혼일 뿐인데 계속 잘해 줘서?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달리 계속 의외의 모습을 보여 줘서?

뚜렷하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멜라니의 장점을 꼽자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계속 다미안의 마음을 흔들었다.

자꾸 눈으로 좇게 되고,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고.

계약 약혼이라고, 감정이 섞일 일은 없을 거라며 시작했는데 이제는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제가 본 마탑주님은 굉장히 너그러우신 분인데 저한테 너그러우신 것만큼 본인한테 너그러우시면 안 될까요?”

왜 너그럽겠어,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렇지.

“저는 마탑주님이 참 좋거든요.”

다미안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배시시 웃던 멜라니의 모습은 계속 아른거리며 정신을 어지럽혔다.

‘어떡하지,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데.’

다미안은 폴리우스 같지 않았다. 좋아하는 게 넘쳐 나지도, 금방 흥미를 잃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할 때도 신중하고 몇 번이나 생각해서 고르는 편이었다.

즉흥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벨데르트 가문을 뛰쳐나왔을 때도, 마탑주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도, 성공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든 해냈다. 몇 번이나 실패한대도 다시 도전할 마음이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 마음은 원한다고 해서 정리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얻어야 할 텐데.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부모가 보여 준 결혼 생활, 사랑이라는 감정놀음 따위가 부정적으로 일렁였다.

자신이 사랑을 해도 되는 사람일까. 아니, 그 전에…… 멜라니는 자신을 좋아할까.

나를 왜.

나 같은 사람을 왜?

멜라니처럼 눈부신 사람이 왜.

* * *

벨데르트 영지민은 요즘 들어 굉장히 힘들었다. 이제 버티는 것도 한계였다.

“백작님이 정말 협상을 하실 수 있을까?”

“이번은 잘 넘긴다고 해 봤자…… 언제 또 물길을 막을지 모르잖아.”

“협상에서 그런 걸 상의하는 거 아니여?”

“상의하면 뭐 해. 또 깰 수 있는데.”

“그래, 물 문제로 넥크스 놈들이랑 한두 번 싸웠나.”

영지민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는 영주를 믿어야 하는데, 믿음이 하나도 안 갔다.

힘든 상황에서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세금이나 더 걷어 대니.

“어디서 물이 안 떨어지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있어?”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콰과광!

누군가 강을 가리고 있던 산의 얕은 자리를 폭발시키더니 강의 물길을 끌어온 것이다.

굳이 가까운 이웃 영지를 통하지 않고 말이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영지 전체에 들릴 정도로 엄청난 굉음이었다.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모두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제 세상이 망하는 거야?”

“비도 안 오더니…… 진짜 벨데르트 영지를 신께서 버리셨나?”

응, 안 버렸다.

가신이 보낸 사람들은 영지민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미안 도련님께서 새로운 물길을 뚫고 계십니다!”

“뭐라고요? 그게 가능해요?”

사람들은 허겁지겁 걸음을 옮겼다. 그게 사실이라면 하루빨리 흘러들어 오는 물을 보고 싶었다.

이 굉음이 세상이 망하는 게 아니라 물길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아……”

그러나 정말 물길을 뚫는 것이 맞을까. 다른 재앙이 닥쳐오는 게 아닐까.

두려움 반, 설렘 반의 심정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막상 쏟아지는 물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콰과광-

시원한, 아니 과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쏟아지는 물길.

혹독하게 말라붙은 땅을 거침없이 가르고 들어오는…… 생명수.

‘정말 우리 영지에 새로운 물길이 생겼단 말이야?’

더 이상 넥크스 영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 새로운 물길이……?

사람들은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당했다. 어떤 말도 섣불리 꺼낼 수 없었다.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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