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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81)화 (81/90)

<81화>

“아빠…… 우리 이제 농사지을 수 있어요?”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어린아이였다.

아이가 몇 번이나 부르고서야 아이의 아버지는 그 소리를 들었다.

“아빠, 아빠.”

“응?”

“물이 왔잖아요. 이제 걱정 안 해도 돼요?”

아이의 아버지는 멍해진 머리로 생각했다.

“응……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말라붙은 밀밭과 채소에도 물을 줄 수 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더 이상 물 때문에 곤란을 겪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탑주님께서 새로운 물을 뚫으셨다!”

“다미안 도련님이 우리를 구하러 돌아오셨어!”

사람들은 뒤늦게 열광했다. 목소리를 높이고 환호성을 질렀다.

다미안의 이름을 몇 번이고 연호했다.

벨데르트 백작과 폴리우스는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찬사였다.

“…….”

물길이 잘 뚫렸는지 확인하러 왔던 다미안은 사람들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 앞에 나서서 자신이 한 일이라고 생색을 내지도 않았다.

그저 먼 거리에서 아무런 말 없이 기뻐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물을 확인한 후 기뻐하는 농부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노인도, 신기한 광경이라며 구경하러 온 관광객도.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늦은 밤까지.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

멜라니는 가만히 영지민을 바라보고 있는 다미안의 옆에 섰다.

그가 어둑한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온 참이었는데……

‘지금 이 상황을 내가 깨뜨려도 될까?’

옆에서 힐긋 올려다본 바로는, 담담해 보였다. 다미안 특유의 차분하고 담담한 분위기.

하지만 그 붉은 눈동자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그 일렁이는 빛깔이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멜라니도 알 수 없었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아니, 말을 하는 게 맞는 걸까.

그냥 이대로 다미안의 상념을 방해하지 말고 떠나는 게 나을지 모른다. 어쭙잖은 오지랖이 될 수도 있으니.

‘생각이 복잡하겠지.’

가문의 성도, 후계자 자리도 필요 없다며 뛰쳐나간 고향.

그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어쩌면 다미안이 평생 썼을 마법 중 가장 보람찼을지도 모르는……

다른 마법사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마탑주인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마법.

‘영지민들은 오늘의 일을 기적이라고 불렀지.’

멜라니는 다미안이 아니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다미안 본인도 모를지 모른다.

그래서 멜라니는 결국.

“고생했어요.”

그 한마디만을 했다.

오래 밤바람을 맞는 게 걱정되지만,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는 게 힘들지 않은지도 신경 쓰이지만.

자신이 더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말을 끝으로 그냥 물러나려고 했는데……

“멜라니.”

뜻밖에도 다미안이 그녀를 불렀다. 멜라니는 돌아섰던 몸을 멈추고 다시 그를 보았다.

“저는……”

그러나 다미안은 자신이 불러 놓고도 그 사실이 어색한 것처럼 굴었다.

다미안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멜라니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말을 기다렸지만 결국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라……?’

서툴게 웃었을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그 후에 나온 담백한 한마디.

평소에 이따금씩 멜라니의 앞에서는 웃었던 그였지만, 지금은 생전 얼굴 근육을 움직여 보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멜라니는 그의 어색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그리고 일이 끝난 후에야 폴리우스는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뭐, 다미안이 물길을 뚫었다고?”

“그렇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마, 마법으로 하셨다고 하던데요.”

“지금 다미안이 마법사라고 나 무시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애꿎은 하인은 폴리우스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할까 벌벌 떨었다.

영지에 있던 어린 시절에는 다정하고 상냥했던 분이라고 입을 모아 칭송했던 때가 있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변한 것은.

“됐다. 너 같은 멍청한 놈이 뭘 알겠어. 내가 직접 보러 가는 수밖에!”

그리고 직접 새로 난 물길을 목도한 폴리우스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아니…… 내가 내내 영지에 있었는데 다미안이 이런 짓을 하는 걸 몰랐다고?”

하필 세간의 풍파를 피해, 영지를 돌보자며 내려와 있던 차였다.

하지만 자신은 끙끙대던 문제를 다미안이 순식간에 해결해 버리다니, 이러면 자신은 뭐가 되는가.

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걸 아버지가 알게 되면, 영지민이 알게 되면……’

그럼 여태까지 자신이 해 왔던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가뜩이나 어머니의 혈통이 밀려서 후계자 되기에 불리한데!

기껏 영지에 내려와 영지를 돌보려고 했더니, 그것도 참지 못하고 문제 해결을 빼앗아 버려?

이제 다미안은 사업뿐만이 아니라 영지민을 생각한다는 명성까지 얻게 된 것이다!

“재수 없는 자식! 세상이 다 자신의 것 같겠군!”

폴리우스는 신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생각만을 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자신이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영지민들이 더는 고통스럽지 않아서, 그들이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나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런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차라리 다미안 놈이 물길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러면 여태까지 해결하지 못한 나와 아버지가 더 무능해 보이잖아!’

폴리우스는 서둘러 돌아섰다. 그리고 자신이 쓴 후드를 더욱 좁게 여몄다.

방에 처박히고 싶은 기분은 전혀 아니었지만, 영지민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볼지 두려웠다.

다행히 돌아서는 길, 폴리우스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한데……

“더는 넥크스 영지 놈들에게 굽신거릴 필요 없겠구만!”

“어이쿠야, 내 속이 다 시원하네!”

“물줄기 때문에 싸운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지요. 어휴, 지긋지긋한 놈들.”

영지민이 물길을 두고 하는 소리는 자연스럽게 들렸다.

“다미안 도련님 같은 분을 내쫓다니. 벨데르트 백작은 제정신인가?”

“가출하신 거 아니야?”

“아니, 그게 그거지! 잘해 줬으면 집을 뛰쳐나왔겠느냐고!”

폴리우스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사업을 말아먹어서 돈을 뜯어 가야겠다는 누구랑은 참 비교되네. 허허, 누구는 세금을 더 걷고, 누구는 물길을 터 주고!”

“역시 본부인의 자식은 다르지. 암. 불륜을 저질러서 태어난……”

폴리우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영지민이 떠드는 소리가 벌이 윙윙대는 소음처럼 들렸다.

‘지금…… 이 자식들이 무슨 말을……’

마음 같아서는 감히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자신의 사업이 잘되면 벨데르트 영지에도 좋은 일 아닌가. 사업이 꼬인 것도 다 다미안 놈 때문인데!

후드를 여민 손에 힘이 풀렸다. 아득한 분노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화를 내며 나서 봤자……

‘앞에서는 죄송하다 해도, 뒤에서는 또 사생아가 설친다고 욕하는 거 아니야?’

그렇다고 지금같이 불리한 상황에서 엄벌을 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처할 권한이나 있나?

아버지는 어느새 자신을 천덕꾸러기처럼 대한 지 오래고, 어머니는 일을 망치지나 않으면 다행.

자신을 잘 따르던 기사와 하인들도 슬금슬금 피하는 게 보이는데!

“젠장!”

결국 폴리우스는 몸을 돌려 백작저로 향했다.

하지만 거친 걸음걸이 때문이었을까.

“되는 일이 없어, 아오!”

물길이 생기면서 만들어진 흙탕물이 바지에 튀었다. 안 그래도 더럽던 기분은 더더욱 최악이 됐다.

“길 막지 말고 비켜.”

“그, 그게요. 도련님한테……”

폴리우스는 복도에 선 하녀에게 괜히 난폭하게 굴었다.

그러나 하녀는 자신에게 용무가 있는 듯 쩔쩔매기만 했다.

“뭐, 내 앞으로 편지가 왔다고?”

폴리우스는 바로 편지를 받아 들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가 함께 사업을 한 상대는 하필 조세핀이었다.

멍청하게도 황실을 건드려 오히려 사업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덕분에 요즘에는 폴리우스에게 아무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곁에 멜라니도 조세핀도, 클라라도…… 아무도 없기에 순수한 마음으로 위로받고 싶어 나간 모임에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은 돈이 없다든가. 사업 투자 같은 건 어렵다든가.

하지도 않은 이야기로 먼저 거절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영지에 내려와 아무하고도 연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빈정이 상한 건 물론이거니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편지라니?

‘혹시 뭘 갚으라거나, 문제가 생겼다거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폴리우스는 편지를 붙잡았다.

그러나 수신인을 확인한 그의 얼굴에 곧 안도감이 퍼졌다.

[언제나 네 편인, 헤네시아]

오랜만의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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