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 *
이내 두 사람은 숙소로 돌아왔다.
사실, 다미안은 멜라니의 생각처럼 담담하게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
멜라니의 얼굴이 벌게져서 어버버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다미안 역시 넋이 나가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이 이상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느라 심력을 모두 소모했다.
침대에 누워 다미안은 자신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내가 어쩌자고 그런 말을.’
인생을 지탱해 주는 존재가 멜라니라고, 그런 말을 해 버렸다.
숨기지 못하고, 꾹 눌러 담지 못하고 터져 나온 진심.
솔직한 감정이라 너무 진지하고 부담스럽게 들렸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한 번은 꼭 그 말을 하고 싶었다. 멜라니가 자신에게 있어 그런 존재라고 말이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은, 이성이 말리지 못하고 툭 튀어나온 말. 머리가 아니라 심장이 내뱉은 말.
‘정말이지……’
다미안은 거듭해서 마른세수를 했다.
사실 멜라니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도.
이 감정을 어찌해야 하나 생각했을 때도.
이렇게 갑자기 커진 마음을 보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냥…… 하나씩 차근차근 자신을 좋아하게끔 한다거나. 조심스럽고 안전한 방법이 있었는데.
‘아니, 나를 좋아하게 한다는 건 또 어떻게 하는 거지?’
멜라니같이 대단한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게 할 방법 같은 건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사랑이라는 건 사람에게 자신감을 몽땅 빼앗아 가는 감정인 것 같다.
항상 멜라니만 생각나고. 멜라니의 눈치만 보게 되고.
어디 가서 남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의식하며 말과 행동을 한 적이 없었는데.
벨데르트 가문을 뛰쳐나온 뒤로 항상 자유롭게 살았는데.
꼭 자신이 약자라도 된 것처럼……
‘아니, 약자는 맞지.’
멜라니는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자신은 멜라니를 좋아하니까.
“…….”
머리가 붕 뜨고 정신이 몽롱한, 이성을 앗아가 버리고 한껏 감정적으로 변하는 이런 제 모습이 싫었다.
부모님의 평탄하지 못한 결혼을 보고도 학습 효과가 없었나.
‘사랑놀음 같은 거 정말 질색인데……’
하지만 감정을 정리하려고 해도 잘 안 됐다.
끝없는 좌절을 겪었다가도 어느 순간 멜라니의 말 한마디에 날아갈 것 같고.
오늘만 해도, 멜라니가 좋아하는 다트로 딴 경품을 안겨 주니까 기뻐서……
그래, 그 커다란 토끼 인형.
인형 같은 건 사실 관심도 없고, 요란한 색상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서.
보통 때의 자신이라면 절대 좋아할 리가 없는 물건인데.
그런데 좋아.
멜라니가 준 거라서 좋아.
멜라니랑 닮아서 좋아.
다미안은 어린아이 시절에도 가지고 놀아 본 적이 없는, 연보라색 토끼 인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미안에게 있어 취미란, 특별한 이득이 없어도 흥미만을 위한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다.
“사실 저도 뭐라 할 만한 건 아니네요. 평소 취미였던 연극이나 영화 보기도 이제 일에 포함되었으니까요.”
멜라니도 다미안처럼 취미를 만들어야 한다면……
‘그렇다면 그 새로운 취미가 나였으면 좋겠어.’
멜라니가 오늘, 다미안에게 함께 놀러 가자고 말했으니까.
그렇다면, 멜라니도 소중한 시간을 자신에게 쓴다는 거니까.
‘나도 그녀에게 취미가 될 수 있을까.’
사업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일과 연결되지 않아도 그저 자신을 만날 때 즐거워서 꾸준히 만났으면 좋겠다.
한두 번 어쩌다 같이 놀러 가는 거 말고. 그냥 계속 만나서 시간을 보냈으면 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생전 처음 겪는 이 생소한, 자신을 다 뒤흔드는 이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멜라니도 자신을 좋아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 * *
그리고 그 시각, 멜라니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숙소에서 뒤척이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행입니다. 제가 무너지지 않고 인생을 지탱할 이유가 있어서요.”
멜라니는 그 말을 듣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뒤,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다미안을 외면한 채 앞장서서 걸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숙소로 돌아오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미쳤어. 다미안한테 들키지는 않았겠지? 내 얼굴 봤으면 안 되는데!”
침대에 누운 멜라니는 여태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매만졌다.
‘아, 아니. 다미안. 나한테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기껏 엄청나게 뛰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킨 참이었단 말이었는데.’
제 귀에 괜히 이상하게 들린 거라고, 다미안이 하려는 말의 의도와는 다른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려 했는데.
‘왜 꼭 나라는 인간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처럼 말하는 거야? 우리는 계약 약혼에 불과한 사이잖아!’
베개에 머리를 꾹꾹 눌러 봐도.
자신을 닮아서 그 커다란 인형을 소중히 보관하는 거나. 심지어 그 포장지까지 갈무리하는 건.
꼭 긍정적인 결말이 아닐까 상상하게 되어 버린다.
‘정말 그렇게 될까?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고?’
폴리우스와 만났을 때도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대단히 비이성적이었다.
‘지금 이 감정도 나중에는 후회하게 되면 어떻게 하지.’
다미안은 별생각도 하지 않는데, 그저 친절 한 조각에 허우적거리는 거면 어떻게 하지.
그에게 이 감정이 들켰다가 어색해지면 어떻게 하지.
‘우리는 검은 달의 대표고,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데. 다미안이 내 감정을 알고 날 피하게 되면 어쩌나?’
멜라니는 괜히 싱숭생숭한 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처음 약혼하자 말했을 때, 냉정한 다미안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해 봤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다미안으로만 머리가 가득 차서, 생각은 생각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뻗어 나갔다.
행복한 상상이든, 비극적인 상상이든 극단적으로만 치달아서 객관적인 생각이 잘 안 됐다.
결국 멜라니는 잠을 설치고 말았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환한 햇빛을 보며 탄식했다.
결국 잠은 거의 자지도 못하고 중요한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와…… 몸 상태 정말 거지 같아.’
다미안에게 마법 아티팩트와 약혼반지를 받은 이후로는 그의 마력 때문인지 컨디션이 꽤 괜찮았지만……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더니 몸이 지독하게 무거웠다. 눈을 뜨는 게 힘들었다.
정말, 오늘 성녀를 만나는 날만 아니었더라면 종일 침대에서 끙끙거리며 누워 있을 거다.
하지만 그 점이, 아이러니하게도 내 이성을 찾아 주었다.
‘그래, 사랑이고 뭐고. 어색해지는 미래고 뭐고. 이런 몸 상태로는 아무것도 못 해.’
내 성격이니, 다미안의 감정이니. 서로 마음이 통하느니 안 통하느니 헤아려 볼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몸이 나아야 데이트라도 한 번 더 할 거 아니야.”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잠을 잘 자지 못했더니 속이 울렁거리는 데다 시야가 자꾸 핑핑 돌았다.
일정을 취소하게 생겼으니 상대에게 말해야 했다.
“멜라니, 안녕히 주무셨……”
“아뇨, 잘 못 잤어요. 미안해요.”
나는 결국 다미안에게 내 상태를 알렸다. 오전에는 나가지 못할 것 같다고.
그리고 1층에 내려온 김에 숙소의 직원에게 추가로 물을 주문했다.
그 뒤, 최근에는 한동안 먹지 않았던 강한 진통제를 털어 넣었다.
예비로 가지고 다니던 거지만, 다시 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마어마한 두통과 울렁거림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지만, 동시에 팔다리가 저리는 부작용이 시작되는 게 느껴졌다.
손끝이 떨리는 건 진통제로도 막을 수 없는, 어릴 때부터 병이 가져다준 익숙한 모습.
하지만 꾹 참고 있으면 언젠가는 멎을 거라는 걸 경험상 알고 있었다.
‘어제는 다미안의 얼굴을 보면 아무런 말도 못 할 것 같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몸의 통증이 내 정신을 잡아 주었다.
“제가 어제 너무 무리했나 봐요. 보시다시피 몸 상태가 안 좋아요. 그런 주제에 같이 놀러 가겠다고 이야기했네요.”
내가 생각해도 대단히 침착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말투였다.
“죄송한데 저는 오후 1시까지 조금만 더 쉴게요. 다시 한번 미안해요.”
다미안은 나를 보고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어딘지 힘겨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최근에는 그래도 강한 진통제는 안 드셨던 것 같은데……”
“하하, 그러게요. 그렇게 됐네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다미안이 지금 걱정이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는데.
“멜라니. 그래도 제 마력이 효과가 있는 듯하니…… 잠시만 손을 주시겠습니까.”
“네?”
다미안이 내 떨리던 손끝을, 아니, 내 손 전체를 가져가 끌어당겼다.
그리고 나보다 마디 하나는 더 큰 손으로 안정적으로 감쌌다.
“어째서인지 제 마력을 담은 아티팩트와 약혼반지가 멜라니의 병을 약화시키는 듯합니다.”
“…….”
“앞으로는 진통제보다 저를 먼저 찾아 주세요. 말씀드렸듯, 멜라니는 제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용하셔도 괜찮습니다.”
진통제로도 어찌할 수 없는 떨림이 점점 멎어 갔다.
다미안의 목소리가, 나직한 울림으로 와닿았다.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기쁨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