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저에 관한 이야기요?”
사업 이야기를 밖에서 함부로 하기엔 검은 달의 규모가 너무 커져 버렸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하자는 게 이해는 가지만…… 내 이야기를 한다고?
“저희, 약혼한 사이지만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멜라니가 다트를 그렇게 잘 던지고, 하면서 신나 하는 것도 몰랐거든요.”
“으음……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니 막막한데요.”
“무엇이든 좋습니다.”
“어, 보라색 계열을 좋아해요. 그래서 다미안한테 약혼반지를 받았을 때 굉장히 마음에 들었어요.”
나는 다미안에게 약혼반지를 받았을 때의 감동을 떠올렸다.
객관적으로 대단히 아름다운 디자인인 데다, 마력석의 색이 내 눈과 꼭 같아서.
그 반지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던, 선선한 여름밤의 연회.
처음으로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와 추던 춤.
“아무래도 제 눈이 보라색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은데, 어릴 적에는 그래서 보라색이 들어간 걸 모으고 다녔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줄줄이 재미없는 이야기를 다미안에게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나야 뭐, 별로 상관없다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괴롭지 않나?
“……그렇다면 클로틸드 공작님께서 굉장히 많이 기뻐하셨겠습니다.”
“그러시긴 했어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 하나하나에 왜 맞장구를 쳐 주고 난리람.
“저라도 그럴 것 같군요.”
꼭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중간중간에 웃기까지 하고.
왜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안 보여 주는 모습을 나한테 보여 주느냔 말이야.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내 말에 대답하지 마!
‘진정해라. 설레면 안 된다.’
나는 다미안의 계약 약혼 상대다.
사업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다.
파혼을 약속하고 계약 약혼을 하게 되었는데, 괜히 내가 다미안한테 반하기라도 하면 득 될 게 없다.
“…….”
입맛이 씁쓸해지는 걸 느끼며 나는 맹물을 쭉 들이켰다.
매일 아픈 몸이라 카페에서 음료 하나 마음대로 못 먹는 주제에.
괜히 상대가 알게 되면 곤란한 감정을 시작하려고 하지 말라고.
그냥, 내일이면 성녀를 만난다는 거나 신경 쓰자.
“그런데, 다미안.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더 이상 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짐짓 여유롭게 말했다.
“여태까지 제 이야기를 했으니, 다미안도 본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아니에요.”
“제 이야기 말입니까?”
“말한 대로 사업 이야기 말고요. 아, 마법도 빼고.”
“마법은 왜……”
“그것도 일이잖아요, 사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여태까지 내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리 감정을 키우지 않을 상대라고 한들 이 정도는 물어봐도 되잖아.
‘이래야 공평한 거지.’
나는 팔짱을 끼고는 씩 웃었다.
“다미안. 왜 아무런 말도 안 해요?”
“하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좋아하는 색깔은요?”
“색은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 아, 저도 보라색 좋아합니다.”
보라색은 내 머리색이랑 눈동자 색이잖아.
나는 다미안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척 턱을 치켜들었다.
“똑같은 대답하기 금지예요.”
“음…… 어렵군요.”
“취미 같은 거라도 말해 봐요. 다미안은 일하지 않는 시간에 뭐 해요?”
“명상을 하며……”
음, 취미가 명상이었군.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마력을 잘 움직이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아니, 그럼 그것도 업무의 일환이잖아요! 마법과 전혀 관련되지 않은 취미 없어요?”
“…….”
“일 끝나면 뭐 해요?”
다미안은 내 눈치를 보다 느지막이 말했다.
“……마법과 관련된 일을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보통은 마법 수련을 합니다. 마법 아티팩트 개발과는 다른 분야의 마법도 꾸준히 연습해야……”
“그럼 사람이 지치지 않나요? 쉬는 날 없어요?”
“지치지 않기 위해서 운동을 합니다.”
“오, 마법과 전혀 상관없는 취미네요?”
어쩐지, 몸이 두툼한 게 운동을 전혀 안 한 것처럼 보이지 않더라고.
팔뚝은 또 어떻고. 저번에 딱 맞는 옷을 입었을 때……
크흠, 이러니까 내가 변태 같지만. 내가 보려고 한 게 아니라 이래저래 춤도 같이 췄고. 그래서 아는 거다!
“……그게.”
하지만 내 밝은 목소리와는 대조되게 다미안의 표정은 슬쩍 어두워졌다.
“마법이 화살이라면 마법사는 활입니다. 마법을 자유자재로 쓰기 위해서는 건강한 몸 역시 필요해서……”
“그럼 결국 그것도 취미가 아니잖아요!”
“죄송합니다. 멜라니를 상대로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안 해 주시는 건 감사하네요. 그런데 그럼 다미안은 아예 취미가 없는 거예요?”
다미안은 과거를 더듬듯 눈을 가늘게 떴다.
“취미라는 게 평소 흥미 본위만을 위한 일을 꾸준히 하는지가 기준이라면, 없는 것 같습니다.”
“와우.”
하지만 나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실 다미안더러 뭐라고 하긴 하지만, 최근에는 나도 너무 일에 매몰되어 있었거든.
“사실 저도 뭐라 할 만한 건 아니네요. 평소 취미였던 연극이나 영화 보기도 이제 일에 포함되었으니까요.”
나는 턱에 손을 가져다 대며 생각에 잠겼다.
“사람이 너무 일에만 매몰되면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해요. 뭐든 한 가지에만 매달리면 안 좋은 것 같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야 어떤 것에서 무너졌을 때 다른 것이 절 지탱해 줄 것 아니겠어요.”
나는 머쓱해하며 덧붙였다.
“뭐, 취미랑은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제가 인생을 폴리우스에게만 걸어서 그토록 휘둘렸던 거 아니겠어요?”
원작 소설에서 자세히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소꿉친구였던 스칼렛은 나를 말리다가 서서히 멀어졌던 듯하다.
“사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연극과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 같거든요.”
그게 아니라면 폴리우스를 벗어난 뒤 인생의 동력이 없었을 거다.
내가 그 말을 덧붙이자 다미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확실히 저는 가문을 뛰쳐나온 뒤로는 벨데르트 백작이 후회할 정도의 성공만을 위해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잖아요. 여생은 무엇을 위해 살 건가요?”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나는 귀족의 보편적인 취향인 승마나 사냥 따위를 제안했다.
하지만 다미안의 반응은 그저 그랬다.
“같이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예의 바르게 말했지만 별로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다.
‘취미의 필요성은 느꼈지만, 좀 막막해하는 것 같은데.’
하긴 사냥은 활 따위를 배워 봤자 마법 한 방보다 못할 테고, 낚시도 어찌 보면 다미안의 취미인 명상과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은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이 취미는 어떻고, 저 취미는 어떻고…… 사실 해 보지도 않고 식탁에서 취미를 정하는 게 쉽지는 않죠. 머뭇거리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것 같아요. 장점보다는 단점이 떠오르겠죠. 특히 다미안은 즉흥적인 성격도 아니고.”
“…….”
“그냥 별생각 없이 부딪쳐 보는 건 어때요? 사실 그렇게 했다가 이걸 왜 했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긴 한데. 저는 가끔 그렇게 망하는 것도 재밌더라고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미안이 즐거워 보였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다미안에게도 그런 취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바라요.”
“멜라니.”
“네, 왜 불렀어요?”
“아뇨, 멜라니와 함께 있을 때 즐거웠다는 뜻입니다.”
꼭 취미가 나라고 말하는 것 같네?
나는 다미안의 말에 굳었다가, 느리게 말의 뜻을 해석하며 어색하게 말했다.
“아아, 맞아요. 우리 지방에 내려갔을 때도 즐거웠었죠. 오늘도 저랑 있을 때 꽤 좋았나 보네요?”
침착하자, 침착해.
다른 의미가 아니라 나랑 같이 있던 순간이 재밌었다는 뜻이야! 착각하지 마!
“마법이나 사업과도 상관없는데 즐거운 것이라면, 멜라니입니다.”
자, 멜라니 클로틸드. 우리는 그냥 계약 약혼이야.
지금 다미안의 표정을 봐. 담담하기 그지없잖아.
나 혼자 들떠서 꼭 고백이라도 받은 얼뜨기처럼 굴지 말라고!
“아하하. 그럼 바쁜 일이 끝나면 오늘처럼 축제 보러 가거나, 다른 지방에 놀러 갈래요? 우리, 예전에 같이 여행 가자고 했었잖아요.”
나는 최대한 뚝딱거리지 않고 여유로운 척 덧붙였다.
“아, 물론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무리하면 안 되는 선에서만 놀아야 하지만요. 또 오늘처럼 맘껏 즐기지 못하고 쉬어야 하는 때도 생길 수 있긴 한데……”
“아뇨, 저도 바쁘고 무리하게 움직이는 일정은 별로입니다.”
다미안은 그 말을 하고서는 예쁘게 웃었다.
“저에게 함께 여행 가자고 한 약속, 잊어버리지 않으셨군요.”
“……그걸 잊어버리면 안 되죠.”
“저에게 함께 여행을 가자고 한 건 클로틸드 대표님이 처음입니다.”
그런 말까지 들었는데 말이야.
‘어라? 잠시만.’
나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내가 방금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혹시 내가 데이트 신청한 건가?
그때는 벨데르트 백작이 다미안은 쏙 빼놓고 폴리우스와 여행 간 것만 생각해서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예 목적이 없이 같이 놀러 가는 거잖아!’
나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다미안을 슬쩍 보았다. 하지만 다미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다미안을 보며 마주 웃어 버렸다.
다미안도 나랑 함께 있을 때 즐겁다잖아. 마법이랑 사업과도 상관없는데 즐거운 거라잖아.
그렇게 하하 호호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하면 표정 관리 잘했지. 적당히 잘 넘겼지, 라고 생각하려 했는데……
“취미의 필요성은 잘 알겠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게 성공이 아니라 다른 중요한 것이 있다면 멜라니인 것 같습니다.”
“…….”
“다행입니다. 제가 무너지지 않고 인생을 지탱할 이유가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