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원래 원작에서는 이 도시가 끝나다시피 하는데.’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신나게 노는 아이들이 넘어질까 걱정하는 부모. 열정을 다해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청년……
원작 소설에서는 변이 마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그리고 죽음의 도시로 유명해진 레이넨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긴다.
산 사람들도 결코 제대로 사는 기분이 아니었을 터.
‘이제 다미안이 왔으니 달라질 거야. 원작처럼 폴리우스가 헤네시아만 데리고 간신히 빠져나오게끔 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곰곰이 날짜를 헤아렸다. 원작에서 헤네시아가 변이 마물을 맞닥뜨린 건 축제의 마지막 날이라고 했다.
오늘은 첫째 날이니…… 아직 변이 마물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남는다.
“멜라니. 괜찮으시다면 함께 축제를 구경하지 않겠습니까?”
“어……”
그리 먼 거리는 아니어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마차에 오래 타지도 않아서 지치지도 않았다.
‘데이트 온 연인 콘셉트니까…… 응, 다미안하고 같이 노는 게 어울리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미안이 나보다 이 일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혹시 가고 싶은 곳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우선 걸으면서 생각할까요? 저기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네요.”
헤네시아에 관한 생각만 한 나머지, 오늘 축제 날이니 나 역시 놀 수 있다는 기대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와, 여기에 있는 건 다 재밌어 보이네요. 다미안은 뭘 좋아해요?”
“음……”
“골라 봐요. 행운 쪽지 뽑기, 유령 분장하기…… 어, 여기 다트 던지기가 있네요!”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저 다트 진짜 잘 던져요.”
전생에서 다트는 제법 많이 던져 봤다.
나는 뱅글뱅글 돌아가는 표적을 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제가 경품을 따면, 그건 다미안 줄게요.”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내가 하기로 한 다트 던지기는, 맞춘 표적들을 합한 점수로 경품을 받는 방식이었다.
‘맞히기 어려운 곳을 공략하는 게 중요하다 이거지.’
오랜만에 잡아 보는 다트. 기분 좋은 고양감이 몸을 감쌌다.
‘두 발을 엇갈리게 서고, 최대한 상체를 뺀 채로…… 다트는 너무 꽉 쥐지 말고.’
슉!
내가 든 다트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다트판에 꽂혔다.
“오오!”
“진짜 잘 던지는데?”
나는 이어 두 번째를 던졌다. 그리고 세 번째도 큰 망설임 없이 휙 날렸다.
“490점 이상만 지금 3개째 맞아?”
“마지막만 망치지 않으면 오늘 최고 기록이네!”
“495, 495, 490이야!”
구경하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내 실력은 녹슬지 않은 듯했다.
슉!
네 번째 다트를 던지자 또 한 번 환호성이 터졌다.
정중앙. 가장 높은 점수였다.
“와, 500점이 터졌어!”
나는 다트 던지기를 마무리하고 다미안에게 돌아왔다.
다트 관리인이 준, 최고 등급에게 주는 경품을 품에 안은 채로.
“다섯 번째 다트도 만점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네요.”
“지금도 충분히 잘했습니다.”
나는 뿌듯함에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크흠. 뭐…… 그래도 경품은 같다고 하네요. 자, 선물이에요. 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평소에 마탑주님한테 받은 게 많잖아요?”
나는 포장지에 쌓인 경품을 건넸다.
다미안은 조심스럽게 내가 건넨 물건을 받아 들었다. 이런 건 꼭 처음 받아 본다는 얼굴로.
“크기가 꽤 큰데. 뭘까 궁금하네요. 한번 지금 뜯어봐요.”
“알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으음, 아니다. 됐어요.”
다미안은 포장지까지도 선물인 양 한 자락 한 자락 매우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포장 벗겨 내다가 하루가 다 가겠네.’
나는 다미안이 구겨지지 않게 살며시 옆에 둔 포장지를 떨떠름하게 보았다.
“어?”
하지만 곧 포장지고 나발이고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경품이 뭔지 확인한 나는 후다닥 다미안에게 다가갔다.
“돌려주세요.”
“예? 주실 때는 언제고 왜 말이 바뀌십니까.”
“너무 귀여워서 안 되겠어요.”
그러니까…… 다트로 받은 경품은 귀여운 인형이었다.
연보라색…… 토끼 인형.
‘귀여워도 너무 귀엽다. 와, 정말 깜찍한데.’
나는 눈앞에 토끼 인형을 든 잘생긴 남자를 멍하니 보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토끼 인형 주제에 눈매는 은근 새침해 보이긴 한다.
하지만 그래 봤자잖아.
성인 남자에게 의기양양하게 준 선물이 토끼 인형이다……?
선물을 준다면 센스있는 걸 줘야지.
누구도 마탑주한테 귀여운 털 뭉치를 주지는 않을 거야!
“귀여운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그는 맨 처음에 건네받을 때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인형을 확인하고 이제 선물을 내 키가 닿지 않게끔 높게 올렸다.
나는 재빨리 팔을 쭉 뻗었지만 어림없었다.
“으아아, 다미안! 진짜 이러기예요?”
지금 나 말이야. 어른 앞에서 징징대는 꼬마 같지 않아?
나는 높게 든 발꿈치를 내렸다. 그리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하하,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데 체통 없는 꼴을 보일 수는 없지.
어른인 이상 대화로 해결하자고, 대화로!
“선물은 내가 나중에 더 어울리는 걸로 다시 사 줄게요.”
“저는 이것도 마음에 듭니다만.”
뭔 헛소리를 하고 있어.
“이렇게 귀여운 인형이 마음에 든다고요? 그런 취향이었어요?”
다미안은 서늘한 인상이고, 객관적으로 잘생겼지만 솔직히 귀여운 느낌은 거의 없다.
어렸을 때도 울지도 않고 태어났을 것 같단 말이야.
그런데 이런 인형을 안고 있는 걸 보니 정말 안 어울……
“네, 멜라니와 닮았습니다.”
“……?”
순간 얼굴에 열이 솟구치는 듯했다.
다미안의 말을 이해한 나는 그 자리에 멈춘 채 하염없이 눈만 깜빡였다.
“단순히 인형이 연보라색이어서가 아니라, 표정이나 생김새 같은 것이.”
말을 마친 다미안은 살포시 웃었다.
‘저기요, 왜 그런 말을 하면서 날 향해 웃어?’
내가 잠시 방심한 사이 다미안은 인형을 챙겨-정확히 말하면 포장지까지- 휙 몸을 돌렸다.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옆에서 꼬마 아이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저 형은 어른인데 인형 들어! 나도 사 줘!”
“조용히 해. 그런 말 큰 소리로 하면 안 돼.”
아니, 그 말도 다 들리거든요.
‘이럴 줄 알았어. 인형이 너무 커.’
체격이 큰 다미안 품에 있으니 내가 들고 있을 때보다는 좀 낫다만……
그래도 눈에 띄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옆에 있는 내가 다 부끄럽네!
“다미안, 정말 괜찮겠어요? 선물이라고 무리하지 말고……”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굳이 빈말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래…… 다미안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축제를 돌아다니며 쏟아지는 시선, 때로는 큰소리로 의아함을 표시하는 사람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축제 내내, 나와 함께 돌아다니는 동안 한시도 품에 떼어 놓지 않았거든.
* * *
축제를 한 바퀴 둘러본 우리는 이내 한 카페에 들어섰다.
‘드디어 인형이 다미안의 품에서 벗어났네.’
그래 봤자 다미안이 무언가를 흘릴까 봐 걱정된다며 잠시 옆에다가 놓은 것뿐이지만 말이다.
저 큰 인형은 너무 귀여워서 성인이 들고 다니기에 부끄러운 건 둘째 치고 부피가 너무 크다. 무겁기도 할 거고.
나랑 닮았다는 둥 이상한 소리나 해 대면서 소중히 품고 다니고 말이야……
열어 둔 창문으로 흘깃 바깥을 바라보니.
부드럽게 나무에 단 조명이 흔들리고, 바람에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린다.
‘저 조명, 검은 달에서 내놓은 무드등의 개량판이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무드등이 나무에 달려 있으니 몹시 분위기가 있다는 거다.
어두움을 밝히는 등이 이렇게 낭만적인 거였나.
마탑에서 수도 없이 본 거였는데, 왜 지금 이 순간 색다르게 보이는지 모르겠네.
“…….”
“…….”
둘이서 카페에 들어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지금은 내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인다.
이런 장소에 있으니까 꼭 진짜 데이트하는 것 같잖아.
사람이 같이 있으면 잠시 말이 멈출 수도 있지, 왜 이 침묵이 견디기 어려운 건데?
‘다미안이랑 내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사업 일로도 자주 만나는 사이잖아? 새삼 어색해하는 게 말이 돼?’
응, 말이 된다.
평소에 만날 때는 사업 때문이라 주제가 있는데…… 아까 축제를 돌아다닐 때는 그래도 눈에 보이는 걸 들먹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단둘이, 축제 기간인데도 불구하고 한적한 카페에 들어와 버렸잖아.
카페 아래층에서는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지만. 이 공간에는 우리 둘밖에 없다.
그래서 내 앞에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다미안 밖에……
“데이트 명소라더니, 분위기 정말 좋다.”
“그러게!”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곳에 바로 들어온 거였는데.
여기 데이트 명소였어?
그 말을 들으니 더 의식하게 되잖아.
“아하하. 하하.”
멜라니 클로틸드, 정신 차려. 꼭 긴장한 사람처럼 굴지 말고.
내가 긴장해서 그렇게 보이나?
다미안도 평소에 냉정하고 차분한 느낌이 아니라 어쩐지 어색해서 굳은 것처럼 보이네.
“음, 있잖아요…… 이제 돌아가면 밀린 일을 해야 하겠죠? 우리가 지방에 내려오느라 처리하지 못한 게 산더미일 텐데.”
“그렇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일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럼 어떤 이야기요?”
잠시 시선을 테이블에 두었던 다미안이 고개를 들어 나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이를테면 멜라니에 관한 이야기라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