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휴, 드디어 갔네요.”
벨데르트 백작이 와서 매달리는 건 예상한 바였다.
다미안과 나는 백작이 할 행동을 짐작하며 이에 대한 대응을 함께 고민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없었기에 간단히 처리하고 싶어 했지만 폴리우스와 똑같은 백작이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에잉턴 후작 부부 이야기를 꺼낸 거고. 이건 내 아이디어였다.
“과연 에잉턴 후작 내외께서 어떻게 대하실지 궁금하네요.”
쉽지는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도 세금 문제는 잘 해결되었군요.”
벨데르트 백작도 일단 머리는 있으니, 다미안과 더 비교되며 깎아내려지는 상황은 더 이상 사양하고 싶을 거다.
“정말 감사합니다. 클로틸드 영애께서도 에잉턴 영지에 가서 큰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나를 묘하게 경외시하던 젤던 남작은 나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뭐, 이해는 갔다.
‘폴리우스와 다미안. 형제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 꼴이니.’
그 이유를 굳이 말하지 않은 점에서 젤던 남작은 나에게 정말 미안해하고 있는 듯했다.
* * *
나는 계획했던 일을 하기 전,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잠깐 쉬기로 했다.
그런데 최근 나는 의아한 말을 들었다.
“임시로 세율을 낮춘다고 하고 또 올리는 거 아닐까?”
“벨데르트 가문 사람들은 믿을 수 없어. 그래 봤자 다미안도 벨데르트 백작의 아들이지 않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미안이 물길을 뚫고 가신들과 세율을 낮추었는데 왜 갑자기 다미안을 깎아내리는 말이 들리는지.
‘왜 그런 말이 돌았지?’
분명 다미안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 벨데르트 백작과 폴리우스를 향한 비난뿐이었다.
물론 나는 말도 안 되는 말이 나도는 꼴을 두고 보지 않았다.
가신들을 찾아가, 물길과 세율 해결은 모두 다미안 덕분이라고 소문을 내도록 했다.
빠른 조치에 다미안을 의심하는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하지만 찜찜함은 남아 있었다.
‘음, 영지에 폴리우스의 편이라도 있었나.’
다미안이 눈부신 활약을 펼친 이상…… 그래,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을지도.
이제는 다시 다미안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고 하니 말이다.
“다미안은 이제 돌아가나요?”
“……멜라니는 수도로 가십니까?”
질문을 했는데 대답 대신 질문이 왔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뭐…… 전에 말씀드린 일을 하러 가려고요.”
나는 애초에 벨데르트 영지 부근에 할 일이 있다는 말로 다미안을 따라왔다.
“그 할 일이라는 게 뭔지 말씀해 주지 않으셨는데…… 혹시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나는 주저했다. 사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이즈음에 원작에서 성녀 헤네시아가 외국 여행을 끝내고 프하이젠 제국으로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은 헤네시아가 성녀라고 밝혀지지 않았긴 한데.’
정보 길드에 의뢰했지만, 해외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헤네시아를 포착하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원작에 나온 것처럼 그녀와 폴리우스가 재회하는 순간까지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 나는 헤네시아에게 눈도장을 찍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다미안에게 말해. 소설을 읽어서 안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다미안은 내 침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조용히 말을 걸었다.
“혹시 멜라니가 지금부터 하려는 게 위험한 일입니까?”
“으음.”
위험하긴 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니까.
내가 바로 대답을 하지 않자 다미안이 한 걸음 나에게 바짝 붙었다.
“멜라니. 위험한 일인데 왜 굳이……”
“그래서 호위 기사를 데려가려고요. 다미안이 준 호신용 아티팩트도 있고요.”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내 고집이 쉽게 꺾이지 않을 것 같다고 여겼는지, 다미안은 나를 더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럼 저를 데려가십시오.”
라고,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다미안……”
나는 거절하려고 했다. 이 일을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묻지 않겠습니다.”
“네?”
“무슨 일이 있든지 모두 잊어버리겠습니다. 그러니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함께 가게 해 달라니, 꼭 제가 다미안한테 베푸는 것 같잖아요.”
“위험할지 모른다고 하시니 그냥 보낼 수가 없습니다.”
다미안은 힘을 주어 말했다. 나를 상대로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저는 아까 말했듯이……”
“멜라니 역시 저와 함께 에잉턴 영지까지 와 주셨지 않습니까. 그 빚을 갚는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다미안이 나의 뭘 믿고 이렇게 순순하게 따라오겠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에잉턴 영지까지 언급하자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을 잃고 말았다.
‘사실, 다미안이 함께 있어 주면 가장 믿음직스럽긴 한데……’
다미안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요…… 같이 가요.”
고민하던 나는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함께 마차에 오르는 순간까지 그를 흘깃흘깃 보았지만, 그의 의지는 굳건해 보였다.
나와 함께 가겠다는.
마차가 출발하자 다미안이 곧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몸도 안 좋으신 분이 혼자 가려고 했다니요.”
“음……”
다미안은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설명을 해 주고 싶었다.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아.’
나는 다미안에게 내가 가려는 곳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나올지를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변이 마물이 나올 거예요.”
사실 다미안은 갑자기 이런 상황을 마주친다고 한들 변이 마물쯤이야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다. 괜히 마탑주가 아닌걸.
하지만.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별 위협이 되지 않을 걸 알지만, 그래도 마물인걸.
아무것도 모르고 던져진 모양새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의심 받지 않으려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게 가장 안전했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래서 저는 그 변이 마물로부터 사람을 구하러 갈 거예요. 그런데 왜 이런 일을 제가 알고 있는지…… 묻지 말아 주세요.”
다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
나는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니, 대체 뭘 믿고…… 제가 다미안에게 위험한 일 하려고 하는 거면 어떻게 해요?”
“그렇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아니, 대표님은 그럴 사람도 아니잖습니까도 아니고 그냥 괜찮다니. 어이가 없네.
“그냥 뜻대로 저를 이용해 주십시오.”
“네?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어떻게 해요!”
“멜라니라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다미안은 순순히 웃었다. 일견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부드러운 미소였다.
‘이 사람 은근 순진할지도……? 마탑주씩이나 되었는데 어떡한담……?’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다미안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소설에서는 악역까지 맡았던 사람이면서!
처음에 내가 약혼하자고 했을 때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계했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물렁한 태도지? 설마 좀 친해졌다고 이런 건가.
……사실 다미안한테 친구 같은 거 없어 보이긴 하는데.
설마 그래서 그런가? 한번 좀 친해졌다 싶으면 막 퍼 주는 성격?
‘사람들은 다미안 보고 냉정하고 차갑다고 하는데, 전혀 아니야.’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옆에서 역시 지켜보는 수밖에……’
“그냥 뜻대로 저를 이용해 주십시오.”
이런 말을 그냥 내뱉는 남자라니, 위험하다고. 정말 위험해……!
* * *
“이제 도착했네요.”
다미안이 한 말 때문에 어지러운데. 정신을 다 차리기 전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레이넨은 관광객들이 많이 들르는 도시니, 저희가 와도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는 벨데르트 영지에서 수도로 올라가는 도중에 우연히 변이 마물을 맞닥뜨린 거예요.”
“멜라니와 제가 데이트를 하던 도중에요.”
“네…… 그렇죠.”
데이트.
계약 약혼 관계니까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인데.
다미안의 입에서 데이트라는 말이 나오니 왜 얼굴에 열이 오르는지 모르겠다.
‘우와,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여태까지 약혼이니 뭐니 더한 말은 태연하게 했으면서. 왜 새삼 데이트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냐고.
나는 답지 않게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아하하,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보시지!”
“야, 거기 안 서?”
그러다 문득 천진하게 웃으며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시선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