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으으윽……”
변이 마물에는 다치지 않았지만, 도망가려는 인파에 밀려 밟히거나 넘어진 사람들이 있었다.
‘역시 착각이었나?’
헤네시아는 누구보다 앞장서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다미안이 마력 사슬로 버티고 있다고는 하나 무섭고 두려울 만한 현장에 남아서 말이다.
‘그래, 성녀인데 사람들이 아픈 걸 기뻐할 리가 없지. 원작 소설에서도 선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나왔잖아.’
압도적인 공포에 빠져서 그 자리에 굳은 것일 거다. 너무 사람이 놀라면 헛웃음이 나올 수도 있고.
나와 그렇게 가까웠던 거리도 아니니 충분히 잘못 볼 만하다.
“괜찮으세요? 일어서실 수 있겠어요?”
“으으, 절대 못 일어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헤네시아는 침착하면서도 강단 있게 사람들을 챙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서 이동해야 할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도 있어서……”
“야!”
하지만 헤네시아의 목소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끊기고 말았다.
“이걸 어떻게 참아! 너는 하나도 안 다쳤으니 할 수 있는 말이지!”
헤네시아는 맨 끝자리에서 가만히 있었기에 마물의 공격을 받거나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않긴 했다.
하지만 공연한 짜증이 아닌가.
헤네시아가 다치게 한 것도 아니고, 도와주려는 사람에게 성질을 내다니.
보고 있는 내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헤네시아는 예쁜 미간을 한 번 찌푸리지도 않았다.
“아뇨…… 저도 당신의 고통이 정말 마음 아파요.”
“네가 마음 아프면 뭐 해!”
“……그게 아니라.”
“계집애는 나서지 말고 꺼져!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이대로 신전에서 투입될 사람들을 기다리건, 부축을 받아 이동하는 걸 기다리건 간에.
부상이 더 심한 사람이 있으니 순서를 기다리는 게 맞지 않나.
‘정정하게 소리 지르는 걸 보니, 별로 다친 것 같지도 않은데.’
아직 자신이 성녀인 것을 모르는 헤네시아는 그저 상처 앞에 무력한 보통의 사람처럼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어.’
나는 헤네시아에게 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역시 저런 말까지 들었는데 참기 힘들겠지.
“어휴, 저 사람은 왜 난리래?”
“가서 도와줍시다.”
계속되는 소란에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집중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눈살을 찌푸리며 나서려고 하던 그때.
헤네시아의 몸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저는…… 당신을 돕고 싶어요.”
그리고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환한 빛이 남자를 감쌌다.
“어……?”
퉁퉁 부어오르고 멍들었던 다리가 한눈에 봐도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남자는 제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몇 번이고 껌뻑였다.
“뭐,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지만,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현실이었다.
남자는 통증 역시 말끔히 사라졌다며 입을 떡 벌렸다.
그는 몇 번이고 제 다리를 확인하더니,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펄쩍펄쩍 뛰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
남자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기적을 일으킨 헤네시아 본인도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남자는 이내 정신을 차리더니 헤네시아를 휙 돌아보았다.
“혹시 아가씨, 신관이야?”
“어어, 신관……?”
“이야, 내가 신관님을 몰라보고 아까는 실례를 저질렀구만! 정말 미안해!”
남자는 언제 헤네시아를 욕했냐는 듯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까는 계집애니 뭐니 하더니 고쳐 줬다고 바로 태도가 바뀌는군.
아니, 착각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돈 받을 거야? 응? 아가씨 착하니까 괜찮지?”
“아…… 돈은 괜찮아요.”
“역시! 아가씨가 참 착해!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봤어!”
이래저래 대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헤네시아가 남자의 말에 정신없어하는 것 같기에, 나는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최소한 고맙다는 말씀은 하셔야죠. 신전에 가서 치료받았다면 엄청난 돈이 들었을 거예요.”
“에엥? 너는 또 뭐야…… 허업.”
갑자기 나타난 나를 못마땅하게 보던 남자는 내 옆의 다미안을 보더니 갑자기 꼬리를 내렸다.
“큼, 크흠. 그렇지. 고맙다는 말을 내가 잊어버릴 뻔했네. 신관 아가씨, 정말 고마워!”
그리고 후다닥 제자리를 벗어났다. 어찌 됐든, 저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걸 보니 다리는 성한 듯했다.
‘역시 괜히 성녀가 아니네.’
이렇게나 빨리,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고쳤다는 신관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나는 이내 남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는 헤네시아를 바라보았다.
“다리를 순식간에 고치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아…… 당신은 아까 전에.”
“꼭, 성녀님 같네요. 아시죠? 전대 성녀 누느니아요.”
은근슬쩍 성녀를 언급하자 헤네시아의 눈이 잘게 떨렸다.
사실 원작 묘사를 보면, 헤네시아는 전대 성녀 누느니아와 혈연관계인 것 같거든.
물론 성녀 누느니아는 딸이 없는 상태로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숨겨진 아이가 있을 수도 있고.
말도 안 되게 닮은 얼굴, 엄청난 신성력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어떤 관계도 없다는 건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그 이야기를 할 건 없고…… 나는 헤네시아에 말을 건네다 문득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소설에서 나온 묘사대로 요정 같은 사람이네.’
과연 폴리우스의 어장 속 히로인답게 엄청난 미모다.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건 그녀에게 감도는 분위기.
훗날 성녀가 되는 사람답게 성스럽다고 해야 하나, 주변과 이질적인데 그게 전혀 나빠 보이지 않다.
아까 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던 것도 그냥 미모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당신을 기다렸어요, 헤네시아.’
나는 속으로 헤네시아에게 하지 못할 말을 속삭였다.
“저기, 나도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신관 아가씨가 치료해 주면 안 되겠어요?”
“그런데 정말 아까 전 아저씨처럼 치료비는 안 받는 거 맞지?”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헤네시아가 신성력을 발휘하자마자 갑자기 달려드는 꼴이라니.
‘헤네시아도 당황스러울 텐데, 내가 옆에서 도와줘야겠다.’
아까 남자에게 휘둘리는 걸 보면 너무 착해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신성력은 무한대로 나오는 힘이 아니에요.”
나는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혹시 신성력…… 같은 힘 있잖아요. 다시 쓸 수 있겠어요?”
“네? 네에…… 잘은 모르겠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얼마나 치료할 수 있겠어요?”
“으음. 그래도 제법 많이 가능할 것 같아요. 아아,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요……”
나는 헤네시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오늘 크게 다친 분들만 나오세요.”
다행히 아까 다미안에게 고맙다고 하던 사람들이 상황을 돕겠다고 나섰다.
나는 헤네시아에게 도움을 받겠다고 나선 사람들을 정리시켰다.
별거 아닌 상처인데 엄살 부리는 사람들을 빼내고, 정말 헤네시아의 힘이 필요한 사람들을 선별해 순서를 매겼다.
“오오, 아주 똑 부러지시는군요.”
무시무시한 마법을 부린 다미안이 내 옆에 있으니 다들 내 눈치를 보았다. 다행인 일이었다.
덕분에 큰 소란 없이 정말 아픈 사람들이 헤네시아에게 치료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헤네시아가 오늘 처음 신성력을 발현한 사람이라는 걸 상기했다.
“만약 낫지 않는다고 해도, 막 신성력을 써 본 사람이라는 걸 알아 두세요.”
“아니, 아까 고치는 거 보니까 잘할 것 같은데요?”
“지금 저분이 하는 건 어디까지나 봉사예요. 잘 안 된다고 해도 하는 수 없잖아요.”
물론 성녀니까 잘해 낼 것 같지만, 헤네시아가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미리 말해 두었다.
이런 내게 다미안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다가와 말했다.
“멜라니야말로 좀 더 쉬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거기다 굳이 나쁜 소리를 도맡을 필요는.”
“괜찮아요. 지금 신성력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저분이나 엄청난 마법을 몇 번이나 쓴 다미안만 하겠어요?”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나쁜 소리를 하는 게 치료하는 사람 입장에서 편할 것 같아서요. 딱 봐도 귀족 영애잖아요. 또, 무엇보다 다미안이 옆에 있기도 하고.”
나는 다미안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저 멀리서 치료하고 있는 헤네시아를 바라봤다. 헤네시아의 신성력은 놀라웠다.
직접 보지 않았으면, 오늘 처음 발현한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우우웅!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흐윽, 아가씨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요.”
치료가 끝난 사람들과 다친 곳 없는 사람들은 천천히 공연장 밖으로 나갔다.
다친 사람-특히 다리 같은 곳-은 굳이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직 공연장 안에는 환자들이 꽤 남아 있었다.
다행히 헤네시아가 사람을 치료하는 속도는 미친 듯이 빨랐고……
‘기둥이 무너지려고 하던 건 다미안이 마력 사슬로 잡아 뒀고, 기간도 일주일은 간다고 하니까.’
환자까지 공연장을 나간 후에는 충분히 기둥을 처리하든, 보강하든 할 수 있겠지.
‘초보 신관은 이 정도 환자면 치료하는 데 몇 주는 걸릴 텐데……’
하지만 이 정도 속도라면 넉넉히 세 시간이면 끝날 것 같다.
‘정말 대단해. 이게 여주인공의 힘인가……’
약혼녀였던 내가 죽은 후, 독자들은 폴리우스와 최종적으로 이어지는 사람이 성녀 헤네시아라고 추측했다.
헤네시아는 폴리우스의 어장 속 다른 물고기들과는 다르게, 폴리우스와 직접 만나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무척 늦었는데도 말이다.
헤네시아의 능력, 헤네시아의 미모, 헤네시아의 성격……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폴리우스에게 어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약혼녀였던 내가 죽었어도 큰 반응 없이 헤네시아를 응원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