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90)화 (90/90)

<90화>

이런, 일이 순조롭게 풀리니 쓸데없는 잡생각이 든다.

‘소설하고는 상관없잖아. 이미 흐름도 많이 바뀌었는데.’

나는 고개를 세게 한 번 흔들고는, 아프다는 환자들의 상태를 마저 확인했다.

소설 내용대로라면 폴리우스의 죽은 전 약혼녀에 불과한 나는 성녀를 만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성녀를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운명은 바뀌었다.

……그러니까, 나쁜 생각 같은 건 할 필요 없다.

* * *

“많이 힘드셨죠? 정말 대단하세요.”

헤네시아는 처음 걱정과는 다르게 모든 환자를 제대로 치료했다.

다친 사람 중에는 오히려 공연장에 들어서기 전보다 몸이 가볍다는 말을 한 사람도 있었다.

환자들이 고맙다며 헤네시아의 이름을 물어본 덕분에, 이후로 헤네시아의 이름이 꽤 널리 퍼질 것 같다.

원작과는 다른 흐름이지만 어쨌든 사람을 구했고, 성녀로 인정받는 것도 머지않을 테다.

헤네시아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늦게서야 대답했다.

“……아뇨, 별거 아니에요.”

그러고는 고개를 정중하게 숙여 보였다.

으음, 내가 귀족 영애라서 대하기 어려운가?

아니면 아까 보여 준 것처럼 다소 소극적인 성격이어서?

‘무슨 말을 해야 헤네시아가 나랑 편하게 대화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내 고민이 무색하게, 헤네시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지나쳐 갔다.

그다음 한껏 상기된 얼굴로 다미안의 앞에 섰다.

“마법사님, 저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나를 대할 때와는 정반대로 호의적인 태도였다.

나는 무안해진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괜히 눈을 도르륵 굴렸다.

‘헤네시아…… 귀족을 어려워하거나 낯 가리는 거 아니었나?’

아니, 낯가리는 사람도 생명의 은인 앞에서는 들뜰 만하지. 다미안한테는 고마워하는 게 당연하고.

그런데 말이야.

“마법사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정말……”

왜 처음 보는 남자의 손을 덥석 잡으려고 들어?

다행히 다미안은 헤네시아가 제 손을 잡으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피했다.

그리고 헤네시아가 그에 반응하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아뇨, 우연히 데이트를 하다가 들렀을 뿐입니다. 차라리 인사는 레이넨 시를 고른 제 약혼녀에게 하시죠.”

게다가 ‘데이트’를 ‘약혼녀’와 했다고 자연스럽게 부각하는 거 봐.

‘크흐읍, 다미안. 정말 잘했어요. 최고다.’

저기서 손을 잡기 싫다는 듯이 빼면, 생명의 은인에게 고마워하는 사람에게 무안을 준 사람이 된다.

또, 약혼녀가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와 손을 다정하게 잡는 것도 좀 그렇잖아.

물론, 따지자면 계약 약혼 파트너긴 하지만! 그래도!

“아……”

과연, ‘데이트’와 ‘약혼녀’라는 단어가 나오자 헤네시아는 다소 과한 호감 표현을 멈췄다.

“서커스 공연장에서 큰 소리가 나자, 사람들을 돕자고 나선 게 멜라니입니다. 여태까지 사람들을 선별하고 진정시킨 것도 제 약혼녀고요.”

다미안이 나를 대화 주제로 올린 덕분에 헤네시아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그렇군요. 감사드립니다.”

고마운 일이다.

사실 헤네시아에게 점수를 따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건 나니까.

‘헤네시아가 성녀라는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헤네시아의 신성력을 본 순간 아픈 나를 자연스럽게 떠올린 건가?’

일부러 헤네시아 앞에서 내 공을 얘기해 준 다미안의 양보와 배려를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그리고 헤네시아를 향해 넉살 좋게 웃었다.

“뭐, 고마우시면 저도 나중에 한 번 도와주세요.”

“하지만 저 같은 사람이 감히 공작 영애를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으음, 선을 긋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인가?

뭐, 지금은 헤네시아가 자신이 성녀인 걸 제대로 모를 테니 그럴 수 있지.

오늘 막 신성력을 발휘하고, 큰일이 일어나서 정신이 없을 사람이다.

사람들을 치료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고. 그러니 과한 해석은 하지 말아야지.

“저 같은 사람이라뇨. 겸손이 지나치세요.”

그때였다.

콰앙!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가 한적해진 서커스 공연장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헤네시아, 괜찮아?”

“폴리우스.”

그래, 레이넨에서 헤네시아와 폴리우스는 크게 가까워지며 각별한 사이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폴리우스는 원작 소설에서 변이 마물의 습격에서 간신히 도망친 헤네시아를 업고 도망치는 데에 그쳤지만.

내가 데려온 다미안은 헤네시아는 물론이고, 서커스 공연장의 사람들을 모조리 구해 버렸는걸?

‘늦었다, 멍청아.’

나는 폴리우스가 나와 다미안을 보며 낭패 어린 기색인 것을 보고 픽 비웃었다.

* * *

멜라니는 다미안과 함께 수도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멜라니는 헤네시아와 함께 마차에 탈 수 있으면 같이 타려고 했다.

당신에게 신성력이 있는 것 같으니, 수도의 신전에 가 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마침 커다란 마차를 끌고 왔으니 데려다드리겠다고 말이다.

헤네시아에게 치료를 받을 거면, 최대한 성녀가 되어 바빠지기 전에 오늘 일을 구실로 친분을 쌓아 두는 게 좋으니까.

하지만…… 멜라니는 아까 전 일을 회상했다.

뒤늦게 나타난 폴리우스가 우리들을 보고 이를 갈고 있을 때.

헤네시아는 폴리우스가 다미안을 부르는 걸 듣고서는.

“아, 마법사님께서 말로만 듣던 다미안 마탑주셨군요!”

토끼같이 눈을 크게 뜨며 입을 가렸다.

여태까지도 사람들이 마탑주라고 계속 불렀는데 못 들었나 보다.

“헤네시아, 이런 놈하고는 더 상대하지 말고 가자!”

“하지만 감사하다는 말을 제대로 못 드렸는데……”

그래, 거기에서 자신이 끼어들어 헤네시아를 마차로 데려올 수 있었다.

헤네시아는 다미안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고,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 하는 듯했으니까.

그런데 저도 모르게.

“폴리우스와 약속이 있으셨나요? 그럼 그 약속이 끝난 후 꼭 수도에 올라가 신전에서 신성력을 인정받으세요.”

라고 말해 버렸다.

자신의 말을 들은 폴리우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헤네시아를 데려가 버렸고 말이다.

‘내가 왜 그랬지.’

헤네시아가 다미안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을 보니 순간 그렇게 말해 버린 거다.

‘뭐 하는 거냐고. 질투해? 지금?’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멜라니는 눈을 꾹 감으며 낮은 한숨을 흘렸다.

“…….”

그리고 마차 옆자리에 앉은 다미안 역시 속이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폴리우스가 왜 이곳에 있던 거지.’

멜라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고 하며 따라왔다.

하지만 멜라니는 다미안이 걱정되었는지 변이 마물을 없애러 간다는 이야기는 해 주었다.

변이 마물이 나온다는 건, 자칫하면 그 배후로 몰릴 수 있는 일.

그러나 그 내밀한 이야기를 멜라니는 다미안에게 해 준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다미안은 멜라니가 자신을 신뢰한다는 것을 느꼈다.

애초에 아무것도 알지 않고 멜라니의 뜻대로 움직일 예정이었으니까.

그런데……

폴리우스를 보자, 더 욕심이 났다.

‘혹시 멜라니가 레이넨 시에 온 건, 폴리우스가 변이 마물에게 당하기 때문인가?’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폴리우스에 대한 멜라니의 감정은 애초에 사랑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설령 사랑한다고 해도, 폴리우스에게 정떨어질 만한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다미안 스스로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다미안은 멜라니를 좋아한다. 그게 문제였다.

가능성이 없는 최악의 일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하게 되어 버린다.

예전에는 폴리우스가 아버지의 혼외 자식이라는 것 때문에 경멸했다.

하지만 이제는 멜라니의 전 약혼자라 더 싫은 것 같기도 하다.

멜라니의 약혼자였으면서, 왜 그따위로 그녀를 대했는가.

‘내가 만약 멜라니의 진짜 약혼자였다면…… 절대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지 않아. 물주로 써먹지 않아. 제 어머니를 모시게 하지도 않아.’

그렇지만 가라앉았던 기분은 다시 둥실둥실 떠올랐다.

아까, 헤네시아가 갑작스럽게 다미안에게 다가왔을 때.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할 때.

멜라니는 꼭, 자신에게 다른 여자가 다가온 것을 질투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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