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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불쌍한 사람 아니라고-11화 (11/78)

〈 11화 〉 트라우마

* * *

심장이 뛴다.

나무 벽에서 뛰어내렸다.

부유감과 동시에 시린 공기가 느껴졌다.

위에서 뭐라고 하는 것 같지만 들리지 않아.

근처의 나무에 몸을 숨겨 조심스레 상황을 지켜봤다.

허리춤에 있던 권총을 꺼내 살펴본다.

철 특유의 차갑고 거친 느낌 그리고 약간 묵직한 무게감.

마카로프 PM

작은 총 크기에 비해 무게는 약간 무거운 편이며 탄창은 8발이 들어간다.

그립감이 불편하기로 악명 높은 구시대의 물건.

내 때에는 박물관에서나 볼법한 무기였는데…

내 때엔?? 테일리의 기억일까.

그런 생각을 잠시 멍하니 했었는데 내 몸이 떨리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겁먹어서? 아니… 이건.. 앞으로 벌어질 전투의 고양감.

신기한 느낌이다.

내 평생에 이렇게 격렬한 감정을 겪어본 적이 없었지.

하얀 입김이 푸하고 뿜어진다.

설원이라 눈이 쌓여있음에도 묵직하고 빠른 발걸음이 들려왔다.

정란이와 예화는 다른 곳으로 도망 갔나? 냥지와 합류 했으려나.

“야. 흩어져서 찾자.”

“이 좆 같은 오지에 털어먹을게 뭐 있다고 여기 오자고 한 거지?”

“알렉세이 그 새끼가 여기에 좋은 게 있다잖아.”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온다.

전혀 긴장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오합지졸이야.

아까 보니, 숫자가 어마어마하던데 일부인 걸까.

냥지의 기지는 알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르는 것 같네.

“넌 저기 서쪽 난 동쪽으로 간다.”

“와우,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나침반을 봐! 병신아!”

“그럼 난 남쪽이겠군.”

“좋은 거 찾으면 나누자고~ 혼자 다 독차지하지 말고.”

그들이 서서히 흩어지는지 발소리가 옅어진다.

그리고 내 쪽으로 들려오는 발을 구르는 소리.

둘… 둘인가?

마침 위치는 절묘했다.

내가 숨어있는 나무 쪽으로 걸어오는 모양.

흐…

쿵 쿵

놈의 발걸음 소리가 얼마나 큰지 쿵쿵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내 심장 뛰는 소린가?

고양감이 내 몸에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바로 지척까지 들려오는 발소리.

들고 있던 권총을 힘주어 잡았다.

쿵..

바로 뛰쳐나와 놈들을 본다.

옆구리를 보이며 서 있는 놈들은 급하게 내 쪽으로 돌아보지만, 나에겐 그저 느릿하게 움직이는 나무 늘보처럼 보였다.

수염 난 놈 그리고 대머리

내게 총구를 들어 올리는 수염 난 놈의 머리를 향해 정확하게 한발 꽂아 넣었다.

탕!

권총을 허리춤에 집어넣고 쓰러지고 있는 수염 난 놈의 허리춤에 메어있는 대검에 빠르게 손을 뻗어 빼낸다.

치이잉

총구에서 화염을 뿜어내며 날아오는 총알들을 오른쪽으로 몸을 숙여 피한 뒤 놈이 반응하기도 전에 허벅지에 칼을 내려 찍었다.

무언가를 꿰뚫는 소름 끼치는 느낌.

그리고 대머리는 총을 떨어뜨리며 비명을 지르려고 하지만 입을 막고 놈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봤던 PMC의 지능을 봐선 기대하진 않지만 실험해볼 것이 하나 있다.

적의 인공지능은 어느 정도일까?

“쉬이이… 조용히 해야지?”

“흐..으윽…흡..흡…”

간신히 비명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놈의 고갯 짓.

적대 인공지능의 수준은 좀 높은 편이었네.

“지금 소리를 듣고… 너의 친구들이 여기에 올 거야.. 그렇지..?”

“네..히..네..네!”

“별거 아니라고 연기해주면 좋겠어… 살고 싶다면.. 그리고 너희들의 숫자는 몇 이지?”

“아홉…. 아홉 입니다..!”

그 많은 숫자를 봤는데 어디서..

놈의 허벅지에 박힌 대검을 조금 돌려주었다.

검에 뚫려있을 뿐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혈흔이 조금 보일 뿐.

너무 고어 하게 만들진 않은 모양.

“끄…으으..아…맞…. 맞는데… 씨발…!”

“그 많은 숫자를 봤는데… 아홉..?”

“아..아!! 오십…오십…! 몰랐어..!”

“하여튼 잘해줄 거라.. 믿어..?”

“아..알았어..! 제발… 그만… 흐으으”

잘했다는 의미로 흐느끼는 놈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만질만질한 것이 느낌이 제법 괜찮네.

“이봐. 무슨 일이야?”

“드미트리? 느낌이 이상해.”

허리춤의 권총을 꺼내 놈의 머리에 대주었다.

이 정도로 빈틈을 보여줬는데 반항 한번 안 하다니.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모습이다.

“대답해야지… 드미트리..?”

“별… 별거.. 아냐! 놀라서 쐈는데… 그게 토끼였어..!”

“쫄보 새끼 하다 못해 토끼한테도 놀라냐?”

낄낄 웃으며 흩어지려는 듯 소리가 멀어지려는 찰나에 어떤 놈의 질문 소리가 들려온다.

“드미트리! 나무 뒤에서 뭐 해? 안드레이는?”

“그…. 그새낀.. 볼일 보고 있어..!”

“그 자식은 맨날 똥이야.”

흩어진다.

스캐브라는 뜻 그대로군.

시체나 뒤지면서 사는 놈들에겐 의리 따윈 있을 리가 없지.

“시..시…키는 대로 했어… 지혈…지혈… 추워…”

“잘했어… 드미트리… 그리고… 잘자.”

대머리는 기절한 듯 고개를 툭 떨군다.

인간은 칼에 찔리면 3분을 넘기지 못한다.

부위마다 다르긴 하지만 보통은 3분 안에 의식을 잃는다는 뜻이다.

게임이니까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하겠지.

내버려 두면 알아서 과다 출혈로 죽는다.

전리품으로 수류탄 셋 그리고 자동 소총 한정을 챙기고 대검을 왼팔로 들고 일어나 바닥을 살핀다.

동쪽…서쪽… 발자국을 보니… 거짓말을 한 건 아니군..

동쪽에 셋… 이쪽부터 처리해야겠네.

사박..사박…

걸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희미한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똥 소리 들으니 나도 마려워진다.”

“더러운 새끼 냄새 안 나게 저기 가서 눠.”

파란 모자를 쓴 놈이 옆 쪽으로 걸어간다.

검은 모자를 쓴 놈은 시가를 뻑뻑 피우며 연기를 뿜어낸다.

놈의 등 뒤로 살며시 접근했다.

그리고 등을 향해 힘껏 대검을 찔러 넣었다.

“흐…흐으…끄윽”

사람은 칼에 등을 찔리면 비명을 지르지 못한다.

실제로는 공기가 폐에서 빠져나와 소리 없이 신음 한다.

몸에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소리 없는 비명.

가래처럼 피 끓는 소리가 멈추고 몸을 부르르 떨던 남자는 고개를 툭 떨군다.

고어한 모습은 나오지 않지만… 제법 참혹하게 보인다.

화장실로 간 놈도 똑같이 처리했다.

그것은 구현하지 않았는지 냄새는 나지 않네.

속도를 좀 더 내서 서쪽 놈들도 모두 처리했다.

이제 남은 숫자는 41명인가?

저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냥지의 기지를 이미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빠른 걸음으로 살짝 뛰어가니 화약 냄새가 난다.

숨어서 몰래 지켜보니 교전 중인 것 같다.

스캐브들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엄폐물들과 트럭에 숨어 앞을 보며 사격 하고 있었다.

난 그럼 뒤쪽을 노리면 되겠군.

가지고 있는 총들의 잔탄을 확인하고 싶지만 한쪽 팔로는 힘들어서 관두었다.

수류탄 하나를 집어 이빨로 고리를 제거한 후 놈들에게 투척 했다.

쿠킹하고 싶었지만, 수류탄들은 워낙 수류탄마다 개별 편차가 심해서 위험한 기술이었다.

6초 짜리 지연 신관이 3초 만에 터진 적도 있으니까.

툭 데구루루

“시발! 수류탄! 수류탄! 숙여! 숙이라고!”

“흐아아악!”

펑 터지는 소리와 함께 파편이 흩날린다.

이런 식으로 몇 번 반복해서 던져주었다.

탕! 탕! 탕!

내 위치를 아직 특정하지 못했는지 사방으로 날아가는 탄환.

왼팔로 자동 소총을 꺼내 갈겨주었다.

자동 소총의 반동을 팔 하나로 감당 할 수 있을까?

투두두두두 팅 퉁 탱 탱 팅 팅 퍽

탄이 날아가 대머리의 뒤통수를 뚫어버린다.

앞뒤에서 총알이 쏟아지니 엄폐물도 의미가 없었고 스캐브들은 혼란에 빠졌는지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어디야! 시발!”

“스키프가 죽었어! 엄폐물이 관통 되었다!”

“뒤다! 뒤야!”

죽음을 체감한 공포 섞인 절규가 울려 퍼진다.

두두두두 틱틱

탄이 떨어졌다.

시체에서 탄창은 챙겨오지 않았다.

어차피 팔 하나로는 재장전이 힘들어서.

버리고 권총을 꺼낸다.

7발 정도 남았으려나.

“놈의 탄이 떨어졌다!”

“압박해! 압박하라고!”

“엄호해!”

내가 숨어있던 나무에 집중 사격이 쏟아졌다.

나무인지라 얼마 버티진 못할 거 같고… 권총을 들고 뛰쳐나왔다.

수십의 탄환들이 날아온다.

느릿하게 날아오는 탄환들을 몸으로 피하며 엄폐물로 뛰어갔다.

나를 보며 놀라는 남자가 한 명 보인다.

경악한 듯 눈이 점점 커지는 놈의 머리에 한발 박아주고 엄폐물에 숨어 놈들에게 몇 발 쏴주었다.

쓰러진 시체의 총을 주워 응사한다.

탄이 다 떨어진 총을 던져버리고 엄폐물로 숨어버린 놈들에게 뛰어들었다.

숨어있던 놈의 목을 움켜쥐며 오른쪽에서 쏘는 스캐브에게 밀어낸다.

놈들에게 둘러싸여 그런 행동을 반복했다.

놈들은 쏘고 난 스캐브들을 잡아 방패로 삼는다.

혼란이 빠진 놈들은 자신의 동료도 아랑곳하지 않고 쏴버렸고 난 속에 뛰어들어 날뛰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불 속에 날아드는 불나방 꼴이지만 스캐브들의 눈에도 내가 그렇게 보였을까?

전투는 끝이 났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도망가는 스캐브들 중 하나의 다리에 권총을 주워서 쐈다.

힘이 쭉 빠진다.

뭔가… 지치는데…

옆에 굴러다니는 드럼통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우…”

하얀 입김을 멍하니 바라봤다.

“와!! 개쩔어!!”

“예지 미쳤어~”

[와…ㅋㅋㅋㅋㅋ]

[프로게이머들도 다 털릴 듯 ㄷㄷ]

[미친 거 아님? 사실 어디 특수 부대?]

[ㅋㅋㅋㅋㅋㅋㅋㅋ 총알을 그냥 춤추듯 피하네]

[눈나 너무 예뻐요…]

[누나… 걸크러쉬…]

나무 벽 위에서 한껏 감탄하며 날뛰는 예화에게 부끄럽지만,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냥지는 얼굴이.. 붉은가..? 날 멍하니 바라봤다.

근데 어디서… 정란이 목소리가 들렸는데…?

바로 오른쪽을 보니 정란이가 눈이 X 표시가 된 채로 누워있었다.

옆에 정란이와 비슷한 덩치의 주황색 머리의 누군가도 같이 쓰러져있었다.

“어… 왜 거기… 누워있어..?”

“주금!”

“저도요!”

두 명을 왼팔로 주섬주섬 주워 들어 올렸다.

“가까워~ 가깝다고!!”

“왜구루냥~”

문 근처로 가까이 가니 냥지와 예화가 놀라며 나를 반긴다.

뒤에 모르는 사람 한 명도 같이.

“와..! 너 군인이야?”

“전직 PMC나 FBI 그런 거 아냐?”

“특수부대일 듯..”

[ㄹㅇ]

[무친련… 무친련…]

데리고 있던 두 명을 건네주니 셋이 힘겹게 둘을 받는다.

갈색 머리에 민트 색 머리가 섞인 투톤 컬러의 여자가 나에게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다가왔다.

누굴까…

“음,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방송 많이 봤어요…제 이름 유초야...”

“언니 뭐야..”

냥지가 소심하게 유초야라는 사람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기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나에게 들러붙었다.

냥지보다 나이가 많은가?

반짝이는 눈이 좀 부담스러웠다.

“말 놓으셔도 돼요…”

“아…. 그럴까? 예지야 너무 멋있다… 예쁘다고 해야 하나?”

“소개팅이야?!”

“아… 감사합니다…”

“언니라고 한번…”

그냥 부르려고 했지만 왠지 이 상황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언…언니라 부르면 뭔가 좀…

맞긴 하는데…

“언…언…”

엄청나게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극하니 점점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언…언…다잉…‘

“그래…참게비령님도… 나한테 언니라고 말한 지 얼마 안 되긴 했어…”

음… 뭔가 실망한 눈치네.

“언니…”

약간 시무룩하게 있길래 용기 내서 말했더니 얼굴에 화사한 꽃이 핀 듯 함박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이히..에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아 죽네 ㅋㅋㅋㅋㅋ]

[다들 귀엽네ㅋㅋ]

냥지가 초야님을 데리고 템 파밍한다고 스캐브 무리한테 가버렸다.

어느새 일어난 정란이와 주홍 머리의 여자 그리고 예화도 파밍을 하러 훌쩍 떠나버렸다.

예화가 다시 돌아오더니 내가 제압 했던 스캐브 한 명을 밧줄로 묶어서 나에게 건네준다.

“예지야 스캐브 데리고 심문실 앞에 NPC한테 심문하라고 시켜. 난 더 파밍 하러 갈게.”

“응…”

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근데 심문실이 어디야?

옆의 NPC에게 물어봤다.

“심문실 어디 있는지 알아?”

“탑 밖의 밭 옆에 허름한 건물에 있습니다.”

나와서 보니 확실히 허름해 보이는 건물이 하나 보였다.

심문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네.

근데… NPC가 없는데?

안에 있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음침한 분위기의 기구들과 의자가 하나 보였다.

뭔가… 이상하다..

어느새 내 몸은 덜덜 떨리고 나도 모르게 이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상.. 이상해…

소름 끼치는 뭔가… 무서워.

무서워….

막연한 두려움이 내 몸을 지배한다.

끼이익 철컥

이상한 무언가가 떠오른다.

누군가의 목소리… 뭐지…?

이건… 몸의 기억..?

‘오… 우리 이제 편해지자고..’

위이이이잉

‘대답하는데, 사실 눈이 필요하진 않잖아. 안 그래?’

뭐야?

‘놈들은 널 버렸어! 대답해! 흠… 안 되겠군.. 여기서 여기까지 도려내.'

으지직

내 눈을 누가 파고 있어?

누구야?

어?

위이잉

카가가각

내 팔?

'넌 정말 멋진 작품이야.'

찌이익

아…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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