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역린과 목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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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합차에서 내린 뒤 어디론가 억지로 끌려간 뒤에야 겨우 눈을 가린 안대를 풀 수 있었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겉보기엔 물류창고처럼 보였다.
내용물을 알 수 없는 포장된 짐덩어리들이 곳곳에 쌓여 있으며, 한 곳에는 그것을 옮기기 위한 지게차까지 놓여 있었다.
바닷가 근처인가? 멀리 떨어져 있는 입구 쪽에선 일정한 간격으로 파도와 비슷한 물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창고와 같은 공간 안에서 족구라도 한 판 해도 될 듯이 한산한 곳에 내가 서 있었다.
수십 개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는 게 느껴진다.
저마다 연장이라는 걸 든 장정들이 한쪽 구석에서 담배를 피거나 컵라면을 먹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친개처럼 반항하던 나였지만, 여기에선 마음 놓고 날뛸 수 없었다.
그때는 목적지까지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될 거라 믿었고, 상대의 수도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목적지에 도착해버렸다.
여기서부터는 어떻게 될지는 완전히 미지수였다.
시간이 벌써 해가 질 시간을 넘었는지 어두워진 창고 내부를 조명이 비추었다.
아무대서나 가져온 듯한 의자 위에 앉아 있던 남자가 하나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 조명 속에서 내 쪽으로 걸어왔다.
이 남자가 누군지는 모른다.
다만 눈치로 이들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뿐이다.
“만나서 반갑다, 신요현. 여기까지 오는 자리가 많이 불편했나?”
어딘가 독사를 닮은 남자의 말에 나는 여기저기가 욱신거리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승합차 안에서 날뛰면서 생긴 상처들이었다.
“많이 불편하던데요. 다음엔 좀 친절한 사람들로 보내줬으면 좋겠습니다.”
날 끌고 온 남자들이 ‘네가 날뛴 거잖아!’라는 시선으로 노려보았지만 무시했다.
흐름을 보아하니 바로 날 해칠 듯한 기미는 없었다.
나는 최대한 말리지 않기 위해 태연을 유지하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손짓을 하자 부하들이 의자를 가져왔다. 나와 남자의 것, 두 개였다.
그곳에 앉고 서로를 마주본 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난 안일혁이라고 한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까? 너와 함께 다니고 있던 남녀, 그들은 뭐지?”
“그걸 왜 궁금해 하는 거죠? 영화배우로 스카웃이라도 하려고요? 확실히 부모가 누구인지 둘 다 쩔어주는 외모이긴 하지만 연기는 못할 걸요?”
“우리가 영화 관련 사업하는 걸로 보이나?”
흉흉한 분위기의 남자들과 폭력적인 일을 모두 가려줄 것만 같은 창고의 모습을 턱짓으로 가리키는 안일혁.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촬영 세트라고 약간의 기대를 갖긴 했죠.”
“지금으로부터 이틀 전, 수요일 밤. 그 동안 노리고 있던 불곰파를 처치하려 간 내 부하들이 전멸 당했다. 그 이후에 이뤄지려던 마약 거래도 망쳤지. 느닷없이 나타난 너희 쪽 남자 때문에. 그뿐일까. 바로 어제는 너와 함께 있던 여자가 내 부하를 고자로 만들었어. 아쉽게도 증거는 없지만 심증은 있지.”
“저희가 사람 간수를 제대로 못해서 실례를 끼쳤습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그 얘기까지 꺼낸 걸 보면 이미 다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부러 시치미를 떼서 기력만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그에 관한 피해 보상을 물으려고 절 데려온 건가요?”
“아니.”
“……그렇다면?”
그 물음에 안일혁은 나이프를 꺼냈다.
그의 손에서 휘리릭 돌아가는 나이프는 평소에 관리를 잘 했는지 예리한 빛을 내고 있었으며, 뱀의 송곳니처럼 휘어져 있는 모습이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원래 바닥은 힘과 돈도 중요하지만, 체면이라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거든. 만만하게 보였다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승냥이 떼처럼 달려들어 물어뜯기 십상이지. 내 휘하의 부대가 일개 지나가던 사람1에게 전멸 당했다는 말이 돌면 얼마나 꼴이 우습겠어?”
안일혁이 저벅 저벅 걸으며 내 뒤로 돌아간다.
나이프를 든 위험한 남자가 내 시야 밖에 있다는 건 그 사실 하나만으로 위압감이 엄청났다. 마치 보이지 않는 뱀이 내 뒷목을 혀로 핥는 듯한 느낌이다.
애써 태연을 유지하고 있던 표정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보복이란 건 필수지.”
“……전 그 녀석들이 아닌데요?”
“알아. 그런데 아무리 조사해도 정체는커녕 위험도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녀석들을 무턱대로 공격하는 건 멍청한 짓인 것 같더라고.”
“그래서 보복 대상을 만만한 나로 바꿨다?”
“그래!!!”
콰각!!
억눌린 무언가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그 소리에 몸이 잠시 뛰어올랐다가 떨어졌다.
안일혁이 휘두른 나이프가 나에게 떨어진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이프는 내가 아닌 앉아 있던 나무 의자를 반쯤 파고들다 멈춰 있었다.
내 태연함이 무너지고 겁을 먹은 반응이 나왔다는 게 기쁜 듯 귓가에 비릿한 웃음소리가 닿았다.
“흐흐흐. 확실히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어. 네 팔다리를 끊어놓은 채 보란 듯이 뒷골목에 던져놓을까 생각도 했었지. 그런데 문뜩 다른 욕심이 생기더라고.”
“…….”
“난 강한 놈이 좋아. 강한 놈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 조직은 더욱 크게 성장할 수 있으니까.”
저벅 저벅 걸으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은 안일혁이 다시 나를 마주 보며 말했다.
“그래서 너한테 묻는 거야. 그 두 녀석은 누구지? 어디서 왔어? 뭐 때문에 너와 착 달라붙어 있는 거냐고?”
“……말하면 믿을 수는 있고?”
한 번 나를 가지고 논 상대다 보니 좋은 말투가 나오지 않았다. 사라졌던 분노가 다시 차오르며 공포와 압박을 밀어내고 안일혁을 노려보았다.
기개 하나는 마음에 든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안일혁이 말한다.
“그래. 사실 너와 그 녀석들이 무슨 관계인지는 크게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그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느냐, 없느냐야. 뭘로 회유했어? 돈이냐? 여자냐? 그런 것들을 제공해줄 수 있을 만큼 네가 잘나 보이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군.”
안일혁의 목적이 분명해졌다.
레반과 레테라라는 강력한 무력을 자신이 갖는 것.
뻔히 보이는 헛짓에 나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그에게 말했다.
“안 됐지만 그 녀석들은 무언가를 대가로 움직여주는 게 아니야. 그저 자기들 마음에 따라 내 통제대로 움직여주는 것뿐이지. 만약 언젠가 녀석들의 마음이 변하게 되면 내 말조차 듣지 않게 될 걸?”
“그렇다는 건 지금 네 말은 듣는다는 얘기군.”
“그런데 내가 그쪽 바람대로 그 녀석들을 부려준다는 보장도 없지.”
“맞아. 그래서 본계획은 너를 납치한 뒤 우리 조직으로 회유하는 거야. 돈, 여자, 멋진 살 곳, 많은 사람들을 턱짓으로 부릴 수 있는 높은 위치까지 너에게 제공해줄 생각이었지.”
“그것 참 멋진 일이네.”
나는 시큰둥한 표정을 숨기며 담담히 말했다.
이놈은 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돈, 여자, 새 집, 권력, 그 어느 것 하나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내에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평화로운 공간과 게임 하나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게 나라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날 살려준다는데 굳이 티를 낼 필요가 있을까.
일단 적당히 어울려줘서 이곳을 탈출하는 것만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할 즈음이었다.
안일혁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나마 신사적으로 꾸미던 얼굴을 벗어던지고 독사와 같은 노골적인 눈빛을 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계획이 바뀌었어.”
“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두 녀석이 네 말을 따른다는 건, 그 둘에게 네가 그만큼 중요한 존재라는 걸 반증하는 셈이기도 하지. 그거면 충분해, 녀석들을 다루는 것에는.”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지?”
“너를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방법을 찾았다는 소리야.”
안일혁이 옆으로 손을 내밀자 정장 차림에 한쪽 다리를 절뚝이는 남자가 그의 손에 휴대폰을 올려놓았다.
그게 내 휴대폰이라는 걸 알아보고 눈이 커졌다.
승합차에 납치될 때 내 주머니에서 꺼내간 그것이었다.
“야! 뭐하려는 거야!”
“내 신변은 좀 더 우리가 맡고 있어야겠어. 흐음……. 연락처가 왜 이리 적어? 너 친구 없냐?”
멋대로 남의 휴대폰을 가져간 안일혁은 멋대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필이면 평소 귀찮아서 잠금 패턴을 설정해두지 않았으니 휴대폰을 사용하긴 쉬웠다.
마음대로 남의 연락처 목록에 들어간 그는 곧 눈을 빛냈다.
“오! 이 레반하고 레테라라는 이름, 특이하긴 한데 그 두 녀석의 이름인가? 그렇다면 그 녀석들과의 연락은 이것으로 하면 되겠군.”
“야!!”
네가 녀석에게 달려들려 하자 주변의 장정들이 내 몸을 붙잡으며 억눌렀다.
“소중한 사람이 있는 것들은 참으로 이용해먹기 쉽거든. 이 두 녀석에게 네가 참 소중한 모양이던데, 너를 인질로 잡고 협박한다면 우리의 말을 들을까, 안 들을까? 우릴 찾아내려고 해봤자 뭐 어쩌겠어?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한들 고작 사람 두 명인데. 우리가 꼭꼭 숨으면 찾아낼 방도가 없지.”
찰칵.
안일혁은 히죽히죽 웃으며 정정들에게 억눌려 있는 내 모습을 내 휴대폰으로 찍었다.
“그 녀석들에게 너의 사진을 보낸 뒤에 어느 조직을 박살내지 않을 시, 네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린다고 하면 얼마나 말을 잘 들을지 보자고. 시작은…… 그래. 그 눈에 거슬리는 불곰파 녀석들로 할까?”
“이 개자식아!!! 내 휴대폰 내놓으라고!!!”
“걱정 마. 넌 죽이지 않을 테니까. 그 녀석들이 이용가치가 다 하지 않는 한 말이야. 자아, 전송.”
안일혁은 전송 버튼을 누르며 방금 찍은 내 사진과 협박성 메시지를 레반과 레테라의 휴대폰으로 보냈다.
그걸 본 내 표정이 싸해졌다.
나를 인질로 그 두 사람을 마음대로 이용해먹으려는 녀석을 향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끔찍한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SoR는 NPC 살해가 가능한 게임이야.”
“응? 뭐라고?”
뜬금없이 내뱉는 말에 안일혁이 나를 돌아보았다.
정정들에게 억눌린 채 땅만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멍하니 말을 잇는다.
“그 게임의 NPC 중에 ‘하이나르’라고 하는 녀석이 있어. 그 녀석은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친근하게 접근해선 함정에 빠뜨리거나 비열하게 이용해먹으려고 하지. 다시 복수를 하려고 찾아간 플레이어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어. 하이나르를 살려둘 것인가, 그냥 죽일 것인가. 보통 플레이어들은 살려둔다는 쪽을 많이 선택해. 왜냐하면 살려둔 뒤에 녀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많으니까.”
“이놈 갑자기 웬 게임 이야기야?”
어이가 없는 듯 말하는 안일혁이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정장 차림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난 아니야.”
나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도무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다못해 자신들이 지금 무슨 처지에 놓인 건지도 모르는 이 머저리 인간들을 향해 설명 주는 수밖에 없었다.
“난 하이나르를 살려준 적이 한 번도 없어! 비열하게 날 이용해먹으려는 녀석은 정말로 싫어했으니까! 레아 때도, 레반 때도, 레테라 때도, SoR을 플레이하는 내내 그런 녀석은 단 한 번도 살려준 적 없단 말이야!!”
“이 새끼, 이제 보니 완전히 돌았나 보네. 몇 대 패서 기절시키고 아무데나 가둬나.”
“이 멍청아!! 내 말이나 잘 들어!! 이거 늬들 얘기라고!!”
뒷머리를 누르는 우악스러운 손을 악을 써가며 밀어내고 눈앞에 안일혁을 바라보며 외쳤다.
“내가 말했지! 녀석들이 날 따르는 건 순전히 녀석들의 마음이라고! 그런데 지금부터는 그녀석들이 어떻게 나오든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 SoR에서 해온 내 모든 행동이 녀석들의 성격으로 반영된 거라면!! 너희들은 이제부터 저지를 행동은 하나밖에 없단 말이야!!!”
그게 허세도 뭣도 아닌 진짜 경고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일까.
나를 억누르던 장정의 손이 살짝 떨려왔다.
“당장 날 풀어주고 휴대폰 돌려줘!! 지금 연락하면 늦지 않았을지 몰라!!”
“너 진짜 돌았구나? 지금 누가 누구에게 명령질이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더는 못들어 주겠다는 듯 안일혁이 옆에 있던 부하에게 눈짓했다.
쇠파이프를 든 그 부하는 나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다가왔고, 나는 더욱 악을 질렀다.
“씨팔!!! 상황 파악 전혀 못하는 건 그쪽이잖아!!! 내가 그놈들을 모르겠냐!! 레벨 1 햇병아리 시절부터 줄 곧 키워왔는데, 내가 그놈들을 모르겠냐고!!”
그래. 내가 납치되었다고 한들, 그 두 사람은 절대 내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돼서 가만히 벌벌 떨고만 있을 녀석들이 아니었다.
SoR 시기부터 항상 그래왔지 않던가.
『당하면 그 즉시 갚아주러 간다.』
콰아아아아앙!!!
쇠파이프가 내 머리로 떨어지기 직전, 갑작스레 들려온 굉음에 일동이 침묵에 잠긴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의 시선이 창고의 입구로 향했다.
철판으로 덮여 있는 문이 지금 잔뜩 우그러진 채 한쪽이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바깥쪽에서 커다란 돌덩이라도 던진 것처럼.
“……이봐. 정 실장. 지금 밖에 누가 있었지?”
뭔가 불길함을 느낀 건지 잔뜩 낮아진 안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호를 비롯한 다섯 명이 밖에서 망을 보고 있었을 겁니다.”
콰아아아앙!! 콰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아앙!!!!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또 다시 굉음과 함께 문이 우그러진다. 문이 우그러지며 볼록 튀어나온 것도 총 다섯 개가 되었다.
그중 하나는 철판이 찢어져서 너머에 있던 무언가가 살짝 안쪽으로 삐져나왔다.
그건 피투성이에 살아있는지조차 모를 사람의 얼굴이었다.
볼록 튀어나온 무언가가 전부 사람이 날아와 박힌 흔적이었던 것이다.
“서, 상호 형님……?”
그의 얼굴을 알아본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사람들이 박혀 있는 철판문이 옆으로 움직이며 입구가 열린 것은.
그곳으로 들어온 건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동양적 외모와는 거리가 먼 내 게임 캐릭터들.
레반과 레테라였다.
“형님!! 무사하십니까!?”
창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레반이 쩌렁쩌렁 울리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거기에 담긴 열기가 뜨겁다 못해 불타버릴 것 같았다.
뒤이어 들어온 레테라는 어딘가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한 손에는 휴대폰을 쥐고 물었다.
“오라버니~! 조금 전에 저희에게 협박 문자를 보낸 빌어먹을 새끼가 누군지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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