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고인물이란 5
* * *
산이 많고, 그나마 있는 평야에도 도시가 밀집한 이 나라에서 보기드믄 평평한 지평선이 이어지고 있었다.
조금 전의 폭풍으로 지상의 모든 구조물이 날아간 탓이다. 높이 3m를 넘어가는 물체는 보이지 않았다.
쿠구궁……!!!
멀리서 전해지는 폭음과 진동.
마치 노을이라도 진 것처럼 세상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흉흉한 기운이 지평선 쪽에서 이어진다.
마치 전란(戰?)의 불길이라도 치솟는 것 같았다.
흑룡 아그나벨리어스의 폭거는 이어지고 있다.
그저 날갯짓 하나만으로 수천 톤의 다이너마이트에 맞먹는 폭발이 일어나며 지상에 모든 생명을 앗아간다.
나는 멀리서 솟구치는 불길을 바라보며 흑룡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율이 만들어낸 가짜 도시가 진짜 신월시를 본뜬 거라면, 넓이도 똑같을 테지.’
하늘을 시계방향으로 크게 선회하는 흑룡은 지금쯤 동쪽 농촌 지역 부근을 파괴하고 있을 것이다.
도심 지역인 서쪽과는 정반대 편이다.
‘흑룡이 부수며 이동하는 속도를 생각한다면, 이곳에 돌아올 때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5분가량.’
이 정도면 할 수 있다.
아니, 설사 될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억지로라도 해야 했다.
나는 하티를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넌 먼저 돌아가.”
“또 그 소리예요?”
하티는 눈매를 좁혔다.
어떻게 해서든 티켓을 돌려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 티켓은 네 정당한 보수라니까. 그리고 우리도 마냥 죽을 생각은 없어.”
나는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 못하고 아직도 지상으로 기어 나와 서성이고 있는 샌드웜의 모습이 보였다.
몸 주변으로 여전히 탐스러운 황금빛 아우라를 두른 채 말이다.
“흑룡이 도달하기보다 먼저 저놈을 사냥하고 티켓을 챙길 거야.”
“그럼 당신이 먼저 돌아가도 되잖아요. 여긴 저와 다른 두 사람이 해결할게요.”
하티의 말은 지극히 정상적인 발언이었다.
이 중에서 전투력이 없다시피 한 건 나뿐이다.
이곳에 남아 발목을 잡는 것보단 먼저 퇴장하는 게 다른 녀석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상적인 발언도 정상적인 녀석들에게나 통하는 거다.
나는 레반과 레테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 없이 저 골칫덩어리들을 감당할 수 있겠냐?”
그 말에 하티는 힐끔 레반과 레테라를 살폈다.
“무슨 소리십니까, 형님. 저희끼리 문제없이 잘 해낼 수 있습니다.”
“그래요. 오라버니는 먼저 돌아서 쉬고 계세요.”
그들은 악의 한 점이 없이 과하게 순수함을 빛내는 눈으로 내 선퇴장을 종용했다.
자신들은 절대 사고 치지 않을 것이라 강조하는 듯.
하지만 그 동안 이들의 행동을 떠올려봐라.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이미 두 사람의 과격함을 체험해본 바가 있는 하티는 굳은 얼굴을 끄덕였다.
“……확실히 전 무리일 거 같네요.”
찌릿.
자신들에게 거들어주지 않고 한발 물러나는 하티에게 두 사람은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하티는 그 시선에 움찔거리면서도 도저히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오히려 한정된 시간에 자신이 더 발목이 될 수 있다는 걸 짐작한 모양이다.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흑룡과의 거리를 계산한 다음 손을 내밀었다.
“그럼 하다못해 이것까지는 하고 갈게요. 힐.”
하티가 시성 마법을 사용하던 온한 빛이 레반과 레테라를 감싸며 그들의 상처를 치료했다.
“남은 마나로는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어요. 움직임에 지장이 있는 상처들만 우선적으로 치료하고, 버프 한 번이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에요. 나머지는 어떻게든 해보세요.”
“그 정도면 차고도 넘치지. 고마워.”
더 이상의 회복수단이 없는 차에 하티의 도움은 정말 큰 보탬이었다.
그녀는 힐을 이어가면서 진지한 얼굴로 말하였다.
“죽지 마세요. 당신들은 꼭 주인님에게 소개하고 싶어졌으니까.”
“걱정 말라고. 연성화는 조만간 만나러 갈게.”
“네, 그러는 게 좋을…….”
하티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놀람과 불신의 감정이 가득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자신의 주인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있다.
어찌나 놀랐는지 레반과 레테라를 치유하는 빛이 약간 흔들릴 정도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막연했던 추측으로 찔러본 건데, 지금 하티의 반응으로 100%가 되었다.
“네 주인이 여성이라며? 거기서부터 혹시나 했지. 넌 잘 모르나 본데, SoR은 극한의 마초적인 게임이라서 그런지 여성 유저의 비율이 한없이 낮아. 그리고 마침 내가 최근에 만난 어떤 여성 유저는 자신이 성직자 캐릭터를 키운다고 말했거든.”
오프라인 모임에 나왔던 그 교복차림의 소녀를 떠올린다.
연성화.
플레이어인지 아닌지 의심되었던 그녀의 단서를 의외에 부분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너 광휘의 창도 사용했잖아. 마나 소모량이 많아서 파티 플레이에선 전체 버프보다 효율이 떨어지지만, 솔로 플레이어에겐 필수적인 공격 스킬이거든. 그 여성도 성직자이면서 솔플을 즐긴다고 말했고.”
“…….”
“오늘 이벤트가 참가하기 전에 한 번 만나보려고 그녀가 다니는 신월 여자 고등학교로 갔었어. 하지만 오늘은 등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마침 네 주인은 게임 참가를 피하기 위해 신월시를 벗어나 있었지. 이 정도면 합리적인 의심 아니야?”
“후우…….”
하티는 한숨을 쉬었다.
거기엔 인정의 의미가 섞여 있었다.
다 들켰으니 더 이상 감출 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도대체가 물러터진 건지 예리한 건지 헷갈리네요.”
“구분할 필요 없어. 둘 다 나거든.”
“주인님에게 소개시켜준다는 말은 취소예요. 만나러 오지 마세요. 당신은 조금 경계해야 할 거 같거든요.”
“그럴 필요는 없는데…….”
뭐, 그래도 하티를 통해서 연성화가 어떤 인물인지 알 거 같았다.
굳이 경계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단은 다른 플레이어를 찾는데 전력을 쏟도록 할까.
쿠구구구구구궁……!!!!!!
‘……살아서 돌아간다면 말이지.’
폭음과 진동이 거세지는 게 느껴졌다.
흑룡이 접근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죽음, 대항불가의 재앙이 거대한 날개와 함께 다가온다.
“엘드라의 축복!”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걸 느꼈는지 하티는 서둘러 치료를 끝내고 마지막 남은 마나로 버프를 걸어주었다.
신비로운 빛이 머리 위로 떨어지며 피로가 쌓인 몸에 다시 활력이 감도는 게 느껴졌다.
나에게도 버프가 걸린 것이다.
“나까지?”
“흑룡이 쫓아오는데 한가하게 왕복할 건가요? 이 정도 버프라면 전속력으로 달리는 캐릭터 에게 매달려도 버틸 수 있을 거예요.”
“그거 좋네.”
하늘에서 흑룡의 그림자가 언뜻 비친다.
진동과 폭음이 더 이상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하티와는 여기서 작별할 때임을 직감했다.
레반의 등에 올라타며 나며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어. 언젠가 기회가 되면 또 보자고.”
“당신들의 과격한 행동을 보면 살아서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인데요. ……아뇨. 각오를 하고 고난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에게 이런 작별인사는 안 되겠죠.”
씁쓸한 웃음을 짓던 하티는 이내 진중하게 표정을 고쳤다.
앞으로 쏘아져 나가기 위해 몸을 숙이는 레반과 레테라, 그리고 나를 순차적으로 바라보더니 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인물에게 경의를.”
“……???”
뜬금없는 말에 내가 의문을 품었다.
여기서 고인물이 왜 튀어나온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을 물을 새는 없었다.
레반과 레테라가 달리기 시작하고, 하티의 모습은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
“대단한 사람을 만났네. 주인님과 만나면 죽이 잘 맞을 거 같은데…….”
하티는 멀어져 가는 신요현 일행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동시에 만나게 하기가 꺼려져……. 왜지?”
그녀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 신요현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알 거 같다.
그런 그에게 친근감과 동시에 경계심이 들었다.
처음엔 경계심의 근원이 그의 예리한 면모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되짚어 보면 그것도 아닌 거 같다.
그가 예리하든 말든 자신의 주인을 위험에 처하게 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뭐. 언젠가 알게 되겠지.”
하티는 거기에서 생각을 그만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궁!!!!!
흑룡의 윤곽이 선명히 드러날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검은 날갯짓 아래, 살갗이 뜨거워질 만큼의 뜨거운 폭풍은 흑룡보다 앞서 나가며 지상의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폭풍은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의 벽이 되어 해일처럼 하티에게 밀어닥쳤다.
찌익!
하티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탈출 티켓을 끊었다.
그녀의 몸이 빛무리와 함께 사라졌고, 다음 순간 폭풍이 그녀가 있던 공간을 덮쳤다.
그러고도 폭풍은 멈추지 않았다.
흑룡의 날개짓과 함께 일어나는 파괴의 물결은 함께 저 멀리 달아나고 있는 목표를 먹어 치우려 날아갔다.
***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얼굴을 최대한 숙이는 것으로 정면에서 쏟아지는 풍압을 견디며 내가 말했다.
본래라면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 위에 올라탄 것과 같이 숨을 쉬기도 힘들 터였다.
하지만 하티의 버프 덕분인지 달려가는 동안 말을 할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늬들이 말하는 고인물이 뭐냐? 어째 내가 알고 있는 의미와 다르게 사용하는 것 같은데.”
분명 쓸데없는 의미로 쓰는 거라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하티의 말과 태도를 보면 뭔가 있는 것 같다.
아직 샌드웜에게 닿으려면 멀었다. 흑룡은 점차 우리의 뒤로 다가오는 중이다.
위급한 상황이라는 건 알지만, 조급해한다고 해도 나아질 것 없었기에 잠시 짬을 내며 그들에게 물어본 것이다.
“이쪽 세상에선 다르게 쓰는 겁니까?”
“뭐, 요즘은 칭찬에 의미도 있지만 멸칭의 의미가 더 강하지 않을까. 유래로 보나, 사용처로 보나 말이야.”
고인물이란 말 그대로 고여 버린 물이다.
그만큼 한 분야에 오래도록 파고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고인물은 깨끗한 물의 순환을 방해한다.
그 분야의 정체와 곪음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로인해 고인물은 뉴비나 변화의 물결에서 갈등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그런 때이다.
그런 내 얘기를 들은 레반과 레테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인물이 그런 의미였습니까? 그럼 저희가 잘못 사용하고 있었나 봅니다.”
“고인물이라는 말을 알게 된 것도 유저들끼리의 채팅이었거든요. 뭔가 당연스럽게 사용하는데 그 의미를 몰라 독자적으로 해석한 게 저희 세계에 암암리에 퍼져 있었죠.”
“그럼 너희가 해석한 고인물의 의미는 뭔데?”
그렇게 묻자 두 사람은 고민에 빠졌다.
감각적으로는 알고 있는데 막상 말로 표현하려니 어색한 것처럼 보였다.
“고인물이란…….”
“오라버니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뭐냐고? 욕이냐?”
뭔가를 전달하려고 하는데 제대로 되지가 않는다.
나 같은 사람이란 게 뭔데? 방구석 폐인? 고인물의 의미와 그리 다를 거 없어 보이는데.
샌드웜이 흑룡을 발견하고 놀라는 모습이 보인다. 뒤편에서 들리는 굉음이 점차 가까워진다.
그런 와중에 두 사람은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예전에 미믹과 싸운 적이 있지 않습니까? 형님은 그때 저희만 목숨을 거는 걸 원치 않는다며 그 미약한 몸으로 미믹을 막으려 했었습니다.”
“또 있어요. 홍련 마을에서 병으로 죽어가는 노인을 만났을 때, 오라버니는 귀한 여신의 눈물을 선뜻 건네주었죠.”
그들이 말했던 사건.
확실히 난 그때마다 고인물이라는 소리를 들었었다.
“이번에도 그렇습니다. 형님은 오늘 처음 만난 타인을 위해 자기 몫의 티켓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저희와 함께 샌드웜을 잡으려 달려가고 있어요. 무엇 하나 쉬운 거 없는 어려운 선택뿐이었어요.”
흑룡을 보고 겁을 먹은 샌드웜이 온몸을 드릴처럼 회전시키며 땅을 파헤쳤다. 땅 속으로 들어가 숨으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튕겨져 나온 거대한 콘크리트 파편 하나가 놈에게 가까이 근접했던 우리들 머리 위로 떨어졌다.
레반과 레테라는 별 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피해내며 말을 이었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갑옷을 벗거나 굳이 맨주먹으로 싸우거나, 충분히 강한데도 이상하게 핸디캡을 짊어지는 사람들이. 굳이 어려움을 자초하려는 사람들이.”
“그들은 끊임없이 무언가에 도전해요.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보상이 더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고난을 감내하며 끝내는 산 정상에 오른 것 같은 후련함으로 만족하죠.”
“저희는 그런 도전을 멈추지 않은 자들에게 깊은 동경, 그리고 공포를 느낍니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을 바라보듯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걸까요. 쉬운 일이 뻔히 있는데, 왜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하려는 걸까요. 어떻게 그런 의지를 품을 수 있는 걸까요.”
이유라 여러 가지일 것이다.
새로운 자극일 수도 있고, 남들은 하지 않는 걸 시도하는 별종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레반이나 레테라에겐 놀라운 모양이다.
샌드웜의 거대한 몸이 기세를 탄 듯 더욱 빠르게 땅을 파고 들어간다.
떨어지는 파편의 숫자가 늘어갔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마무리 지었다.
“저희는 그런 자들에게 경외심을 담아 그렇게 부릅니다.”
“‘고통을 인내하는 괴물’. 줄여서 고인물인 거죠.”
그거 참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관점이었다.
고인물이라는 구린 명칭에서 그런 단어를 상상해냈단 말인가.
어이가 없어진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뭐야, 그게.”
길게 풀어서 설명했지만, 한 마디로 고생을 사서 하는 타입이라는 거잖아.
역시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혹은 이들을 포함한 다른 캐릭터들은 정말로 그것이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지그문트가 나에게 보낸 호의도, 하티와 헤어질 때 그녀가 정중한 태도도, 전부 고인물을 향한 경의였다.
“혹시 이 이름이 불편하십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쓰지 않을게요.”
“……아니. 마음에 들어.”
어차피 난 고인물이라고 불리는 숙명을 가진 게임 폐인.
기왕이면 좀 더 멋진 의미로 사용하는 것도 괜찮겠지.
우리가 도착했을 땐 샌드웜은 이미 큰 구멍을 남긴 채 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웨폰 체인지, ‘용린 권갑’! 웨폰 체인지, ‘금지된 일족의 쌍단검’!”
바로 좁은 공간에서 싸우기 용의한 무기들을 꺼내주었다.
흑룡은 여기서도 확실히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 왔다. 놈이 일으키는 폭풍의 물결은 거의 코앞이다.
그런데도 그리 무섭지 않았다.
고난만을 대체 몇 번이나 겪어 왔던가.
시간제한이라는 핸디캡 정도는 우습지.
나와 함께 성장해온 캐릭터들이라면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날뛰고 와!!”
나는 그렇게 호기롭게 외쳤다.
“네!”
“형님이 땅에 닿기 전까진 돌아오겠습니다!!”
투웅!
레반은 달리던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은 채 나를 공중으로 내던졌다.
마치 투석기에 의해 날아가는 듯한 속도와 관성이 신체를 관통한다.
신체를 강화한 버프만 없었다면 멀미 때문에 위액이 솟구칠 뻔했다.
레반과 레테라는 그대로 구멍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그들에 모습을 보면서 나는 조금 전의 호기가 사라지고 대신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래봤자 약해빠진 인간이 너무 나댔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공중을 부유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커졌다.
레반 이 자식, 얼마나 높게 던진 거야? 이 정도면 추락사를 걱정해야 할 판국인데?
‘아니, 보아하니 내가 땅에 닿기 전에 흑룡의 광역기가 먼저 닿겠구만.’
늦으면 죽는 건 매한가지였다.
피부가 점차 화끈해지는 게 느껴진다.
흑룡의 광역기가 더 몸을 덮치기까지 몇 초조차 남지 않았다.
쿠콰과과아아아아아아앙!!!!!
동시에 굉음이 바로 아래쪽에서 터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땅 이곳저곳이 갈라지며 샌드웜의 몸체가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는 게 보였다.
거의 반경 20m의 땅이 녀석의 몸부림으로 엉망이 되었다.
땅 위에 있었다면 감히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거의 건물만 한 놈이 저렇게 괴롭게 몸을 뒤틀어대니 얼마나 두 사람이 맹공을 가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녀석의 모든 신체 급소는 머리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머리만 공략한다면 아슬아슬하게 시간이 맞을 거 같은…….
“아니! 늦었어! 이건 시간 못 맞춰!!”
폭풍이 만들어낸 거대한 벽이 다가오는 속도가 예상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흑룡이 아직도 잡벌레가 남았다며 스피드를 올리기라도 한 것일까?
이유가 뭐든, 저것에 닿는 순간 내 뼈와 살은 분리대고, 남은 뼈조차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두 사람이 지금 당장 샌드웜을 쓰러뜨린다고 해도 티켓을 회수해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부족했다.
내가 땅에 닿기보다 먼저, 흑룡의 폭풍이 나를 집어삼킨다!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순간, 땅을 뚫고 샌드웜에 머리가 튀어나왔다.
잠깐 사이에 녀석의 머리에는 무수한 상처가 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숨통을 끊지 못했다.
역시 시간에 맞추지 못한 건가 생각했을 무렵, 녀석의 몸체를 박차고 무언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바로 레테라였다.
“꽉 잡으세요, 오라버니!”
“뭣……!?”
순식간에 나를 감싸 안은 레테라가 일정 방향으로 유도하듯 몸을 뒤틀며 함께 떨어져 내렸다.
우리가 떨어지는 곳에 있는 건 샌드웜의 머리.
무직한 주먹으로 녀석의 이빨을 모조리 털어내 버린 레반이 고통 속에서 고개를 든 샌드웜의 머리를 강제로 벌리고 있었다.
‘그렇구나! 이 녀석들도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을 예상해서……!’
떡 벌어진 샌드웜의 동굴 같은 입안으로 몸을 날린다.
웬만한 빌딩에 맞먹을 정도로 우뚝 선 샌드웜의 몸 안으로 우리 셋은 수직으로 낙하며 떨어졌고, 동시에 흑룡의 폭풍이 우리를 삼킨 샌드웜을 때렸다.
“키…아……!!!”
그나마 짧은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었던 건 녀석의 몸이 튼튼했던 덕분일 것이다.
녀석의 몸이 순식간에 타들어 가 숨이 끊어지는 게 신체 내부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숨이 끊긴 샌드웜의 몸이 재가 되듯 사라져간다.
재가 되어 사라지는 부분을 시작으로 감당하기 힘든 열기가 신체 내부로 파고들어 온다.
“티켓! 티켓을 찾아!”
그 열기로부터 나를 지키듯 몸에 두른 팔을 거두지 않은 레테라가 외쳤다.
재가 되어가는 샌드웜의 몸과 열기가 뒤엉키는 혼돈의 도가니 속으로 떨어지며 레반과 레테라, 그리고 나까지 티켓을 찾아 필사적으로 눈을 움직였다.
“찾았다!”
레반이 외쳤다.
우리보다 조금 위쪽에서 떨어지는 그는 재 속에서 튀어나온 종이 한 장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하필 무너진 신체로부터 새어 들어온 열기의 폭풍이 레반을 덮쳤다.
“크헉!!”
피부가 살짝 녹아내릴 정도의 화상과 함께 레반의 자세가 무너졌다.
덕분에 티켓에서 그의 몸이 멀어졌고, 아쉬운 대로 레테라가 그것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크윽!!”
그러나 그녀답지 않게 헛손질을 하였다.
나를 지키느라 등 뒤에서 쏟아지는 열기를 정통으로 맞았기 때문에 초점이 흐려진 것이다.
티켓은 그녀의 손을 지나쳐 팔을 타고 움직이다 떨어져 나가려고 하였다.
덥썩!!
티켓이 완전히 떨어지려는 순간, 오직 그것만을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던 내가 손을 뻗어 그것을 붙잡았다.
“탈출해!!!”
그렇게 외치며 티켓의 끝을 입에 물었고, 레반과 레테라도 동시에 품 안에 간직하고 있던 티켓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완전히 허물어진 샌드웜의 몸을 뚫고 들어온 열기가 모든 걸 뒤덮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