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환생(5)
끼에엑-
포효를 내지르던 그리폰의 모습이 사라진다. 빛무리로 변하며, 한 여인의 손아귀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수십 명의 시선이 여인에게 꽂혔다.
고지태와 대화를 나누던 우빈 역시 그 여인을 바라봤다.
흑발의 긴 생머리, 사납게 올라간 눈매와 표독스러운 입술.
‘하선율?’
엘리드에서 봤을 당시엔 고약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화장을 곁들이자, 감상은 약간 달랐다.
패션 잡지의 표지 모델 같다고 해야 할까.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진했다.
“와···. 진짜. 미쳤네.”
“고지태에 이어서 하선율까지? 아무리 신기록을 갈아치웠다고 해도 이게 말이 돼?”
하선율을 발견한 스카우터들이 자포자기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당장, 고지태의 등장으로도 스카웃을 포기하곤 떠난 사람이 절반 이상이었다.
척결이라는 대형 길드의 CEO와 경쟁해서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았음에도 아직 수십 명의 스카우터가 우빈과 고지태의 주변을 맴돌았다.
길드에 포기했다고 보고를 올릴 수 없는 말단 혹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남은 이들이었다.
안 그래도 상황이 좋지 않았는데, 하선율의 등장으로 실낱같이 남아있던 희망마저 사그라들었다.
“내··· 내, 멕라렌이··· 아직 할부가 30개월도 더 남았는데···.”
김오준이 그리폰의 강력한 발톱에 짓눌린 자동차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박살 난 자동차 위에 있던 하선율이 김오준을 발견하곤, 차 밑으로 내려온다.
“강우빈은 어디 있어? 어디 못 가게 붙잡았지?”
“네. 저기에···”
김오준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장소를 가리켰다.
“진짜, 왔잖아.”
우빈을 발견한 하선율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대로 우빈을 향해 걸어가려다, 풀이 죽은 김오준의 등을 후려친다.
짝!
“으악!”
“사내 자식이 고작 차 한 대 가지고. 표정 안 풀어? 더 좋은 걸로 한 대 사줄 테니까.”
“네? 진짜요?!”
하선율의 말에 김오준의 표정이 밝아진다. 김오준은 우빈에게 다가가는 하선율을 보며, 찔끔 나온 눈물을 쓸었다.
‘진짜 오셨잖아···.’
하선율은 평범한 길드의 마스터가 아니었다. 한국 랭킹 2위라는 미친 기록을 넘어, 헌터 백화점 메인 모델, 게이트 캠페인 홍모 모델 등 각종 매스컴에 얼굴을 올린 대스타였다.
당장, 주변 사람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세계 기록을 갈아치운 의문의 신입 S급 헌터. 그 헌터 달려드는 스카우터가 시청 주변을 배회했다.
거기다 무려 한국 랭킹 3위인 고지태가 등장했음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고개만 빼꼼 내밀어 누구인지 확인만 할 뿐, 직접적으로 나와서 말을 걸거나 구경하는 사람은 적었다.
하지만 하선율이 이 자리에 나타나자, 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하선율이잖아.”
“생각보다, 엄청 작네. 이쁘다.”
“언니! 이번 CF 너무 이쁘게 잘 나왔어요.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주세요.”
어느샌가 주차장 주변으로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렸다.
“김오준! 찻값은 해야지 뭐라도 좀 해봐.”
저 멀리서 인파에 둘러싸인 하선율이 김오준을 다급히 물렀다.
“네? 네! 가요!”
김오준은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사람들을 제지하며, 생각에 잠겼다.
고작 신입 한 명 영입하겠다고 마스터가 직접 온다고 했을 땐, 이해가 안 가면서도, 저 사내의 재능이 짜증 났다.
그러나 실제로 그 장면이 펼쳐지자, 생각이 바뀌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건가.’
하선율은 오늘 백화점 화보 촬영이 있다고 했었다. 1번 펑크낸다고 계약이 끝나는 건 아니지만, 최소 수억 원이 움직이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까지 내팽개치고 바로 달려오다니.
도대체 누구길래 마스터가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부럽네.’
우빈에게 열등감과 적의를 품던 김오준의 눈빛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
“그러면 내일 있을 실습 준비 잘하시고, 조회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교관이 나가자,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하나둘씩 나갈 채비를 한다.
“겜방 고?”
“콜.”
“섬머 세일한다던데, 구경하러 갈래?”
시끌벅적하면서도 밝은 분위기는 평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아이들의 중심에 있어야 할 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학생은 다름 아닌 고우림이었다.
반 학생이 절반가량 빠진 그때, 여학생 무리 중 단발머리를 한 학생이 운을 뗐다.
“우림이 말이야. 진짜 전학 간 거 맞아?”
“교관님이 그랬잖아. 맞겠지.”
“이상하잖아. 어제도 학교 안 나오고.”
교관의 말로는 집안 사정 때문에 갑작스럽게 전학을 가게 되었다는데, 너무 이상했다.
“게시판에 올라왔던 글 있잖아. 보스 살려서 죽을뻔했다던. 그거 범인이 우림이가 범인이었던 거 아니야?”
“뭐? 그럴 리가···.”
“이상하잖아. 사건 터지고 바로 결석한 것도 그렇고, 갑자기 전학 간 것도 그렇고. 다른 애들은 다 출석했는데 우림이만 없잖아.”
대화를 나누던 아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짐을 챙기던 강희나에게 향한다.
“희나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어? 뭐가?”
“우리가 말한 거 들었잖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 그게···”
강희나는 아이들의 질문에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답을 망설였다.
희나는 고우림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 어제 본인의 입으로 실토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굳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을 정도로 오빠가 알아서 처리해준 모양이었으니까.
“몰라. 나중에 우림이 오면 직접 물어봐. 나는 실습 준비를 해야 해서 먼저 가볼게.”
대충 얼버무리며, 자리를 뜨려는데.
“와··· 대박 대박!”
단발머리의 학생이 엄청난 것이라도 발견한 듯 눈을 번뜩이며, 아이들에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뭔데 그래.”
“이것 봐봐. 미쳤어.”
내민 액정으로 하나의 기사가 보였다.
[척결 길드의 고위 간부, ‘고’이사. 500억 횡령.]
-오늘 아침 척결 길드의 고 이사는 자신이 회사 자금 약 500억 원 상당의 자금을 횡령했다고 자수를······.
별다른 것 없는 평범한 기사였다. 다만, 몇 가지 키워드가 아이들의 눈을 반짝였다.
“척결 길드에 고 이사? 저거 우림이 아빠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자기 아빠 엄청 높은 사람이라고 맨날 자랑하고 다녔잖아.”
“미쳤다. 이것 때문에 학교 결석했었나 보네. 와··· 500억. 통도 크다.”
“그러면 우림이 완전 끝난 거 아니야?”
학생들은 합리적인 추리를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우림이 이제 어쩌냐···.”
“자업자득이지, 걔가 애들 좀 괴롭히고 다녔냐? 솔직히 나는 별로 마음에 안 들었어.”
고우림을 떠올리며, 기사를 읽어나가던 그때, 스크롤을 내리자, 다음 기사가 바로 떠올랐다.
익숙한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운 S급 헌터의 등장!]
어제 종일 메인을 장식했던 우빈의 기사였다.
“아, 맞다. 너네 이 사람 기사 봤어?”
“당연히 봤지! ‘제너슨’ 기록 이 사람이 살아 치웠다며. 어제 뉴스에도 나오더라.”
“와··· 잘생겼다. 옷 좀 봐. 저거 개 비싼 브랜드인데.”
아이들이 우빈을 보며,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우빈의 옆 꼬마에게 시선이 쏠렸다. 익숙한 꼬맹이였기 때문이었다.
“어? 그런데 이 꼬마. 희나 동생 아니야?”
“어디. 어?! 맞는 거 같은데. 저번 운동회 때, 헌터 시합 구경시켜주겠다고 데려왔었잖아.”
또다시 아이들의 시선이 강희나에게 쏠렸다.
희나는 구경하지 말고, 그냥 자리를 떠날 걸 후회하며, 볼을 긁적거렸다. 1년 넘게 학교에 다녔지만, 이 정도로 관심을 받은 건 오랜만이었다.
“어. 유성이 맞아. 정확히는 친구 동생이지만.”
“진짜? 맞아? 그러면 너 저분 알아?”
알다마다, 한집에 같이 사는 처지이지 않은가. 어떻게 답해야 할까.
‘숨길 필요가 있나.’
우빈은 헌터 업계 사람이라면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유명인이 되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려질 사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어 보였다.
“응, 알아.”
“뭐 진짜?!!”
뜻밖의 대답에 학생들이 화들짝 놀란다.
“누군데? 친척이야? 아니면 오유성이라는 애 형?”
“미쳤다. 이분 앞으로 엄청 유명해질 것 같은데, 한번 만나볼 수 있어?”
“어? 그게···”
학생들이 희나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과분한 관심을 보이던 그때였다.
“우와- 엄청 재미있어 보인다.”
강희나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좀 질투 나려고 그러네.”
아이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근원지로 옮겨진 그 순간.
콰직-
“어?”
고우림에게 불만을 품었던 단발머리 학생의 복부로 두꺼운 칼날이 몸을 관통한 채, 솟구쳐 올랐다.
****
“꺄악!!!!”
“사람 살려!”
공포에 질린 여학생 3명이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원래라면 붐벼야 할 복도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누가 좀 도와줘요!!”
“신고, 신고해!”
그나마 이성을 가진 학생 한 명이 핸드폰을 들고 신고를 하려는 그 순간.
콰직!!!!
“쿨럭-”
핸드폰을 든 학생의 등으로 핏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꺄악!!!”
죽음을 직감한 두 학생이 문으로부터 떨어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좀 닥쳐 거슬리니까.”
고우림의 눈은 완전히 돌아간 상태였다.
“허억-허억-”
흥분한 듯 호흡은 가빴으며, 눈은 미친 사람처럼 붉게 충혈되어있었다. 그런 고우림의 등 뒤로 두 학생을 처참히 도륙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체···?”
푸른 빛으로 형상을 이루고 있는 영체였다. 크기는 대략 3M 남짓, 육중한 갑옷을 전신에 두르고 있는 기사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우, 우림아 일단 진정해. 빨리 치료받지 않으면 정선이 진짜 죽어!”
강희나가 처음 복부를 꿰뚫린 단발의 학생 이정선의 복부를 손으로 짓누르며 소리쳤다.
“죽으라고 해.”
“뭐?”
“내 인생은 이미 끝났으니까.”
고우림이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으며 강희나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스릉-
고우림의 손엔 기다란 검이 들려있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왜?”
강희나의 물음에 고우림이 걸음을 멈춘다. 끄윽-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부탁했잖아.”
“······”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는데.”
고우림의 고개가 조금씩 올라오며, 눈이 드러난다.
“감히 나를 건드려?”
고우림의 눈에 살기가 가득 차올랐다. 완전 미친년이 따로 없었다.
“내가 아팠던 것만큼 똑같이 갚아줄게.”
고우림의 낮은 음성이 흘러나온 그 순간.
끼리릭-
고우림의 등 뒤에서 거대한 위용을 내뿜던, 영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대 죽이지 마, 우선 다리부터 분질러.”
고우림의 명령에 끼리릭- 거대한 영체가 검을 집어넣곤, 강희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철벅- 철벅-
한 걸음 한 걸음,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밀려드는 압박감이 엄청났다.
고블린 따위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두근-두근-
그런데 왜일까.
‘오빠···’
강희나의 표정은 게이트에서 습격을 받았을 때보다 평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블린에게 습격을 받았을 때의 경우엔 아무것도 없었던 반면.
띠링-
[스킬 카드: 비브타노의 피부]
종류: 스킬 카드
등급: UL
레벨: 10
형태: 패시브
효과
-피부의 강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추가 효과
-물리 방어력 100% 증가.
-물리 방어력 200% 증가.
-물리 방어력 300% 증가.
-물리 방어력 400% 증가.
-피부 강화 획득.
-물리 방어력 500% 증가.
-물리 방어력 600% 증가.
-물리 방어력 700% 증가.
-비브타노의 복수 효과 획득.
*비브타노의 복수: 피해를 입을 시, 방어력 수치만큼 데미지를 반사합니다.
지금 경우, 스킬 슬롯에 든든한 방패 한 장이 잠들어있었으니까.
그런 강희나의 보험을 아는지 모르는지.
끼리릭-
명령을 받은 거대한 영체는 강희나를 향해 거대한 손바닥을 내질렀고, 콰드득- 있는 힘껏 강희나의 다리를 움켜쥔 그 순간이었다.
띠링-
[비브타노의 복수가 발동합니다.]
[데미지를 반사합니다.]
기분 좋은 알림이 강희나의 귓가에 맴돌았다.
***
띠링-
[비브타노의 복수가 발동합니다.]
[데미지를 반사합니다.]
쩡!!!!!
영체가 강희나에게 데미지를 입힘과 동시, 거대한 충격이 영체의 육신을 강타한다.
띠링-
[세리타의 기사가 31,256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끼리릭-
그토록 믿음직스럽던 영체가 무릎을 꿇는다.
“뭐야···. 왜 쓰러지는데, 다리를 분지르라고!!!”
그 모습을 본, 고우림은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끼리릭- 무릎을 꿇었던, 영체가 다시금 강희나의 연약한 육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리를 짓이겨버릴 기세로 꽈아악- 움켜쥔 그 순간.
띠링-
[비브타노의 복수가 발동합니다.]
[데미지를 반사합니다.]
쩡!!!
전보다 더 강렬한 충격이 영체의 육신을 강타했다.
띠링-
[세리타의 기사가 43,211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세리타의 기사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어 소멸합니다.]
파스스스-
무엇이든 해결해줄 것 같았던, 든든한 영체가 빛무리로 변하며 소멸하였다.
‘뭐야···’
분노가 가득 차올랐던 고우림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고우림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강희나가 한 거라고는 병신 같이 서서 울먹이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왜 세리타의 기사가 데미지를 입은 것일까.
‘뭐지? 사람을 공격하면 자결하는 스킬이라도 걸려있나?’
그렇다고 치기엔 이미 두 사람을 벤 직후였다.
“우림아, 그만하자. 지금이면 되돌릴 수 있어. 일단, 정선이랑 재희부터 빨리 치료하면.”
안 그래도 짜증 나는 상황에 머리가 복잡한 그때, 강희나가 쓸데없는 말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닥쳐.”
“빨리 치료 안 하면 죽는다고!”
“닥치라고!!!!”
강희나의 다그침에, 고우림이 버럭 소리친다.
‘그냥 죽이자.’
당황으로 물들던 고우림의 표정에 독기가 떠오른다.
원래라면 영체로 괴롭혀줄 생각이었다. 다리를 분지르고, 팔을 뽑아,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그대로 갚아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아무래도 좋았다.
애초에 목적은 단 하나!
“죽어!!!”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흉을 제거하는 것!
고우림은 강희나를 향해 달려 나가며, 손에 들린 장검을 그대로 내질렀다.
쑤욱-
그대로 강희나의 작은 복부를 꿰뚫을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밀어 넣었다.
하지만 왜일까.
캉!!!!
“어?”
분명 강희나의 복부를 찔렀는데, 바위를 때린 듯한 울림이 밀려들었다.
“뭐지···”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
띠링-
[비브타노의 복수가 발동합니다.]
[데미지를 반사합니다.]
고우림의 앞으로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고,
쩡!!!!!
강렬한 충격에, 스르륵- 고우림의 의식은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