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환생(6)
쏴아아-
상쾌할 정도로 시원한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거린다.
뜨거운 햇볕이 달군 도로 위로 고급 세단 한 대가 멈추어 선다.
“어서 오세요. 이사장님.”
한 사내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세단에서 내린 여인이 건조한 표정으로 답한다.
“안녕하세요. 정훈씨.”
깔끔하게 묶은 포니테일. 햇빛에 반사된 머릿결로 붉은빛이 감돈다.
이 여인은 다름 아닌 화민서였다.
화민서에게 인사를 건넨 사내 또한 엘리드에서 화민서와 연이 깊었던 인물인 이정훈이었다.
화민서와 이정훈은 지구에 돌아와 많은 일을 겪은 상태였다.
화민서의 경우, 부신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이정훈의 경우 동료를 지키지 못했다는 상처를 입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둘의 자리였다. 사사로운 개인의 욕심이 아닌, 다수의 행복을 위해 나라에 헌신 중이었다.
“우빈 씨는 어떻게 됐나요?”
“안 그래도 지태 형님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방금 자리를 마련하셨다고 합니다. 연락하신다고 했으니까. 장소가 정해지는 대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면 아직 여유 시간이 있는 거죠? 처리해야 할 서류가 남아서.”
“그러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놓았습니다. 가시죠.”
화민서는 이정훈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애써 표정을 관리하려 했지만,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드디어 왔구나.’
두근-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3년만인가.’
화민서는 지구에 귀환한 뒤로, 두 사내를 찾아다녔다.
첫 번째로 찾은 사내는 다름 아닌 차주성이었다.
엘리드를 멸망시킨 장본인이자, 화민서와 이정훈에게 씻을 수 없는 지옥을 선사한 인물.
어떻게든 찾아내서 죗값을 치르게 해주고 싶었다.
대한민국 전역을 시작으로 일본과 미국, 범죄자들의 소굴인 멕시코까지. 뒤질 수 있는 나라는 전부 뒤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차주성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히 세이버의 핵심 간부였던, 이세현과 함지연, 정현태의 행방 역시 묘연했다.
어디로 증발한 건지, 애초에 넘어오지도 않은 것처럼 그 어떠한 자취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고, 조금씩 지쳐 갈 때쯤 차주성보다 더 중요한 사내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강우빈이라는 사내였다.
18회차 용사들과 같이 모습을 드러낸, 의문의 사내.
등장과 동시, 화민서조차, 처리하지 못한 도민준을 일격에 해결하고, 세이버의 검은 계획을 간파한 인물.
아직도 꿈을 꿀 때면 그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아드로스의 정기에 미칠듯한 갈증을 느끼며, 모든 걸 파괴하던 그때. 갑자기 맑아진 시야로 한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둠 속, 유일하게 하늘로 새어나온 빛을 받는 한 사내가 있었다.
푸른 드래곤과 검은 불사조를 등지고 있던 그 모습은 그야말로 영웅 그 자체였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 살아갈수록 우빈에 대한 갈망이 커져갔다.
당장, 조금 전 있었던, 회담의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국내에 자리 잡은 미국에서 몇 가지 제안을 제시해왔다.
매년, 한국에서 생산된 마정석의 10% 지불, A급 이상의 게이트 생성 시, 미국에게 우선권 부여. 한미 연합으로 획득한 아이템의 소유권은 미국에게 있다. 등.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이야기했다.
들은 가치도 없을 정도로 한국에게 불리한 내용뿐이었지만, 한국은 거절할 수 없었다.
스스로를 지킬, 평화를 유지할 힘이 없었으니까.
‘이제부터 시작이야.’
꽈드득-
화민서의 주먹으로 힘이 들어갔다.
확신했기 때문이다.
무려 3년 만의 등장이다.
왜일까. 왜 다른 사람들이 전부 귀환했을 때, 나타나지 않고 지금 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이유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것이다.
모두가 검은 불길에 타죽어 지구로 귀환한 반면, 저 사내는 끝까지 살아남아 엘리드에서 생존을 이어나간 것이다.
그 말로가 엘리드의 구원인지, 아니면 우리와 같은 죽음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저 사내의 등장으로 앞으로의 판도가 크게 변할 거라고.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인물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설마 그 새끼들도 돌아온 건가.’
화민서가 이정훈을 따라 걸어가며, 앞으로의 상황을 유추하던 그때였다.
“이거 안 놔?!”
“내가 먼저 집었어!”
조용해야 할 교내로 시끄러운 잡음이 들려왔다.
소음의 근원지로 학생 수백 명이 모여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글쎄요. 저도 잘···”
화민서와 이정훈은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학생들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학생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잘 정비된 칼을 시작으로 굵직한 마정석이 박힌 갑옷까지. 학생들은 바닥에 버려진 아이템의 소유권을 가지고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이템이 왜, 길가에···.”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
쩡!!!
화민서의 높은 감각 수치에 강렬한 마력의 충돌이 느껴졌고, 무의식적으로 펼친 감각을 따라 이동하자, 공포와 피로 물든 하나의 교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사장님···. 도와주세요.”
***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교실에 쓰러진 학생은 총 3명이었다.
문 앞에서 신고하려다 등을 베인 김정선, 고우림을 험담하다, 복부를 꿰뚫린 오재희. 그리고 이 사건의 원흉으로 지목된 고우림.
“그러니까. 우림이가, 영체를 소환해서 너희를 덮쳤다고?”
“네! 눈깔이 완전히 돌아가서는 갑자기 공격했어요.”
고우림의 습격에서 부상을 면한 두 학생이 화민서에게 증언한다.
화민서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손에 들린 푸른 돌을 만지작거렸다.
‘고우림이 희나를 공격했다고···.
학생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이러했다.
고우림이 갑자기 나타나, 두 여학생을 찌른 뒤, 강희나를 공격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희나를 공격하던 영체가 소멸, 고우림 역시 희나를 칼로 찌른 그 순간, 기절했다고 한다.
몇 가지 상황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알아본 결과 사달이 벌어지기 전, 희나네 반을 제외한 전교생에게 한 통의 문자가 발송되었다고 한다.
-학교, 화단에 아이템 뿌립니다. 먼저 줍는 사람에게 상으로 드릴게요.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이없는 내용의 스팸 메시지였다.
하지만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게 너무나도 명확했기에,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그 결과가 아까 밖에서 본 광경이었다.
아마도 학생들의 시선을 쏠리게 해서 강희나를 고립시키기 위한 고우림이 계획한 거겠지.
물론, 굳이 밝은 대낮에 방해꾼이 가득한 교내에서 문자와 아이템까지 버려가며, 강희나를 공격한 행동 자체부터 이상했지만, 고우림이 이성을 잃어서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증언이 있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한 거지.’
띠링-
[세리타의 기사 영혼석]
종류: 영혼석
등급: A
레벨: 79
효과
-세리타의 기사를 소환한다.
화민서의 손에서 푸른 보석이 반짝인다. 고우림에게서 얻은 영혼석이었다.
등급은 무려 A급. 레벨 또한 79로 엄청난 수치를 보여주었다.
당장 이 영체만 있다면 E급 게이트 하나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강희나는 이 영체를 제압했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반격 계열의 스킬을 사용한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효과를 가졌길래,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메꿀 수 있었던 것일까.
너무 궁금했지만, 지금으로선 의문을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강희나라면 상처를 입은 학생들과 함께, 치료 센터로 이송한 상태였으니까.
화민서가 강희나에게 호기심을 갖던 그때였다.
“이사장님, 준비됐다고 합니다.”
이정훈이 기쁜 소식을 알려왔고,
“감사합니다. 여기는 정훈씨한테, 맡길게요.”
화민서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내와의 재회를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끼이잉-
고래 한 마리가 허공을 떠돌며 주변을 배회한다.
“잠깐만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좀 하세요!”
김오준이 달려드는 기자를 막으며 진땀을 흘린다.
“진짜 여기서 드시게요? 제가 준비해둔 식당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가시죠.”
“여기까지 와서 뭘 또 가. 좋기만 하고만. A 세트부터 E 세트까지 전부 주세요.”
고지태가 협소한 장소에 우빈에게 제안하자, 하선율이 냉큼 음식을 주문하며, 방해한다.
“저도 여기가 좋습니다.”
우빈은 자리에 앉아, 물을 홀짝이며, 긍정적으로 답했다.
이들이 온 식당은 다름 아닌 중국집.
어찌보면 이상할 게 하나 없는 광경이었다.
멀리서 보면 남자 둘과 여자 한 명이 중국집에서 음식을 시킨 것뿐이었으니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들의 직책이 문제였다.
당장, 중국집 밖을 보아라.
“무슨 이야기 하는 거 같냐?”
“길드 가입 권유, 뭐 그런 거 아닐까요?”
“추측 말고 새끼야. 녹음기 증폭 키워서 켜놓아.”
“네!”
어디선가 소식을 들은 수백 명의 기자가 몰려, 우빈과 하선율, 고지태를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 밝은 대낮인데도, 반짝거리는 셔터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저 새끼들이 진짜 시끄럽게. 확 그냥 밟아버려?”
하선율이 사납게 미간을 찌푸린다. 그러다 문득, 기자들보다 더 거슬리는 존재에게 시선이 꽂혔다.
끼이잉-
물속 마냥, 배를 뒤집어 까며, 유유히 우빈의 주변을 떠도는 고래 한 마리였다.
포동포동한 볼, 보석같이 반짝이는 피부 빛깔이 묘하게 익숙하다.
“저거 설마, 아니지?”
“뭐가요? 이거요?”
하선율의 물음에 우빈이 귀찮게 주변을 맴도는 레이를 가리킨다.
“어, 어디서 많이 본 놈이랑 비슷하게 생겨서 말이야.”
“생각하신 그거 맞습니다. 레이핀의 새끼입니다.”
“뭐?!”
하선율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번쩍 일으켜 세운다.
끼이!
깜짝 놀란 레이가 우빈의 등 뒤로 몸을 숨긴다.
“그래, 말 한번 잘했다. 여태까지 뭐 하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하선율은 이 자리에 모인 핵심을 물었다.
“한 분 더 오신다면서요. 그때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빈은 능청스럽게, 수저를 세팅하며 답했다.
‘이 사람도 제법 유명한가 보네.’
우빈은 하선율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레이핀이 폭주하고, 지옥 겁화로 전부 사망한 이후. 엘리드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특히, 크로노스와의 대화를 통해, 우빈은 여기 있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지만, 우빈은 사회적 힘이 필요했다.
가령, 2주를 기다려야 할 비자 발급을 바로 해결해줄 능력이라던가. 귀찮게 달라붙는 기자나 스카우터를 제거해줄 비서라던가.
‘어디까지 해주려나.’
우빈은 흥미로운 상황을 즐기며 머리를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철컹-
얼마 지나지 않아, 귀찮을 일을 해결해줄 유능한 해결사 한 명이 더 추가되었다.
“오랜만입니다. 우빈씨.”
***
대략 1시간이 흘러갔다.
“후아··· 배불러.”
하선율이 볼록 튀어나온 배를 통통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듯 웃는다.
탁자 위로 수십 장의 빈 그릇이 나뒹굴었다. 어림잡아도 20인분 이상의 양. 하지만 하선율은 고작 1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이 음식을 전부 먹어 치웠다.
음식을 그냥 포댓자루에 넣어도, 사람 1명보다 무거워 보이는 양이었는데, 어떻게 저 작은 배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우빈은 볼록 튀어나온 하선율의 배를 보며 감탄했다. 그러다 문득 하선율과 눈이 마주친다.
하선율이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씨익 입꼬리를 올린다.
“왜? 배 나온 사람 처음 봐?”
“아뇨. 그게 어떻게 다 들어가나 해서요.”
“뭘 이 정도 가지고, 나오는 건 더 대단해. 한번 보여줄까?”
“필요 없습니다.”
뭐가 나온다는 건지, 생각하기도 싫은 걸 알려주며, 자신감 넘치게 엄지를 치켜세운다.
하선율. 엘리드에서 처음 봤을 당시, 한 마리의 난폭한 맹수를 떠올리게 하는 여자였다.
그 당시만 해도, 털털하면서 자신감 넘치는 행동이 인상적이었는데, 여기서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우빈의 시선이 하선율의 얼굴로 향한다.
잡티 하나 없는 흰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아이돌 연습생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어려 보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입술 주변으로 여러 가지 소스가 덕지덕지 붙어있다는 건데, 털털함을 넘어, 아저씨의 향기가 느껴지는 수준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혼자 남아서 엘리드를 클리어했다 이거죠?”
화민서가 우빈의 말을 곱씹어보더니, 다시 물었다.
“네.”
우빈은 식사를 이어나가는 동안, 이 세 사람의 질문을 받아줬다.
질문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지금까지 어디서 무엇을 했냐를 시작으로, 어떻게 엘리드를 클리어했는지.
세이버의 핵심 인력의 행방과 클리어 보상은 무엇인지 등.
엘리드에서 제법 구른 사람들답게 날카로운 질문을 해왔다.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기에, 우빈은 전부 답을 해주었다.
-세이버 놈들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클리어 보상은 개인적인 부분이라, 말씀해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 두리뭉실한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해 보였다.
당장, 화민서의 표정을 보아라. 언제나 딱딱하면서도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하더니,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 하선율의 표정 역시 긍정적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너 우리 길드로 와라.”
하선율이 자신감 있게 제안했다. 어느샌가 입을 닦았는지, 얼굴이 깨끗했다.
“선은 지키시죠. 제가 만든 자리입니다.”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먼저 먹는 놈이 임자지. 부길마 자리 줄게. 1달 계약이어도 상관없어. 한 달 계약금은 흠···. 일단 150억으로 할까?”
하선율이 단도직입적으로 나서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화민서도 입을 뗐다.
“협회로 오시죠. 기본 보장으로 월 200억 선에서 맞춰드리겠습니다.”
“뭐? 협회에 무슨 돈이 있다고 200억을 불러. 나랏돈이라고 너무 함부로 부르는 거 아니야?”
“제 개인적인 돈으로 해결할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쭈? 돌아오더니, 말이 많아졌다? 그때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도 못 하더니.”
“이겨냈습니다. 저는 누구처럼 돈에 미쳐서 몸을 상품으로 팔 정도로 나약하지 않으니까요.”
“뭐?! 돈에 미쳐, 몸을 팔아? 설마 나보고 말하는 건 아니지?”
“바로 들으셨습니다. 그쪽 보고하는 말 맞습니다.”
꽈드득-
하선율의 작은 이마로 핏줄이 솟구친다.
구우우우-
미약한 진동이 하선율의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꽈직-
거울에 금이 가며, 우우웅- 식기가 허공으로 떠오른다.
답답한 압박감이 가슴을 짓누르던 그때였다.
“일단, 오늘 환생이란 걸 하고 싶은데요.”
우빈은 세명에게 하나의 조건을 제시했고,
“환생? 오케이. 내가 데려다줄게.”
“선율씨가 어떻게 데려다주신다는 거죠? 제가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시청에 비자 발급받으러 가신 거였죠?”
생각보다 더 쉽게 원하는 걸 이루어낼 수 있었다.
‘역시 쓸만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