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이 방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39/110)
39화. 이 방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39/110)
39화. 이 방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2022.04.15.
세준은 서재에 틀어박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몇 시간 전, 지안과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위처럼 단단한 목소리로 상대를 제압하던 작은 여자.
‘제 남편, 우리 도하 씨랑 꽤 우정이 깊으셨다고 들었는데. 더 이상 그 우정에 금 가는 행동 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우리 남편, 아시다시피 죽다 살아난 사람이에요. 겨우 살아난 사람 가슴에 못 박는 행동 자꾸 하시면 제가 못 참아요!’
여자에게 위압감을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진실을 아는 눈동자와 진심이 가득 서린 목소리가 거짓을 말하는 저를 속수무책으로 찍어 눌렀다.
그 순간 느껴졌다.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고 무시했던 권도하와 서지안의 관계가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단단할지 모른다는 걸.
권도하는 지난 3년간 그저 시체처럼 누워 있었을 뿐인데.
대체 무엇이 서지안이라는 여자를 그렇게 뜨겁게 만들었는지, 누구보다 그를 걱정하고 위하는 존재로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권도하에겐 대체 저에게 없는 무엇이 있길래.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저열한 자격지심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제게 수모를 준 여자이긴 하지만, 세준은 태어나 단 한 번도 저를 위해 누군가가 그런 눈빛과 진심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보통은 권도하의 것이라서 탐이 났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왠지 손에 쥐어도 싫증 나지 않을 것 같은 여자.
그녀가 도하가 아닌, 저를 위해 그렇게 진심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술잔을 쥔 세준의 손으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거기 계십니까?”
노 실장이었다.
늦은 시각에 연락도 없이 들이닥친 걸 보면 사안이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세준은 낮게 대꾸했다.
“들어 오세요.”
노 실장이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며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이 야심한 시각에.”
“대표님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 직접 뵈러 오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퇴근 후 여가를 방해할 만큼 급한 일입니까?”
“…….”
노 실장은 잠시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인데, 안 잡던 분위기를 다 잡고 그러는 거죠?”
세준이 추궁하자 노 실장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D그룹, 도 회장님께서 CTM 해외사업 관련 투자 결정 철회 의사를 전해왔습니다.”
“……뭐요?”
D그룹 도 회장은 작은 스타트업에 불과하던 CTM을 지금의 위치로 끌어 올려준 은인이자, CTM의 앞날에 가장 중요한 해외사업 관련 투자를 약속한 인물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무래도…… 저희 쪽 노동자 인권 문제 관련 이슈가 도 회장 쪽 귀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노 실장이 잠시 뜸을 들이자 세준은 뒤틀린 입술로 내뱉었다.
“그리고?”
“최근 도 회장님이 케이원 황정순 회장과 자주 만남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것도 조금 이상한 부분이라.”
노 실장의 입에서 케이원과 정순의 이름이 나오자, 세준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러고 보면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세준이 마지막으로 도 회장을 만난 건, 그가 갑작스럽게 제안한 와인 모임이었다.
도 회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을 소개하며, 세준에게 처음으로 개인적인 질문들을 했었다. 사귀는 여자는 있는지, 결혼 생각은 있는지, 이상형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 제게 애지중지 키운 딸이 있다는 이야기도 넌지시 했었다. 마치 내일 당장 딸을 소개해 주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그날 이후 이상하게 도 회장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세준이 상의할 문제가 있어 전화를 걸어도 받질 않았고, 비서를 시켜 바쁘다는 연락만을 전해왔다.
그러고 보면, 그날 와인 모임에서 도 회장은 그런 말을 했었다.
‘이제 그만 마셔야 하는데 멈출 수가 없군. 내일 황 회장님이랑 전시회 선약이 있는데 말이야.’
‘황 회장님이라면…… 케이원 그룹 황정순 회장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맞네. 그러고 보니 자네 어릴 적부터 황 회장님과 교류가 있었다고 했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절묘한 위치에 정순이 끼어 있었다.
정순을 만난 이후 도 회장은 무슨 이유에선지 의도적으로 자신을 멀리하고 있었다.
‘노인네, 대체 무슨 소릴 하고 다니는 거야!’
세준은 힘껏 말아쥔 주먹으로 테이블을 거세게 내리쳤다.
***
“늙은이 취향으로 꾸민 거라 두 사람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정순은 무작정 꾸민 신혼 방이 젊은 부부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걱정스레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화사하고 따듯한 느낌의 방을 보곤 감탄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소싯적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한 적 있는 정순은 몸에 밴 프렌치 감성을 담아, 모던하면서도 우아한 인테리어로 신혼 방을 완성시켰다.
유행을 타지 않는 감각적이고 센스있는 인테리어는 여든을 앞둔 노인이 아니라, 젊은이의 솜씨라 해도 믿길 지경이었다.
따듯한 느낌의 베이지 계열로 가득 찬 침실 안은 당장이라도 들어가 쉬고 싶은 욕구를 자아냈다.
회색빛의 병실에서 느껴지던 원인불명의 불안감과 무기력감이 깨끗이 씻겼다.
하늘하늘한 시폰 커튼과 무게감 있는 암막 커튼이 사이좋게 뒤섞인 창가와 그 앞에 놓인 패브릭 소재의 아이보리 소파와 티 테이블.
고풍스러운 프레임의 침대에는 사각사각한 재질의 호텔식 침구가 펼쳐져 있었고, 옆으로 아기자기한 느낌의 가구들이 균형감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단조로울 수 있는 인테리어에 포인트가 되는 샹들리에와 곳곳의 로맨틱한 조명들이 지안의 시선을 붙잡았다.
“정말 예뻐요.”
지안이 은은한 나이트 스탠드 불빛을 바라보며 말하자, 정순이 안도하며 물었다.
“마음에 드니?”
지안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신혼 방’ 보다 ‘모델하우스’를 구경하러 온 사람처럼 가벼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한곳을 유심히 보던 도하가 무언가를 지적하는 순간, 이 방이 단순한 모델하우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머니.”
“왜 그러니? 도하야.”
까다로운 손자의 취향에 어긋나는 게 있는 건지, 정순은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도하의 얼굴을 바라봤다.
침대 쪽을 유심히 살피던 그가 나직이 물었다.
“이 침대…… 사이즈가 어떻게 되죠?”
“……!”
정순은 화들짝 놀라서 주름진 눈꺼풀을 연신 깜빡였다.
도하의 말에 지안도 다시금 눈을 돌려 침대를 유심히 살폈다.
고풍스러운 프레임과 호텔식 침구에 시선을 뺏겨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침대의 크기.
“어!”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한 지안이 놀란 신음을 내뱉었다.
정순은 괜스레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두 사람이 쓰기에는 턱없이 작은 크기의 침대. 후하게 쳐도 슈퍼싱글 정도에 불과한 사이즈였다.
정순은 손자 부부의 시선이 차례대로 제 얼굴로 꽂히자, 애써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요즘 신혼 침대는 이렇게 나온다고 하더구나. 요새 그 뭐야, 미니멀! 미니멀이 대세라잖니! 부부 침대도 이렇게 미니로.”
“…….”
정순의 해명에도 두 사람은 굳은 듯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지안은 짧은 순간, 눈앞의 작은 침대 위에 도하와 나란히 누워 있는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광활한 어깨를 가진 그와 정면으로 누워서 자면 옆으로 남는 공간이 거의 없어 바닥으로 떨어질 게 뻔했다. 그럼 모로 누워서 자거나 서로를 마주 보고 옆으로 누워……!
생각만으로도 낯 뜨거운 장면에 지안은 눈썹 사이를 격하게 좁히며 얼굴을 붉혔다.
도하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침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순은 그런 손자를 보며 생각했다.
하루가 다르게 건강을 회복 중이라지만, 아직 완벽한 컨디션을 되찾지 못한 상태에서 비좁고 불편한 침대를 쓰게 된 것이 난감한 건 아닌지.
그제야 정순은 자신이 조금 앞서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척하지만, 여전히 서먹해 보이는 손자 부부를 위해, 둘 사이의 거리감을 좁혀주기 위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하지만 손자 부부의 표정을 보자, 자신이 조금 섣불렀다는 생각이 들던 순간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도하가 중저음의 울림 있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좋네요.”
뜻밖의 소리를 들은 정순의 입술이 순간 쩍 벌어졌다.
“뭐?”
“딱 좋은 사이즈예요. 침대가 쓸데없이 커봤자 먼지만 일으키죠.”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지안의 두 눈이 한껏 커졌다.
“……!”
일자로 굳게 닫혀 있던 남자의 입술 끝에 음흉한 미소가 감돌자, 지안은 말을 잃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따듯한 기운이 물씬 나던 방 안이 한순간에 치명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공간으로 변해버린 느낌이었다.
손자의 반응에 신이 난 정순이 맞장구치며 말했다.
“그렇지! 침대가 커 봐야 먼지만 더 일으키지!”
두 사람이 먼지 이야기로 공감대를 형성하자, 지안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차올랐다.
1인이 주로 쓰는 슈퍼 싱글 침대가 부부용 침대로 공인되는 걸 속수무책으로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가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어, 저는 게스트 룸에 있는 침대를 가져다 쓸게요!”
지안의 말에 정순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아래로 추락했다.
“에이, 지안아. 아기자기한 신혼방에 그 손님용 침대는 어울리지 않지.”
“그래도 도하 씨 아직 환자인데, 잠은 편안히 자야죠. 저 침대는 너무 좁아서 도하 씨 혼자 자기에도 불편할 것 같아서요.”
지안이 그를 핑계 삼아 빠져나가려는데, 그녀의 속을 읽은 남자가 쉽게 도와주지 않았다.
그는 짧고 단호하게 뱉었다.
“안 불편해.”
“……!”
도하는 당황한 듯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커다란 병실 침대에 오래 누워 있어서인지, 이 작은 침대가 더 아늑하고 편안해 보이는걸.”
“……!”
할 말을 없게 만드는, 더 이상의 핑계를 댈 수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도하에 이어 정순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래. 지안아. 크기는 작아도 이 매트리스가 말이다. 신혼부부 타깃으로 나온 최신형 기능성 매트리스라서 아주 좋단다. 뛰거나 격한 충격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고.”
정순이 아무렇지 않게 뱉은 단어들이 지안의 머릿속을 하나같이 어지럽혔다.
‘신혼부부 타깃’, ‘격한 충격’, ‘흔들림.’
침대 광고에 흔히 나오는 단어 선택인데, 도하의 입가에 스민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면서 들으니 순수하게 들리지 않았다.
침대에서 격한 충격이나 흔들림이 일어날 일이 뭐가 있다고. 크흠.
생각을 다스려도 머릿속에 새빨간 경보가 울리고, 얼굴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때 정순이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아직 덜 정리한 건, 내일 너희 출근하고 나면 마저 해야겠구나. 그럼, 피곤할 텐데 이만 쉬렴.”
“감사합니다. 할머니.”
도하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자, 지안도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슈퍼싱글 주제에 위험해 보이는 침대는 노 땡큐이지만.
“가…… 감사합니다. 할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