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 252화.
* * *
말리아는 초인적인 의지로 일어났다.
술과 보드게임, 고기와 친구들이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으니 컨디션이 망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아, 젠장.”
영어로 욕을 내뱉으면서 장비를 점검한 그녀는 자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짐을 챙겼다.
방송장비의 준비를 확인하고 노트북에 전원을 킨 그녀는 눈곱을 떼어내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이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버튜버 덕분이었다.
행복을 알게 되었기에 이 삶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게 되는 건 당연했고
잠든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방송 할 힘을 얻은 그녀는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인원이 부족했다.
자신의 삶에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유나가 없어진 것을 본 그녀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해졌다.
“보나마나 운동 중독인 유나 언니는 조깅갔겠지.”
선라이즈에 부지런한 사람은 많았다.
아예 방송과 결혼을 했다는 듯 일주일에 6일씩 3시간 4시간씩 진행하는 카린이라던가
방송하는 것을 압수 당한 루미에 같은 사람도 있었고
지상파에 나오면서 버튜버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는 이나리나 코모레비 같은 사람들은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방송 외적으로 자기 관리에 부지런한 사람은 유나 언니가 유일했다.
헬스장에서 그녀의 운동량을 보고 겁을 먹은 이후 다시는 같은 시간대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그녀니… 뭐 어제 그렇게 활동하고도 아침에 조깅을 가는 건 무리가 아니겠지.
아니나 다를까, 노트북을 켜고 방송 시작 전 가볍게 커뮤니티를 탐방하고 있자니 저 멀리서
유나 언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 지 곤하게 잠든 쿠로가와 나에를 등에 업고 말이다.
습관대로 크게 그녀를 부르려던 말리아는 캠핑 카 안에서 드르렁거리며 자고 있는 다른 멤버들과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자고 있는 쿠로가와 나에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닫았다.
쿠로가와 나에
일본미인의 정수 같은 여인
나이를 먹지 않는 요괴도 아니고,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데도 한참 어리게 보이는 이 인형같은 소녀가 짓는 미소는 같은 여자가 봐도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마치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한 행복한 여인의 미소처럼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그녀의 미소야 말로 진짜 천사의 미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말리아 아침부터 열심히네.”
어느 새 쿠로가와 나에를 부드러운 소파에 눕힌 그녀가 자기에게 다가오고는 그렇게 말했다.
“제 쫄따구들이 워낙 극성이어야 말이죠.”
“그리고 그런 쫄따구를 여행 와서도 돌보다니, 역시 츤데레 여신이구나.”
“그냥 구독자들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라고 생각해줄래요 언니?”
“네에네에 선배님.”
아침부터 이런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하는 게 얼마 만인가?
졸린 뇌를 깨우는 데는 뇌의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하는 농담과 유머가 제일이라는 걸 아는 두 사람은 인터넷 밈들을 주고받았다.
‘에오스는 새벽과 생명의 여신 주제에 아침에 너무 약하단 말이지’
자신의 소중한 파트너에 대한 불만을 삼킨 말리아는 인생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유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정열적인 여인이었다.
전쟁의 여신처럼 오밀조밀하게 단련된 근육과 아름다움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당당한 매력.
부드럽게 흩날리는 북극에 걸린 황혼 같은 황금빛과 검은빛이 혼재된 머리카락
그리고 왠지 모르게 풍기는 위험한 냄새…
‘위험한 냄새?’
“왜 그래?”
“으힉!”
저도 모르게 뚫어져라 바라보던 유나가 갑자기 상체를 숙였다.
수영복에 얇은 자켓을 걸친 가벼운 옷차림이라 그럴까?
평소보다 훨씬 요염해보이고 훨씬 성숙해보이는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자 당황한 말리아는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뭐,뭐,뭐뭐 뭐에요!”
“말리아가 내 얼굴 너무 뚫어져라 보는 거 같아서 장난치고 싶어졌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유나 언니는 장난기가 다분한 사람이었고, 가끔씩 이렇게 장난을 쳤으니 말이다.
하지만 뭐랄까?
평소보다 달라진 분위기의 유나 언니에게서 변화를 감지한 말리아는 침을 꿀꺽삼켰다.
“어,어언니 저 곧 방송 해야하거든요? 언니도 피곤해보이는 데 잠시 주무시죠?”
“아, 그럴까? 힘을 좀 썼더니 피곤하긴 하네.”
아무렇게나 한 말에 납득한 그녀는 말리아에게서 멀어졌다.
갑작스럽게 거리를 좁히다니, 동양의 여인들은 조신하고 정숙하다 하였건만, 유나 언니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말리아의 목소리는 피곤과 잠에서 깨어난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왔었다.
팬들에게 졸음에 절여진 목소리가 아닌 원래 목소리로 방송을 시작할 수 있게 되어서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을 지은 그녀는 한숨을 내뱉고는 방송의 스탠바이에 들어갔다.
잠시 후
말리아는 일본의 반대편에 있는 해외 팬들과 소통하기 위해 방송을 진행했다.
“헤~~이, 잘 지냈냐?”
파도소리와 함께 버튜버의 방송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해변 여행의 2일차
선라이즈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버튜버들은 보기 드문 광경을 목격했다.
“유나도 사람이구나.”
“그러게요. 그래도 어제 하루 종일 운전하고, 우리들과 놀아주고, 배구로 신나게 사람들 때려잡고, 고기도 굽고, 술도 혼자서 많이 마셨으니 당연한 거 아닐까요?”
건장한 성인 남성도 힘들어 할 스케줄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화한 후 새벽에 일어나 산책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심지어 쿠로가와 나에를 업고 해변을 걸었다고 하니, 이건 건강하다 수준이 아니라 징그러울 수준이었다.
거기에 평소에 얌전하게 자기로 유명한 유나였지만 지금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배를 드러낸 채 대(大)자로 몸을 편 상태로 자고 있었으니 유나를 잘 아는 그녀들의 시선이 모이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원래 장난이라는 것은 평소에 완벽해 보이는 사람에게 하는 편이 더 재미있었다.
“이거 봐요, 볼을 쿡쿡 찔러도 일어나지 않는다니까요?”
장난기가 동한 미우가 실제로 그녀의 볼을 찌르며 말했다.
“그, 그래도 어제 하루종일 고생했는데 그대로 쉬게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유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이 악동처럼 변하는 것을 본 이로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유나에게 근사한 추억을 만들자는 거죠.”
누가 혐성 사자 아니랄까봐, 미우의 기세에 올라탄 카기가 음흉하게 웃었다.
“게다가 유나는 한국인이잖아? 일본인들의 수학 여행의 보여주도록 하자고.”
“그럼.”
“해야지.”
누가 화(?)의 일족 아니랄까, 이런 상황에 뜬금없이 대동단결한 이로하와 카기, 미우를 본 코토나시와 말리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도 JAPAN SAMURAI에 지지 않도록 해봐요!”
어설픈 영어 발음으로 분위기를 띄운 코토나시 또한 그녀들의 장난에 동참했다.
아무튼 그렇게 쓰러진 유나가 일어난 것은 해가 중천에 뜰 때였다.
피로와 알코올로 휘발된 이성이 깊은 수면으로 다시 돌아온 후 그녀가 제일 처음 한 것은 나에를 찾는 것이었다.
새벽 바다의 마력에 이끌려서 그런건지
아니면 도시 밖을 벗어나서 그런 건지
심란해진 마음 탓인지
아니면 드러나는 살갗이 예쁜 그녀의 매력 덕분인지
무언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유나였기에 당연했다.
“언니?”
하지만 그녀를 반겨주는 것은 적막한 차내(??)였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시계가 오전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으니 다들 놀러 갔겠지.
하지만 언니는? 언니는 도대체 어디에있지?
사고와 사고가 이어지지 않는다.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지 않은 혼란 상태에서 유나는 다급히 해변으로 걸어갔다.
다행히도 그녀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신나게 놀고 있었다.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다른 한 손에는 튜브를 들고 있는 나에 또한 언제나처럼 미우와 함께 떠들고 있었다.
“풉, 유나 일어났어?”
재주 좋게 모래로 성 비슷한걸 만들고 있던 코토나시가 인사했다.
“어, 응.”
“몸은 괜찮고? 온종일 자던데.”
“뭐 힘 쓰는 일이라도 했겠지.”
코토나시 맞은편에 있던 말리아가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채로 말했다.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달라진 말리아에게 시선을 잠시 준 유나는 자석처럼 나에를 향해 다가갔다.
“언니!”
“...”
언제나 ‘안녕’ 내지는 ‘잘 잤니?’라고 말하던 언니의 얼굴이 아닌 다른 표정의 그녀가 유나를 보고 있었다.
일견 싸늘하게 보이는, 보지 못할 것을 봤다는 듯 그녀는 유나를 잠시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신나보이는 미우의 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모습을 본 유나는 아찔한기분이 들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했지?’
생각해보면 낯 뜨거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걸 밖에서 한다는 건, 그것도 해변에서 그런걸...
황홀하면서도, 부끄러웠던 그 기억을 떠올린 유나는 현기증이 났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무어라 변명을 하던 유나의 말을 끊은 것은 지나가고 있던 한 꼬마였다.
“엄마! 이 누나 이상해! 얼굴에 이상한 거 그리고 다녀! 괴물같아!”
뭐...라고?
당황한 유나는 본능적으로 챙겨온 휴대폰을 열어서 얼굴을 확인했다.
사람의 얼굴을 도화지로 쓸 수 있고 그것을 유치원생들에게 제공하면 이렇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얼굴에는 낙서가 가득했다.
바보, 멍청이 같은 유치한 욕부터 동그라미와 엑스, 재주 좋게 그린 용이라던가 모 애니 캐릭터 등등
문자 그대로 엉망진창으로 그려진 낙서는 목까지 그려져 있었다.
유나가 휴대폰 속의 우스꽝스러운 여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너네들 진짜!”
“유나 마왕님 화났다 모두 도망가!”
술래잡기 전 둥글게 모여있던 그녀들은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평소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깔깔 웃는 나에의 모습을 본 유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깔깔 웃으면서 자신에게 튜브를 세게 던지는 그녀는 언제나의 나에였으니 말이다.
퍽
‘화 안난 거 맞겠지?’
왠지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튜브에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당한 유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장 크게 비웃고 있는 카기를 붙잡기 위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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