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화 〉 294화.
* *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리아와 마나의 만남은 깨진 셈이었다.
대신해서 만나게 한 클레스타인은 자신을 대신하여 마나와 즐겁게 놀았다.
의외로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캐릭터 외적으로 보면 금발과 하늘색에 가까운 은발이 섞인 연상연하로 보였으니 말이다.
거기에 두 사람 다 언어 수준이 유아 수준 내지는 초등학생 수준으로 떨어져버린 덕분에 그럴싸한 로맨스 표현보다 솔직함에 기반한 투박한 표현으로 서로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다.
그중 모두의 머릿속에 깊게 박힌 표현은 ‘결혼하자’였다.
서로를 좋아하는 어린아이들끼리 으레 말하는 그런 표현 말이다.
물론 두 사람은 여기에 깊은 의미를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로의 존재는 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있어도, 만남은 갑작스럽게 진행된거니까
하지만 인터넷 방송의 무서운 점은 기록이 남는다는 것이었고
이런 백합 커플링에 목말라 있던 키리누커들은 능숙한 솜씨로 서로 부족한 언어로 호감을 표현하는 장면을 교묘하게 오려붙인 다음 ‘결혼하자’라는 장면을 하이라이트처럼 연출하는 데 성공
거기에 손이 빠른 애니메이터들이 간단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올리면서 클레x마나 커플링이 선라이즈의 커뮤니티를 뒤덮었다.
그야말로 종이가 먹물을 빨아들이는 속도로 두 사람의 합동 방송은 널리 알려졌다.
영어에 관심 없었던 일본 팬들과 일본에 관심 없었던 해외 팬들도 두 사람의 놀랄정도로 쉽고 귀에 박히는 간단한 외국어 표현에 금새 적응했고 두 시간 가까이 서로를 좋아하고 쓰다듬는, 인터넷 표현으로 ‘테에테에’한 장면을 만들어낸 장면은 큰 인기를 끌었다.
이게 국제 시대지
나모 사장의 큰 꿈이 이루어지는가...
우리는 남의 어머니를 빼앗고, 팬티 색깔을 물어보는 아이돌들에게 지쳤다.
클레스타인의 청초력이 대단하다. 이것이 일본식 스타일 성녀 해석인가요?
나 해외권 스트리머는 전부다 입에 f단어 살고 거칠게 섹드립치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다시보게 되었어...
두 사람 속지마! 두 사람 다 방송 매운맛...
그러는 반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럴 수가, GB의 근본 커플링인 마나x엘리야 커플이...
나 마나가 저렇게 호감 표현하는 거 처음 봐, 클레스타인이 정말 그녀의 아이돌이었구나...
안돼! 성녀x마계공주의 근본 커플링은 어디에 가고!
그래도 어울리는 듯?
속이 검은 노처녀 성녀와 에로한 걸 좋아하는 쿠소가키 커플링이라... 이건 흥하겠는데?
아니야! 잊혀진 신을 깨운 모험가야 말로!
갈! 예로부터 성녀가 마계 공주에게 몸이 더럽혀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판타지 백합이거늘!
그것은 다름 아닌 각 서버의 인기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클레스타인과 마나의 기존 커플링을 지지하던 사람들의 눈물이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복병의 등장에 당황한다고 해야할까
물론 기존에 쌓아두었던 호감도가 있기 때문에 쉽사리 누가 누군가를 확실히 좋아한다고 단정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이기에 더더욱 사이 좋아보이는 연출이 보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라고 말하는데, 본인의 생각은 어때?”
“유나언니, 저 놀리는 거 맞죠? 맞죠?
저에게는 언니 뿐인데에에!”
유나는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지는 미우의 잔에 새롭게 술을 따랐다.
따르기가 무섭게 미우는 호쾌한 동작으로 술을 들이켰다.
“너무 달리는 거 아니니?”
“오늘은 언니 돈으로 제대로 마시고 죽을래요!”
술에 취한 체로 이런식으로 크게 떠드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민폐인 행동이나, 아는 동네 사람들만 찾는 한적한 일본식 선술집에서 나름 단골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오히려 술집 쿠로사키야(??)를 운영하는 주인이 서비스로 달달한 무 어묵을 내오는 것으로 미우를 달래주었다.
“흑흑, 어떻게 외국인 꼬맹이하고 하루 놀았는데 이렇게 소문이 퍼질 수 있죠?”
“일본 서버를 상징하는 인싸 성녀와 GB서버 최고의 사고뭉치 꼬맹이가 만났는데 당연히 빨리 퍼지지.”
“그렇지만 저에게는 언니 뿐인데에에에.”
테이블을 보고 마주앉은 게 아니라 카운터 석으로 앉았기 때문인지 유독 유나에게 몸을 들이내미는 미우는 쓰러지듯 유나에게 몸을 맡겼다.
술이 조금 들어갔다고 해도 성인 여성의 몸을 받아주지 못할 리 없는 유나는 자신을 대신해서 서툰 영어로 열심히 방송해준 동생의 애교를 받아주었다.
아무리 마나의 정신적 피로가 심해서 그것을 풀어주기 위해서 즉석으로 기획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어제와 같은 장면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두 사람에게 말을 하지 않고 강제로 합동방송을 시킨 것은 직장 동료로서 문제 있는 태도였으니 말이다.
결과가 아무리 좋더라도, 과정이 탐탁치 않았기에 내심 두 사람에게 미안함을 느낀 유나는 미우에게 술까지 사주며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
“흑흑, 제 구린 영어 발음 다시 들어보세요.
세상에 일본인들은 다 언니처럼 발음하는 거 아니었어요? 다시 듣는 제 영어발음은 왜 이따위죠?”
“그런 것 치고는 영어 잘하던데?”
“언니 영어나 마나 영어를 들어보면 제 영어는 썩은 치즈 꼬린내가 나는 것 같잖아요.”
솔직히 발음이 구리긴 했으나 그렇게 듣기 거북한 수준은 아니었다.
애초에 빌딩을 비루라고 부르고, 맥주를 비루라고 부르는 식으로 엉망진창의 영어를 하는 나라인데 영어 발음 좀 못하면 어떠한가?
하지만 그것은 유나의 생각이었고, 명문대 현역 대학생으로 자기 영어 솜씨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미우는 달랐다.
아나운서 톤으로 또박또박 영어를 뱉는 유나
귀엽고 활발한 하이틴 드라마 주인공처럼 쾌활하게 말하는 마나
두 사람의 영어 앞에 자신의 영어는 쉰내나는 영어였다.
“저는 쓰레기에요!”
160만 구독자를 보유한 버튜버 활동을 하면서 학점을 B 수준에서 챙기는 이중생활을 하는 성인 여성이 하기에는 부적절한 말이었지만, 유나는 굳이 태클걸지 않았다.
“그래도 마나가 그렇게까지 널 좋아할 줄은 몰랐네.”
“그러게요, 얼굴도 모르는 꼬맹이가 저한테 이렇게 들러붙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걔, 사실은 너보다 연상이다?”
“... 나에언니같은 사람이었군요. 언니, 아무래도 이 세상에 요정은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런것같아.
그렇게 중얼거린 유나는 술을 추가했다.
주방에서 알콜을 덥히는 달콤한 향기와 무언가가 기분좋게 끓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침묵에 빠진 두 사람은 새로운 술이 도착하자마자 건배를 나누었다.
“근데 위에서는 이번 일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나 본데?”
“...그래요?”
“응, 서버 초월간 합동 방송을 기획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것 때문에 에오스와 셀레네가 자주 불려나갔으니까.
이미 두 사람은 선라이즈 공식 채널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거 알지?”
3분 정도 길이로 선라이즈 버튜버들의 낯선 모습을 보여주는 공식 애니메이션에 깜짝 게스트로 출연한 두 사람은 일본어가 유창한 덕분에 나름대로 일본 팬들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같은 서버 내의 버튜버끼리는 팬들을 공유하는 게 많은 편이잖아? 그런데 세상으로 눈을 돌리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지. 이제 해외 팬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양국간의 버튜버를 덕질해도 될 것 같다는 게 운영 생각이야.”
“그, 그래요?”
“응, 그런데 나는 알다시피 GB 소속이다보니 일본 쪽에 소속되어서 일을 진행하기에는 조금 눈치가 보이는 편이었지. 그런데 마침 내 주위의 두 버튜버가 외국어를 좀 잘하는 편이잖아?
나에 언니하고 미우, 두 사람 말이야.”
오래전부터 영어 교육 방송을 진행하며 아기 영어 발음 같던 영어 읽기를 교정하며 해외 팬들을 챙겨온 유리아와 학업을 놓치지 않아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한 따끈따끈한 대학 1학년생인 클레스타인은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버튜버 가운데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 측이었다.
“원래 큰 회사에서는 해외 쪽 일 하는 사람들이 끗발 더 쎈 거 알지?
그러니까 이번 일도 결국 좋은 경험인거야.
우리 미우의 유능한 모습을 운영에게 인지시켰으니까, 평가도 더 올라갈거야.”
“히끅... 그래요?”
“그래그래, 우리 미우가 아니면 내가 이 일을 맡겼겠어?
거기에 선라이즈 최고 구독자를 보유한 거물 후배가 너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어찌 보면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닐까?”
“나는... 대단하다?”
“그래, 우리 미우는 정말 대단해!”
술이 살짝 들어간 미우는 유나의 속보이는 말에 홀라당 넘어갔다.
아무리 성숙한 사람이라고 한들, 그녀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를 맛보기 시작한 어리숙한 사회인이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윗사람의 말에 기분이 안 좋아질리 없었다.
속보이는 칭찬에 달콤하게 속아넘어가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헤헤, 헤헤헤헤!”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나는 대단하다! 나는 능히 할 수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술집의 단골들은 때아닌 애기 사회인의 재롱에 훈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유나는 토라진 미우의 마음도 달래주고, 그녀에게 도움이 될 커리어를 쌓을 수 있도록 설계해주며 은근슬쩍 GB 서버와 일본을 연결하는 총대장 비스무리한 포지션을 떠맡기는 데 성공했다.
*****
미우를 윗집으로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온 유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들었다가 나에의 눈치를 보고 오렌지 쥬스를 잔에 따른 후 방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풉,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언니 영어가 능숙한 건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밤낮 자주 뒤바뀌는 일은 젊은 애들이 해야하지 않겠어요?”
영어 잘하고 사교성 좋고 젊고 팔팔한 클레스타인을 JP 서버와 GB 서버를 잇는 가교로 활용하자는 유나의 계획에 얼떨결에 동의하게 된 미우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나에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럼 언니는 이제 나이가 많다는 거야?”
“에이 그게 아니라...”
“왜, 이참에 나도 유나랑 같이 밤낮 뒤바꾸면 되겠네?
언니가 못할 것 같아?
언니는 유나 만나기 전부터 밤낮 뒤바뀌는 것에 익숙했던 사람이야.”
“아무래도 몸에 부담이 가는 일이고...”
“아하, 이제 나이 많은 언니에게는 무리다?”
“그... 그게 아니라...”
평소의 유나가 아니라 술이 한 잔 들어간 유나는 반응이 조금 느린 편이었다.
그리고 몰아붙여지는 상황에 약한 유리 대포인 유나는 나에의 역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 거렸다.
물론 자신의 팬들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감각을 지닌 나에는 홍보 대사로 나설 생각은 없었지만, 유나의 저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나이가 더 들면 아주 은퇴를 해야겠네.”
“언니, 제가 많이 아끼는 거 알죠?”
“아이고 이제 언니는 나이가 많아서 유나 따라서 방송하는 것도 힘들고...”
“아이 참 언니! 그게 아니라...”
“언니가 왜 화났는 줄 모르지?”
“그... 게 아니라, 언니의 귀여움은 저만 알고 있으면 좋다고 해야 할까.
물론 세상 사람이 언니가 귀여운 거 아는 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언니의 귀여운 영어 발음은 저만 독점하고 싶다고 해야 할까...”
언제나 당당하고 잘난 척 심하지만
이렇게 가볍게 푹 찌르는 것 만으로도 본심을 내뱉는 게 유나다.
술 들어간 유나를 다룰 수 있게 된 나에는 오늘도 술 들어간 그녀의 중얼거림을 통해서 본심을 엿듣고 승리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언니가 제일 중요하다 이거지?”
“당연하죠.”
“그럼 다른 애들은?”
“다른 애들도 좋긴 한데, 언니가 최고에요.”
역시 아직 독점은 무리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혀를 찬 나에는 유나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서 술 마시는 일이 잦아진 유나는 그 나름대로 귀여웠다.
항상 긴장하고 지내는 사람이 술을 마시면서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이전에 비해서 방송 스트레스를 굉장히 덜 받기 시작했고, 쉽게 수면에 빠져들어서 그런지 이전보다 더 건강하게 느껴졌다.
유나의 주위에 꼬이는 여자들이 많다는 건 이미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술에 취해 헤실헤실 거리는 미소는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것을 알고 있는 나에는 그녀의 입에 장난스럽게 키스해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