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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아이의 생일 (2) (27/183)

27. 아이의 생일 (2)2021.07.31.

기훈에게 예나의 생일 선물을 전달받은 정오는 얼떨떨했다. 불과 이틀 전에, 고백을 거절하느라 딸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는데.

16551142008997.jpg“머리핀이에요.”

부담을 느낀 듯한 정오의 표정에 기훈이 다시 속닥였다. 별 거 아닌 선물이라고. 정오는 선물을 받아든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마저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좋은 마음으로 준 선물은 좋은 마음으로 받아야겠지.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16551142009001.jpg“고마워. 멋진 오빠가 줬다고 하면 좋아하겠다.”

16551142008997.jpg“오빠는 무슨. 아저씨죠.”

미련은 조금도 남기지 않은 듯한 기훈의 표정에 정오도 안심이 되었다. 정오는 선물을 가방에 넣고서 자리에 앉았다. 기훈은 파티션 너머로 계속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16551142008997.jpg“근데요, 대리님. 저한테 맛있는 거 쏘셔야 하잖아요. 저녁은 사주셔야 해요.”

16551142009001.jpg“그럼. 당연하지. 거한 걸로 사줄게.”

정오는 의지의 주먹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51142009001.jpg“일하자. 오늘 일찍 가야 해. 팀장님께도 말씀드렸어. 오늘 칼퇴하겠다고.”

16551142008997.jpg“힘든 일은 다 저한테 맡기세요. 오늘은 칼퇴하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16551142009001.jpg“그래.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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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발치 떨어져 이 두 사람을 지켜본 지헌도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잠시 후 지헌과 언뜻 눈이 마주친 정오가 눈짓으로 가볍게 인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

16551142009034.jpg“엄마, 엄마, 엄마!”

9시가 넘었건만, 도빈은 어린이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16551142009034.jpg“나 넥타이! 넥타이!”

도빈은 하나뿐인 제 넥타이를 들고 와서 진서의 눈앞에 흔들어댔다. 넥타이를 매고 회사에 가는 아빠가 멋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셔츠는 어찌어찌 입고 왔지만 셔츠의 단추는 모조리 반쯤만 단춧구멍에 얹어놓은 상태였다. 진서는 도빈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고 셔츠의 단추도 제대로 채워준 후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잘 걸어주었다. 여자친구의 생일. 어제 예나에게 줄 선물까지 직접 고른 도빈은 엄마가 곱게 포장해준 반지 케이스를 손바닥으로 닦고 또 닦았다.

16551142038249.jpg“그런데 아들, 과연 예나가 반지를 좋아할까?”

16551142009034.jpg“응.”

16551142038249.jpg“그걸 어떻게 확신해?”

16551142009034.jpg“반지도 예쁘니까.”

16551142038249.jpg“……그래 뭐.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이니까. 반지만 주는 거야?”

16551142009034.jpg“아니! 편지도 있어!”

16551142038249.jpg“봐봐. 어디.”

진서는 도빈이 자랑스럽게 내민 쪽지를 건네받았다. 삐뚤빼뚤 용맹하게 적힌 메시지에 진서의 입이 벌어졌다. - 예나야. 너에 눈은 보석을 달맛다. 나중애 나랑 결혼하자♥ 눈이 보석을 닮았으니 결혼하자고? 보석과 결혼 사이에 어떻게든 문장을 하나만 더 넣어주고 싶지만, 이 순수한 고백을 어른의 관점으로 보아선 또 안 되는 거고. 아무래도 아들은 예나 생일 기념으로 프러포즈를 할 계획인 것 같다. 아들, 엄마가 널 응원해야 할까? 이건 일단 예나의 입장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16551142038249.jpg“반지랑 편지랑…… 딴 것도 있어?”

16551142009034.jpg“응! 개인기 여섯 개!”

16551142038249.jpg“개인기를 여섯 개나?”

16551142009034.jpg“응. 마술 세 개랑 이예나 삼행시랑 개다리춤이랑 휴지꽃.”

큰일이다. 아들은 짝사랑 여자친구의 생일에 공연까지 펼칠 계획인 듯했다. 도빈아, 너의 그 어설픈 마술 공연에 엄마가 환호한 건 엄마라서 그런 거야……. 세상은 냉정하다고……. 어쩌면 도도한 예나는 싫어할 수도 있어……. 치마폭에 싸놓았더니 아들은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웃긴 줄 알게 되었다.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키운 게 좋은 일이긴 하다만, 조금 걱정스러웠다.

16551142038249.jpg“이예나 삼행시는 어떤 거야?”

16551142009034.jpg“엄마가 이예나 불러봐.”

16551142038249.jpg“이.”

16551142009034.jpg“이예나는.”

16551142038249.jpg“예.”

16551142009034.jpg“예쁘다.”

16551142038249.jpg“나.”

16551142009034.jpg“나랑 결혼하자.”

……큰일이다.

16551142038249.jpg“아들. 그냥 동전마술이랑 휴지꽃. 그렇게 두 개만 하자.”

16551142009034.jpg“왜?”

16551142038249.jpg“원래 개인기는 제일 괜찮은 거 조금만 보여주는 거야.”

16551142009034.jpg“그럼 삼행시는? 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16551142038249.jpg“……그래. 그럼 삼행시랑 휴지꽃 두 개만 해.”

16551142009034.jpg“세 개 하면 안 돼?”

16551142038249.jpg“내년 예나 생일에 할 것도 있어야지.”

16551142009034.jpg“아, 그럼…….”

도빈은 돌연 손가락을 펴서 하나씩 꼽아보기 시작했다.

16551142009034.jpg“그럼 열세 개 더 준비해야겠네?”

16551142038249.jpg“왜 열세 개야?”

16551142009034.jpg“13년 동안 할 거니까.”

16551142038249.jpg“왜 13년이야?”

16551142009034.jpg“스무 살에 결혼할 거니까!”

16551142038249.jpg“……우리 아드님은 스무 살에 결혼할 거구나.”

16551142009034.jpg“응!”

16551142038249.jpg“근데 도빈아, 결혼하고 나서는 개인기 안 할 거야?”

16551142009034.jpg“응. 애기를 키워야 하니까 안 돼. 힘들어서.”

우리 아들이 애기를 키우는 게 힘든 줄은 아는구나.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힘든 거 알면 네가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좋잖아, 도빈아. 엄마는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었지만 잠잠한 미소 속에 모든 것을 숨겼다. 그저 응원한다. 아들의 첫사랑이 아름답기를. * 일이 착착 정리되어 가고 있다. 정오는 오전 내내 회의실에서 옆 팀의 안찬섭 팀장과 함께 다원주류 제작 시안 자료를 만들었다. 시안은 스크립트가 메인이었기 때문에 카피라이터 정오의 의견이 가장 많이 반영되었다. 1차 제안서였고 준비기간도 짧았지만 정오는 최선을 다했다. 점심도 대강 먹고 회의실로 돌아와 자료를 손보던 와중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광진경찰서에서 온 전화였다. 정오는 회의실에서 나와 전화를 받았다.

16551142009001.jpg“여보세요.”

1655114212387.jpg[안녕하세요. 광진경찰서 권배일입니다. 이정오 씨 되십니까?]

1주일 전에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얼굴이 희고 인상이 순했던 경찰. 그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정오는 반갑게 대답했다.

16551142009001.jpg“네. 맞습니다.”

1655114212387.jpg[따님 사건과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통화 가능하십니까?]

16551142009001.jpg“네! 말씀하세요.”

1655114212387.jpg[근처의 CCTV를 전부 뒤져서 따님 손을 잡고 바삐 걸어가는 여자는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모습이 제대로 나온 게 없네요. 여자가 모자를 쓰고 있기도 했고요. 그나마 제일 잘 보이는 화면을 보내드릴 테니 확인해보시겠습니까?]

16551142009001.jpg“네. 부탁드릴게요.”

1655114212387.jpg[그럼 지금 전화드린 휴대폰 번호로 동영상 전송드릴게요.]

16551142009001.jpg“감사합니다.”

1655114212387.jpg[보시고 의심 가는 사람이 있다면 연락주시고요.]

배일은 통화를 마친 후 바로 동영상 파일을 전송했다. 정오는 동영상을 꼼꼼히 살폈다. 편의점을 지나는 여자와 여자의 손을 잡고서 종종걸음을 걷는 예나가 보였다. 지나간 공포가 현재처럼 되살아났다. 등줄기에서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낯선 사람에게 손을 잡혀 끌려가다시피 따라가는 딸의 모습을 보니 희미한 화면인데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마음을 진정시키고서 한 번 더 동영상을 재생해보았다. 품이 크고 어두운 색 옷에 모자까지 푹 눌러쓴 여자는 긴 머리를 한쪽으로 묶었다는 것, 모자가 특이하다는 것 외엔 딱히 특징이 없었다. 화면 자체가 어두워서 얼굴의 윤곽조차 분명하지 않았고 체형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16551142009001.jpg‘일단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야.’

그래도 자신이 알고 지내는 사람은 아닐 거라는 결론 정도는 내릴 수 있었다. 또한 정지헌의 어머니도 아닐 터였다.

16551142009001.jpg‘하지만 정지헌의 어머니가 사람을 시켜 접근했을 수도 있지.’

어느 것 하나 분명하지 않은 위태로운 증거. 하지만 정오에게는 너무나 중요했다.

16551142009001.jpg- 제가 아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혹시 새로 증거가 발견된다면 연락주세요.

  정오는 배일에게 안내받은 휴대폰 번호로 문자메시지를 전송한 후 잠시 사무실 자리로 돌아왔다.

16551142008997.jpg“대리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표정이 안 좋은데요.”

눈썰미 좋은 기훈이 정오의 얼굴을 살피고는 물었다.

16551142009001.jpg“기훈 씨. 나 뭐 좀 물어볼게.”

퍼뜩 좋은 생각이 들어 표정을 바꾼 정오는 배일에게서 받은 동영상을 여러 장 캡처해 여자의 모자 부분만 잘라내서 기훈에게 보여주었다.

16551142009001.jpg“혹시 이런 모자 본 적 있어? 브랜드 모자 같은데.”

기훈이 한참 사진을 들여다보며 갸웃거렸다.

16551142008997.jpg“사진이 희미해서 잘 모르겠는데요. 해외축구팀 모자 같아요. 잠시만요.”

기훈은 제자리로 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기훈의 PC 모니터에 다양한 야구모자들이 주르륵 떴다. 몇 번 더 마우스를 움직인 기훈이 검색 결과를 정오에게 보여주었다.

16551142008997.jpg“이거랑 비슷해 보이는데.”

붉은 창에 뒤통수 쪽은 남색. 앞면에 스페인 축구팀의 로고가 새겨진 모자였다. 캡처 사진과 모니터를 번갈아가며 유심히 살펴본 정오의 안색이 밝아졌다.

16551142009001.jpg“오 정말! 기훈 씨 천재구나!”

흥분한 정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6551142008997.jpg“근데 같은 거라는 보장은 절대 할 수 없죠. 일단 사진이 흐릿하기도 하고. 모자는 보세에서도 충분히 이렇게 만들 수 있거든요. 그냥 비슷한 디자인이겠거니 참고하시면 돼요.”

16551142009001.jpg“응. 알았어. 그래도 너무 고맙다, 기훈 씨.”

16551142008997.jpg“뭘요. 더 어려운 일도 해드릴 수 있다고요.”

기훈의 대답이 든든하여 정오는 근심을 뒤로하고 웃을 수 있었다. 이제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얼른 가서 또 열심히 일해야지. 제안서를 정지헌 이사에게 확인받으면 오늘 할 일은 끝난다. 이미 안찬섭 팀장과 말을 맞추었으므로 거의 정리가 된 셈이었다. 제작 1팀에서는 갑자기 기존 광고주가 뜻밖의 오더를 내렸다며 다들 우왕좌왕이었다. 제작 1팀의 안찬섭 팀장도 정오를 보고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제 바빠지게 생겼으니 마무리는 네가 알아서 하라는 수신호였다. 정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회의실로 향했다. 혼자 일을 할 거라면 굳이 회의실에서 할 필요는 없었다. 정오는 노트북을 챙겨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사이에 큰 소리로 어딘가 통화를 마친 안찬섭 팀장이 정오에게 말했다.

16551142180417.jpg“이 대리, 우리 다원주류 제안서 먼저 해치우자. 조시내 대리가 전송하는 인쇄 시안 받아서 붙여넣고, 이사님께 보여드리면 돼.”

16551142009001.jpg“네.”

정오는 다시 노트북 화면을 켜서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경찰서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컴퓨터가…… 컴퓨터가…….

16551142180417.jpg“이 대리, 왜 그래.”

16551142009001.jpg“아니, 잠시만요.”

정오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노트북의 재시작 버튼을 눌렀다. 제대로 켜지는가 싶던 노트북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잔뜩 떴다.

16551142009001.jpg“……이게 왜 이러지……?”

정오는 창백해진 얼굴로 알 수 없는 굴레에 빠진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계속 마우스를 움직였다.

16551142180417.jpg“이정오 대리님, 무슨 일이에요?”

정오에게 파일을 전송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조시내 대리가 정오의 자리로 쫓아왔다.

16551142180417.jpg“이거 바이러스 아니에요?”

시내의 목소리에 주변의 이목이 정오에게 쏠렸다. 정오의 손끝이 떨려왔다.

16551142180417.jpg“이 대리님 노트북, 바이러스 걸린 것 같은데요. 백업파일 만들어놨어요?”

16551142009001.jpg“네. 파일은 있어요.”

중간에 저장한 파일이라 다시 한번 마무리에 힘을 써야겠지만, 그래도 백업파일을 만들어 놓아 다행이었다. 정오는 기훈의 컴퓨터를 빌려 회사 클라우드에 로그인했다. 그런데, 분명히 저장해 놓았던 파일이 보이지 않았다. 지켜보고 있던 시내가 다시 따졌다.

16551142180417.jpg“뭐예요? 클라우드에 안 넣어놨어요?”

16551142009001.jpg“분명히 여기 넣어놨는데…….”

16551142008997.jpg“없어요?”

16551142180417.jpg“이 대리님, 지금, 처음부터 백업 안 하고 시치미 떼는 거 아니에요?”

시내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일하고 있던 채은비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16551142236182.jpg“무슨 일이에요?”

16551142180417.jpg“이정오 대리님 노트북이 바이러스 걸렸는데, 지금까지 만든 자료 백업도 안 했나 봐요.”

시내의 설명을 들은 은비가 한숨을 푸욱 쉬고는 정오를 책망했다.

16551142236182.jpg“이정오 대리, 언젠가 나한테 메일로 따로 업무 내용 보내주겠다고 말한 적 있지 않아요? 그래놓고서 지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죠. 말만 앞세우니 결국 이런 일이 생기네요.”

제안서 작업은 안찬섭 팀장과 함께했고, 이에 대해 일일이 은비의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기에 메일을 따로 보내지 않았을 뿐인데. 그때의 언쟁을 이런 때에 갖다 붙이니 정오는 황당했다. 안찬섭 팀장마저 한탄했다.

16551142180417.jpg“하아, 바빠 죽겠는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성미란 팀장은 자리를 비웠고, 정오가 혼자 뭇매를 맞고 있는 상황. 그 와중에 지헌이 제작 2팀 쪽으로 걸어왔다.

16551142236201.jpg“무슨 일입니까.”

시내가 곧장 일러바쳤다.

16551142180417.jpg“이정오 대리님이 실수로 다원주류 제안서 최종 파일을 날려버린 것 같습니다. 팀원들 다같이 지금까지 열심히 준비한 건데요. 이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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