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제발2021.08.04.
조시내 대리의 가공된 고자질에 정오는 기가 막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은비가 한쪽 입술 끝을 살며시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화가 나지만 지금 상황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문제를 수습하는 것이 먼저였다. 정오는 노트북PC를 챙겨 들었다.
“전산실에 가서 얼른 고쳐오겠습니다.”
“같이…….”
“같이 가죠.”
송기훈 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 틈을 지헌이 끼어들었다. 정오와 같이 전산실에 가보려고 했던 기훈은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지헌이 직접 움직이겠다는 말에 시내가 은비를 바라보았다. 살며시 들어 올렸던 은비의 입술 끝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은비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도록 두 주먹을 꽉 쥐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정오는 바삐 뛰었다. 그 뒤를 지헌이 큰 보폭으로 쫓아갔다. 두 사람의 속도가 얼추 맞았다. 정오와 지헌이 전산 관리실 안으로 들어오자 지헌을 알아본 직원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지헌은 고개를 까딱이고는 바로 본론을 말했다.
“컴퓨터가 작동하질 않네요. 고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헌에게서 노트북을 건네받은 직원이 노트북의 전원을 켜서 상태를 확인했다.
“언제부터 이런 상태였나요?”
“얼마 안 됐어요. 잠깐 30분 정도 자리 비운 사이에 그렇게 됐어요.”
노트북 화면을 한참 살펴보고서 이것저것 눌러보던 직원의 인상이 점점 어둡게 변했다.
“혹시 꼭 살려야 하는 자료가 있습니까?”
“네. 꼭 필요한 파일이 있어요.”
정오가 대답했다.
“바이러스 같은데요. 노트북을 싹 밀어버릴 게 아니라 파일을 살려야 하는 거라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까지 복구해놓겠습니다.”
직원의 대답에 정오는 심장이 나가떨어지는 것 같았다. 지헌이 물었다.
“자료가 급하게 필요합니다. 더 빨리는 안 됩니까?”
“만 하루 이상은 걸릴 것 같은데…….”
“오늘 해결했으면 좋겠는데요.”
“……한번 해보겠습니다.”
지헌의 압박에 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직원의 표정을 확인한 정오는 망연자실했다. 작업파일은 오늘 안에 복구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전산실을 나서며, 정오는 지헌에게 말했다.
“제가 기억하는 대로 다시 만들어서 보고하겠습니다.”
“그게 낫겠네요. 여섯 시까지 가능합니까?”
지헌이 무표정으로 물었다.
“네. 가능합니다.”
“그럼 여섯 시에 보고받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뜻밖의 사건에 정오의 몸이 바빠지게 되었다.
지헌과 헤어져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안찬섭 팀장이 쫓아왔다.
“이정오 대리. 전산팀에서 뭐래? 바로 복구된대?”
“아뇨.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자료를 다시 만들려고요.”
“그걸 다 다시 만들겠다고?”
“머릿속에 어느 정도 들어 있어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오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은비가 말했다.
“카피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건데, 그냥 어느 정도 기억해서 원래의 느낌을 그대로 살릴 수가 있을까요?”
걱정스런 말투였지만 말속엔 뼈가 있었다. 정오가 실패할 거라고 확신한 듯했다. 안찬섭 팀장은 정오를 격려했다.
“어쨌든 해보자, 해보자. 어차피 1차 제안서니까 또 한 번 수고해야 할 거야. 그때 꼼꼼히 보는 걸로 하고 오늘은 제출에 의의를 갖자. 이 대리 할 수 있지?”
“네. 해볼게요.”
“나는 지금 당장 수습해야 할 다른 일이 터져서 잠깐 자리 비울 거야. 이따가 돌아올 테니까 그동안 부탁할게. 막히는 거 있으면 전화하고!”
“네. 알겠습니다.”
현재 시각 오후 2시. 6시 보고까지 네 시간 남았다. 6시에 보고라 칼퇴근을 할 수는 없겠지만 7시에는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충분해.’
정오는 전의를 불태웠다. 제작팀원들이 너무 바빠서 정오는 따로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은비는 제작 1팀의 신입사원 카피라이터까지 옆에 끼고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일을 하는 건지 일을 하는 척하는 건지 정오는 계속 의심스러웠지만 굳이 아쉬운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5시 30분. 정오는 제안서를 가까스로 완성했다. 본래의 제안서와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군데군데 잘 떠오르지 않는 부분은 대안으로 채워 넣었다. 정오는 완성된 제안서를 팀원들에게 이메일로 전송했다. 제안서를 확인한 은비가 자리에서 턱을 괴고 앉아 물었다.
“이정오 대리, 이거 내가 썼던 카피랑은 완전히 다른데요. 제대로 기억하는 거 맞아요?”
“그럼 과장님께서 기억과 다른 부분 수정해서 이메일로 다시 보내주시겠어요?”
“내가 오래전에 쪽지들 줬잖아요. 그거 다 어떻게 했어요?”
“어딘가에 있긴 해요. 다만 지금 그걸 찾을 시간은 없어서요. 일단은 과장님께서 자료 보시고 고쳐주세요. 제가 나중에 과장님의 기억력이 얼마나 정확한지 쪽지 찾아서 확인해볼게요.”
정오가 기억력을 지적하자 은비는 움찔하다가 핑계를 댔다.
“나도 시간이 없어서, 그냥 이 대리가 알아서 하는 게 좋겠어요. 이 대리의 과실로 벌어진 일이니 알아서 책임지고 보고하는 게 의미 있겠죠. 응원할게요.”
은비는 책임을 미루는 것으로 실랑이를 정리했다. 이후 외출한 제작 1팀의 안찬섭 팀장도 확인 연락을 주었다. 제안서는 정오가 지헌에게 직접 보고하게 되었다. 6시 정각. 지헌이 직접 회의실로 오겠다고 하여 AE와 함께 자리를 마련해놓고 기다리는 동안 국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정오는 회의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엄마!]
예나의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나가 국순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제안서 보고 때문에 긴장한 와중에도 정오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그리게 되었다.
[엄마 퇴근했어? 언제 와?]
“아직 퇴근 못 했어.”
[왜? 왜 아직도 못 했어?]
예나의 시무룩해진 목소리에 정오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회의실 근처라 크게 내색하지 못했다. 지헌이 다가와 알은척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일이 많아서. 그래도 금방 끝내고 갈 거야. 퇴근하면서 전화할게.”
[응. 엄마 빨리 와! 약속한 거 알지?]
“그럼 알지. 빨리 갈게.”
조심스럽게 예나를 달래고 전화를 끊었을 때, 저편에서 지헌이 보였다. 지헌이 어쩐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오는 꾸벅 인사하고는 먼저 회의실로 들어왔다. 정오가 먼저 들어온 후 지헌이 들어왔고, 그 뒤로 제작 1팀 팀원들이 주르륵 들어왔다. 보고 때 얼굴도장은 찍어야 한다고들 생각한 모양이었다. 담당 AE가 지헌의 앞에 미리 프린트한 제안서를 내밀었다.
“발표할까요?”
“그냥 알아서 보겠습니다.”
AE의 물음에 지헌은 짧게 대답하고는 제안서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회의실 안은 빠르게 조용해졌다. 이따금 페이지가 넘어가는 간헐적인 소음이 멈추었을 때, 지헌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질 때, 팀원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확인한 지헌이 제안서를 내려놓았다.
“기획 파트는 간결하고 깔끔하네요. 문제는 제작 파트인데.”
직원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만 삼켰다.
“여기서 더 좋은 의견을 내는 건 무리겠죠? 회의가 길어지면 의견 취합은 더 어려울 테고.”
지헌이 하나 마나 한 질문을 던져 다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작 1팀과 2팀 팀장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총대를 메고 지헌에게 항변할 이도 없었다.
“그럼, 이정오 대리.”
“네.”
“오늘 다시 만들어서 보여주세요. 나머지는 각자 할 일들 하시면 됩니다.”
청천벽력 같은 지시에 정오의 얼굴에선 핏기가 사라졌다.
“이사님, 지금 그 말씀은……”
“싹 다 뜯어고쳐야겠네요.”
“…….”
“처음부터 전부 다시 손봐야겠습니다.”
지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다른 이들은 따로 책망을 듣지 않은 것에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에 지헌에게 붙들려 이사 집무실에서 작업을 해본 적이 있는 기훈은 암담한 표정으로 지헌을 쳐다보았다. 정오가 회의실을 나서는 지헌을 쫓아갔다.
“이사님, 어떤 부분을 손봐야 하는지 먼저 말씀을 주시면 안 될까요?”
“카피가 이상합니다. 성의가 조금도 없네요.”
“정확히 어떤 카피가 성의 없게 보이십니까?”
“전부 다.”
“…….”
“전부 다 다시 해야겠는데요.”
안 돼……. 지헌의 매정한 말에 정오는 억울했고, 또한 절박해졌다. 정오는 계속 지헌을 쫓아갔다. 집무실 복도에 이르러 곁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된 후에 정오는 다시 지헌을 불렀다.
“이사님, 저 오늘은 집에 가서 일하면 안 될까요? 제안서는 되도록 빨리 수정해서 오늘 안에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집에 큰일이라도 있습니까?”
“네. 집안일이 좀 있어서요.”
“어떤 집안일?”
지헌의 이어진 질문에 정오는 입술을 말아 감추었다. 조시내 대리가 바쁘다며 정오에게 광고주 접대를 미룬 다음 날, 지헌이 조시내 대리에게 얼마나 악독하게 굴었는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왠지 아버지의 기일이라고 했다간 사망자 제적등본을 떼어 오라고 할 것 같았고, 엄마가 아프다고 했다간 병원 진단서를 끊어오라고 할 것 같았다.
“……그냥 집안일이요.”
“말 못 할 집안일?”
“…….”
“그런 급한 집안일이 있다면, 일을 제대로 할 수나 있겠습니까? 이 대리가 집에 가면 휴대폰도 안 본다는 걸 내가 잘 알고 있는데.”
“아뇨. 이번엔 꼭…….”
“그렇게 사정할 시간에 얼른 일을 시작해서 빨리 끝내야겠단 생각 안 해요?”
지헌이 돌아서려 하자 마음이 급해진 정오는 지헌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이사님, 그럼 저 세 시간만, 아니, 두 시간만 나갔다 오면 안 될까요? 두 시간 후엔 꼭 돌아오겠습니다. 제발…….”
“지금 나보고 이 대리 집안일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두 시간을 기다리란 말입니까?”
그러나 지헌은 요지부동이었다.
“본인이 하겠다고 나선 일은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안 그래요?”
지헌의 지적에 정오는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정오 대리가 이 일의 책임자라고 생각해서 지시하는 겁니다. 정 안 되겠으면 안찬섭 팀장을 불러요. 안 팀장님하고 작업하면 되니까.”
지헌은 정오가 손끝으로 붙잡은 소맷자락을 빼내고서 집무실로 들어갔다. 정오는 급하게 안찬섭 팀장에게 연락했다. 안찬섭 팀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가니 은비가 자신을 빤히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정오는 은비에게 달려갔다.
“과장님, 죄송한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제가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요. 오늘 제안서 수정하는 것만 맡아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평소 같았다면 절대 하지 않을 부탁. 언젠가 후회할지도 모르는 부탁. 하지만 정오는 체면을 집어던졌다. 그만큼 간절했다. 은비가 이번 한 번만 도와준다면, 앞으로 다시는 은비에게 날을 세우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맹세도 했다.
“뭐라고요? 허. 기가 막히네요.”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은비는 더없이 황당한 일을 당했다는 듯 음성을 높였다. 주변의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잘못은 전부 이 대리가 저질러놓고 왜 나보고 수습하라는 건데요?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정오는 곧장 현실을 깨달았다. 그래. 내가 어리석었다. 채은비가 그런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아닌데. 내가 너무 절박하여 썩은 동아줄로 손을 내밀었다. 정오는 빠르게 단념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정오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기훈은 외부에 나가 있는 미란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며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팀장님께서 돌아와 주시면 문제가 더 빨리 해결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정오를 퇴근시키고자 애쓰는 모습에 정오는 눈시울을 붉혔다. 미란과의 통화를 마친 기훈이 정오에게 말했다.
“대리님, 도움이 못 되어서 너무 죄송합니다. 제가 카피라이터였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야.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순간 복도에서 지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정오 대리.”
“네.”
정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업 노트북 들고 회의실로 와요. 보면서 같이합시다.”
지헌의 지시에 은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정오랑 회의실에 단둘이 있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