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울게 되리라2021.08.07.
- 엄마, 나 일이 생겨서 몇 시간 늦어. 예나 좀 잘 달래줘. 미안.
국순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후, 정오는 새로 발급받은 노트북을 끌어안고서 회의실로 갔다. 지헌은 제 앞에 노트북을 켜놓고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정오가 들어오니 제 옆자리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정오가 지헌의 옆에 노트북을 내려놓고 전원 코드를 연결하는 동안 지헌이 느긋하게 말했다.
“우리에겐 약속된 기한이 있고 그 기한은 내일이에요. 광고 회사에서 마감 전날 개인적인 스케줄을 비우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고.”
“네.”
이미 칼퇴근을 포기했으니 그의 핀잔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차갑게 잔소리를 쳐냈으나 그의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이 대리가 일을 끝내지 못하면 나도 퇴근 못 합니다. 이 대리가 스크립트를 쓰면, 나는 그걸 심사숙고해서 확인하고, 다듬도록 지시해야 하죠.”
“…….”
“아홉 시까지 끝내는 걸 목표로 얼른 합시다. 끝나면 집까지 바래다주죠.”
병 주고 약을 주겠다는 심사가 고와 보일 턱이 없었다. 정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맡은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잔인한 현실에 자꾸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언젠가는,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여주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이 남자는 그 절박한 부탁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사람이 되었다. 인정하자. 이정오. 이제 그만 미련을 버려. 그는 더 이상 7년 전의 그 정지헌이 아니야.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정오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눈물을 참으니 콧물이 간질간질 코를 괴롭혔다. 정오는 훌쩍 코를 들이마셨다. 그가 고개를 돌려 정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굴을 보여주기 싫은 정오도 함께 고개를 돌렸다. 지헌의 눈빛은 좀 더 집요해졌다.
“혹시 지금 울어요?”
“아뇨.”
“프로 카피라이터가 야근 좀 한다고 울어서야.”
“안 웁니다.”
지헌의 놀림에 자판을 두드리는 정오의 손길은 좀 더 전투적이 되었다. 지헌은 제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작업에 열중하는 정오를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좀 전에 성미란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오의 사정을 헤아려달라고 부탁하기에 되도록 일찍 끝내고 퇴근시키겠다고 대답했다. 뜻밖의 문제가 생겨준 덕분에 그녀를 옆에 둘 수 있게 되었다. 노트북 바이러스가 아니더라도 그녀를 붙잡아둘 생각이었지만. 아침에 그녀와 송기훈 사원이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 기훈은 무언가 작은 선물을 건네며 정오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힘든 일은 다 저한테 맡기세요. 오늘은 칼퇴하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것이 지헌의 눈에 무척 거슬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오후 6시 정각. 지헌은 보고를 받기 위해 회의실을 찾았다가 우연히 정오의 통화를 엿듣게 되었다.
“일이 많아서. 그래도 금방 끝내고 갈 거야. 퇴근하면서 전화할게. 그럼 알지. 빨리 갈게.”
무언가 설레는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음색. 웃음이 가득한, 아주 살가운 목소리.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이토록 밝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며 퇴근 시간을 재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괘씸했다. 그래놓고서, 그렇게 웃으며, 밀회를 하듯 속닥이고서. 제안서를 다시 만들라 하니 집안일 핑계를 대다니. 그따위 핑계에 순진하게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했나? 지헌은 그녀가 사정을 했던 일이 우스워 입을 가리고 피식 웃었다. 그 와중에 두세 시간 자리를 비우겠다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헌은 두세 시간 동안은 그녀를 풀어줄 수 없었다. 여전히 그녀는 감정을 보이지 않고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를 쓰는 모습이 참 깜찍스러웠다. 지헌은 손끝이 간질거렸다. 바로 옆자리, 그녀가 가진 체온이 그를 괴롭혔다.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 그녀의 옆모습을 더 제대로 보고 싶었다. 향기를 맡아보고 싶었고 붉어진 뺨을 핥아보고 싶기도 했다. 그동안은 어떻게 살았던 걸까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지헌은 저열한 욕구에 휩싸여 있었다.
* 은비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에 정지헌과 이정오가, 단둘이……. 이럴 줄 알았으면 이정오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제안서 마무리는 내가 하겠다고 할 것을. 자신이 이정오의 부탁을 거절하여 두 사람이 붙어 있게 되었단 사실에 속이 쓰렸다. 조심스럽게 걸어 회의실로 향했다. 왠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회의실 문이 열려 있지야 않겠지만 회의실 문에는 모두 작은 유리창이 있으니 그 안을 들여다볼 수는 있을 것이다. 쭉 붙어 있는 다섯 개의 회의실. 그중 한 곳에 두 사람이 있을 텐데……. 회의실 두 곳은 비어 있었고 두 곳은 경쟁 PT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어느덧 은비는 가장 마지막 회의실 앞에 이르렀다. 가장 작은 방. 떨려오는 다리로 천천히 다가섰다. 회의실 안쪽이 고요하여 발소리도 최대한 죽여야 했다. 다 노출된 유리창으로 회의실 안을 들여다보는 게 뭐 그리 나쁜 짓이라고 이렇게 조마조마할까. 은비는 그런 자신이 우습다 생각하며 천천히 유리창으로 눈을 가져갔다. 그리고, 알고싶지 않았던 사실을 기어이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 그리고 이정오를 바라보는 정지헌의 눈빛. 은비는 저도 모르게 한 손을 올려 제 입을 막았다. ……어떻게 사람 눈빛이 저렇게 변할 수가 있지? 마치 제 세계에 그녀 외에 다른 것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듯 노골적인 눈빛이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는데도, 오랜 굶주림과 식욕이 느껴져 소름이 끼쳤다.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지켜보는데도, 몰래 들여다본 것뿐이었는데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누군가의 속살을 훔쳐본 것처럼, 은밀한 행위를 훔쳐본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당혹스런 패배감에 얼굴에 열이 오르며 눈물이 차올랐다. 정지헌은 한 번도 자신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 밤 8시 50분. 종종 자정 넘어서까지도 야근을 하는 처지라 세 시간 정도의 초과근무는 별로 와닿지도 않지만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택시 타고 빨리 가면…… 20분 정도 걸리려나?’
정오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9시 30분까지 집에 도착하는 게 목표. 일찍 자는 어린이에게는 늦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아직 생일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예나야, 기다려. 엄마가 얼른 갈게.
“장담하는데, 이것보다 좋은 카피는 없을 거예요. 제 머리에서 나오는 건 이게 최선입니다.”
정오는 지헌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여 다시 만든 제안서를 지헌의 앞에 내밀었다. 꼼꼼히 읽어본 지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수고했어요.”
“네.”
정오는 확인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바삐 자리를 정리했다. 지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서며 말했다.
“가방 챙겨서 내려와요. 집까지 바래다줄 테니까.”
정오는 지헌의 뒤통수에 대고 몰래 흥, 콧방귀를 뀌었다. 지헌은 집무실로 돌아가 재킷을 챙겨 입었다. 정오에게 새로 받은 제안서는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어 가방에 넣었다. 집에 데려다주겠다 말했지만 왠지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 움직여야겠단 생각에 서둘러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하지만 정오는 1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정오의 자리에 들렀다가, 모습이 보이지 않아 전화를 걸게 되었다. 한참 만에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딥니까.”
[밖인데요.]
그녀의 냉랭한 대답에 미간이 구겨졌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데 밖이라고?”
[계단으로 내려갔습니다.]
지헌이 이를 악물고서 말했다.
“내가 데려다준다고 했잖아요.”
[싫어서요.]
“…….”
[집에 갈 때까지 제가 이사님 옆에 있어야 하나요? 업무도 아닌데?]
“…….”
[내일 뵙겠습니다.]
전화가 뚝 끊겼다. * 골인! 9시 30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예나가 달려왔다.
“엄마!”
“공주님!”
정오는 예나를 두 팔로 들어 끌어안았다. 반갑게 엄마를 맞았던 아이는 금세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어!”
으아아앙! 서러움 대폭발.
“예나야, 미안해. 엄마가 너무 미안해.”
정오는 예나를 부둥부둥 안고서 다독였다.
“식당에서 계속 엄마 기다렸단 말이야아.”
“하아, 미안해. 미안해. 얼른 파티하자. 파티!”
“파티는 식당에서 했지이!”
국순이 다가오며 말했다.
“도빈이랑 도윤이랑 도빈이 엄마랑 와서, 식당에서 노래 부르고 케이크 먹었어.”
국순의 설명에 예나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나는 엄마랑 하고 싶었단 말이야아!”
“그럼 엄마랑 또 한 번 하자! 좋지? 괜찮지?”
정오는 얼른 뛰어가 케이크를 사 왔다. 바로 집 앞에 베이커리가 있어 케이크를 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예나는 하루에 두 번 생일 파티를 하게 되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예나의 생일 축하합니다.”
정오의 노래에 예나는 눈물을 머금고서 웃었다. 정오가 일찍 오지는 못했지만 예나는 바라던 것을 이룬 셈이었다. 기훈이 준 선물을 풀어보고, 오래전에 사놓고 포장을 뜯지 못했던 선물까지 뜯어본 뒤엔 다시 발랄하고 해맑은 이예나로 돌아왔다.
“엄마, 나 도빈이한테도 선물 받았어. 이거 예쁘지!”
기분이 좋아진 후에는 손을 반짝거리며 도빈에게서 받은 선물을 보여주었다. 왼손의 검지에 빨간색 하트모양 큐빅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도빈이가 반지 선물한 거야?”
“응. 그리고 마술이랑 개다리춤도 보여줬어.”
“헤에. 예나 재미있었겠네.”
“응. 삼행시랑 편지도 준비했다고 했는데 그건 내년에 준대.”
엄마가 안 온다며 울음을 터트려버린 예나를 위해 도빈이 마술 세 개와 개다리춤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간신히 예나를 달랜 후에는 도빈이 울상이 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4년 동안 할 게 없다는 이상한 말을 남겼다고도 했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신나게 얘기한 예나는 이내 눈을 깜빡거렸다. 어느새 10시가 훌쩍 넘었다.
“엄마 근데 나 졸려. 잘래.”
“응. 그래. 자자. 엄마가 안아줄게.”
이내 잠자리에 이불이 펼쳐지고 예나와 정오가 나란히 누웠다. 많이 피곤했는지 예나는 바로 잠들었다. 예나를 지그시 토닥이던 정오는 예나가 잠든 후에도 한참 바라보다가 쪽쪽쪽쪽, 아기 피부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었다.
뜻깊은 하루의 끝. 국순은 오늘 하루 특히나 고단했을 딸을 찾아 방문을 열었다가 딸이 하는 꼴이 우스워 웃고 말았다. 잠든 애를 붙들고 뽀뽀세례를 하네. 저리도 좋을까.
“자는 것도 못 놓겠어?”
“응.”
“맨날 봐도 그렇게 이뻐?”
“그럼. 당연하지.”
국순은 그런 딸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그렇게 이쁘다. 내가 만든 가장 예쁜 것. 내가 낳았지만 나보다 더 귀한 것. 네가 네 딸을 사랑하듯, 나는 너를 사랑해. 내게는 서른 살이든 마흔 살이든 어린아이 같은, 그래서 잘 지켜줘야 하고 더 사랑해주어야 하는 나의 아이, 나의 공주님.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아이인데, 요즘은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힘들어하는 것 같아 계속 마음이 쓰였다. 다급하게 보낸 문자메시지 한 줄만 읽어보아도 알 수 있다. 오늘도 몹시 바쁜 와중에 무리를 했을 것이다. 제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예나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사이사이 언뜻 보았던 딸아이의 어두운 표정이 엄마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이정오.”
“응?”
“힘들면 그만둬. 엄마가 너 하나 못 먹여 살리겠어?”
“나 하나가 아니잖아. 우리 예나도 있잖아.”
정오가 농담하듯 가볍게 대꾸했다. 아기를 낳아도 여전히 아이 같은 서른 살짜리 나의 아이. 부디 너의 세상이 따뜻하고 안전하길. 거친 풍파로 상처받지 말길. 엄마는 그저 마음으로만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헌은 맥주 한 캔을 집어 들고 와 소파에 앉았다. 눈앞에는 회사에서 가져온 제안서가 펼쳐져 있었다. 이정오 대리가 바람을 맞혀 기분이 조금 상했다. 괜히 제안서를 노려보던 지헌은 한숨을 쉬며 집어 들었다. 메인 스크립트 시안 아래에 정오가 카피 후보로 썼던 글귀가 지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무 지 개 같은 상사. 그 옆에 친절하게 무지개 그림도 붙어 있었지만 지헌은 그 속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 맹랑한 발악에 지헌은 픽 웃고 말았다. 계속 이러니 자꾸 옆에 두고 싶잖아.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서 페이지를 몇 장 더 넘겼다. 그러다가 그녀가 추가한 다른 문장에 이르러 손이 멈췄다. 자신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는 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움직여 글씨들을 더듬어보았다. 어느새 웃음은 완전히 말라버렸다. 반듯하게 프린트된 글씨들이 왠지 어지러웠다. 지헌은 맥주도 제안서도 그대로 놓아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뻥 뚫린 가슴에 무엇을 들이부어도 메워지진 않을 것 같았다.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밤바람이 들어와 펼쳐진 제안서의 맨 위 페이지가 잠자리 날개처럼 팔랑거렸다. - 나를 잊은 그대. 잊은 것을 그리워하다 울게 되리라. 언어가 되지 않은 것들 속에는 더 많은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