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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당신이 가진 전부를 다 줘도 (30/183)

30. 당신이 가진 전부를 다 줘도2021.08.11.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 또 하루, 또 하루. 예나의 생일을 지나 주말을 지나 다시 월요일이 찾아왔다. 지난 금요일, 다원주류에 보낸 1차 제안서는 다행히도 긍정적인 답신으로 돌아왔다. 1차 제안서를 기반으로 하여 콘티를 준비하고 상품 패키지 시안을 준비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전날 고생한 정오는 미란의 위로를 받았다. 금요일에 미란이 잘 달래지 않았다면 정오는 정말로 회사를 뛰쳐나갈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바이러스에 걸린 정오의 노트북도 돌아왔다. 수요일에 받게 될 줄 알았는데 월요일에 받을 수 있었다. 지헌의 특별한 요청 때문에 직원이 서두른 것 같기도 했다.

16551142858634.jpg“이건 운이 나빠서 얻어걸린 게 아니라, 누군가 바이러스를 심어놓은 것 같던데요.”

전산관리실의 직원이 털어놓았다. 정오 또한 비슷한 의심을 했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급받은 컴퓨터라 비교적 깨끗할 터인데 심각한 바이러스에 걸렸다는 게 이상했다. 어쨌든 다원주류 자료 말고도 경쟁 PT 준비 자료도 들어 있었기에 노트북을 무사히 고친 것이 다행스러웠다. 전산관리실의 직원은 아주 힘든 작업이었다며, 더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목요일의 야근 이후, 정오는 지헌과 대면할 새가 없었다. 주말에도 회사를 나왔지만 지헌은 볼 수 없었다. 너무 미워서 당분간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마음이 편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 미워서 눈앞에 마주하고 바락바락 대들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또 또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다. 말짱한지, 신변에 문제는 없는지. 예나의 생일에 야근을 하며, 그가 너무 미워서 정오는 속으로 갖가지 저주를 중얼거렸다. 사흘을 꼬박 아파서 내리 굶었으면, 사흘을 굶다가 배가 고파서 간신히 일어났는데 집 안엔 물 한 방울 없었으면, 물 사러 갈 힘이 없어서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친구들은 모두 놀러 나갔으면, 하고. 저주에 꽤 진심을 담았기에, 그 저주가 제대로 먹힌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오늘 아침 말짱한 모습으로 출근했고 꽤 성실하게 일하는 것 같기도 했다. 1본부의 몇 명이 지헌의 집무실에 불려가 각기 다른 임무를 전달받았다. 기분 좋게 집무실을 나오는 이도 있었고 영혼을 잃은 듯 터덜터덜 걸어 나온 이도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정오의 팀 송기훈 사원이었다.

16551142858639.jpg“대리님 저 죽고 싶어요…….”

기훈이 집무실에서 받아온 종이를 넋 놓고 바라보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16551142858644.jpg“왜. 왜. 왜.”

16551142858639.jpg“이게 대체 뭘까요?”

기훈이 정오에게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16551142858639.jpg“정 이사님이 이렇게 하면 된다고 보여주셨는데…… 이게 뭔지 모르겠어요.”

기훈이 맡은 홈카메라 브랜드의 홍보 웹툰인 것 같은데. 이 남자가 종이에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정오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16551142858644.jpg“뭐야, 이 똥손은?”

16551142858639.jpg“이건 그냥 똥손이 아니에요. 개똥손이라고요.”

정오가 솔직하게 평하니 기훈도 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한탄했다. 정오는 그 기묘한 그림을 더 유심히 쳐다보았다. 정지헌, 이 남자야……. 개를 그렸니 새를 그렸니. 그림을 못 그리면 그리지 말지. 왜 나대서 품위를 잃고 직원까지 고통스럽게 하는 건데…….

16551142858644.jpg‘예나가 왜 그렇게 상상의 동물을 그려대나 했더니 다 유전자였네.’

왠지 예나의 10년 후 미술 점수가 보이는 듯하여 더욱 울컥 화가 났다. 무슨 일인지 하여 다가온 성미란 팀장은 풉 웃어버렸다.

16551142858639.jpg“팀장님 웃으시면 안 되죠. 저는 심각한데.”

16551142858676.jpg“아, 기훈 씨. 미안 미안. 이사님이 인사이트는 있는 것 같은데 그림 솜씨는 완전 꽝이구나.”

16551142858639.jpg“그래서 저는 이걸 참고해서 개를 그려야 할까요, 새를 그려야 할까요?”

기훈이 질문하니 웃던 팀원들도 조용해졌다. 곰곰이 생각하던 정오가 나섰다.

16551142858644.jpg“나한테 맡겨.”

16551142858639.jpg“어떻게 하시려고요?”

16551142858644.jpg“똑같이 발라버려야지.”

16551142858639.jpg“……발라요?”

16551142858644.jpg“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개새에는 개새.”

두고 보자 정지헌. 보복의 기회를 움켜쥐고 싶었다. 대답한 정오가 미란을 바라보았다. 미란이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오를 믿어보겠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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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루한 주말을 보내고 맞이한 월요일. 본부장 주관의 팀장 회의로 주간업무 보고를 받은 지헌은 몇몇 직원들을 따로 불러 임무를 하달했다. 한 달 전까지는 일도 생활도 재미가 없었는데, 맥스기획으로 부임한 뒤에는 일에 조금 재미를 붙인 느낌이었다. 목요일 밤부터 언짢았던 기분이 나아진 건 아니었지만. 야근 때문에 까칠해진 이정오를 태워다주겠다고 했다가 바람맞은 후, 지헌은 정오와 다시 얘기할 기회를 엿보았지만 실패했다. 이정오를 먹이려고 금요일에 사놓았던 것도 여태 전해주지 못했다. 정오는 계속 자리를 비웠고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그중 가장 성가신 사람은 역시 송기훈 이었다. 기훈의 업무를 살핀 지헌은 기훈을 집무실로 따로 불러 일거리를 던져주었다. 몸은 바쁘겠지만 일 자체는 서로 맡고 싶어 할 정도로 재미난 것이니 기훈의 만족도도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분명히 기훈에게 일을 시켰는데, 저녁때쯤 보고받을 때가 되어서 제작 2팀의 팀원, 이정오와 고은주 대리까지 송기훈의 뒤에 찰싹 붙어 따라 들어왔다. 송기훈의 옆에 이정오가 바짝 붙어 있는 것이 성가셨지만 이렇게나마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어 만족스럽기도 했다.

16551142887097.jpg“송기훈 씨한테 일을 시켰는데?”

16551142858644.jpg“네. 기훈 씨가 고민하는 부분에 대해 저희가 도움을 주게 되어서, 설명을 드리려고 같이 왔습니다.”

정오가 씩씩하게 말했다. 혹시 송기훈이 혼날까 봐 지켜주려는 건가? 지헌은 의심의 눈초리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고은주 대리가 지헌의 자리에 태블릿 PC를 올렸다. 3인 4각 경기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바짝 붙어서 움직이는 세 사람의 모습은 아주 우스웠다.

16551142858644.jpg“이사님의 인사이트가 아주아주아주 획기적이어서 그대로 사용하게 됐습니다.”

정오가 그 포문을 열었다.

16551142887097.jpg“어떤 인사이트를 말하는 거죠?”

16551142858644.jpg“바로 이거요.”

정오는 화면에 떠오른 캐릭터를 가리켰다. 이게 뭔가 싶어 지헌은 미간을 좁힌 채로 화면에 눈을 가까이 댔다. 아침에 기훈에게 그려준 강아지였다. 그 그림을 복사, 붙여넣기 하여 그대로 들고 온 것이다.

16551142858644.jpg“캐릭터가 개인지 새인지 불분명하니 일단 ‘개새’라고 부르겠습니다.”

그제야 세 명이 함께 찾아온 이유를 알게 됐다. 이정오가 자신을 놀리려고 팀원 두 사람을 더 데려온 것이었다. 정오가 홍보 웹툰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그간 딱딱한 모습만 보였던 고은주 대리의 얼굴이 몇 번 일그러졌다. 웃음이 툭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송기훈은 입술 끝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정오의 설명은 웃겨 죽겠는데 이후 지헌의 반응이 두려워 긴장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이정오는 아주 능청스러웠다. 목요일에는 그토록 화난 얼굴을 하고 있더니, 지금은 조선시대의 전기수에 빙의한 듯 다채로운 표정이었다. 지헌은 놀림당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꽤 유쾌했다. 눈앞의 웹툰보다는 정오의 입 모양만 바라보게 되었다.

16551142887097.jpg“웹툰은 잘했는데, 이정오 대리는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알찬 설명을 잘 들은 후엔,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서 물었다. 상대 쪽에서 먼저 덤볐으니 그 또한 돌직구를 날려도 할 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정오는 달랐다. 조금도 쫄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16551142858644.jpg“어……? 무슨 말씀이세요, 이사님?”

아주 능청스러웠다. 당황스러워하는 직원을 연기해내는 표정이 훌륭했다.

16551142887097.jpg“내가 기훈 씨한테 그려준 그림을 그대로 들고 가자고 선동했겠네요. 이정오 대리가.”

16551142858644.jpg“솔직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알 수가 없었거든요. 이게 갠지, 샌지.”

정오는 아주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16551142858644.jpg“이사님께서 말씀해주세요. 그럼 수정하겠습니다. 이게 갠지, 샌지.”

16551142887097.jpg“…….”

16551142858644.jpg“개를 그리신 건지 새를 그리신 건지.”

16551142887097.jpg“…….”

16551142858644.jpg“아니면 그냥 상상의 동물인가요?”

푸흡. 고은주 대리는 웃음을 못 참고 결국 툭 터트려버리고 말았다.

16551142887097.jpg“개.”

지헌이 정오를 빤히 노려보며 대답했다.

16551142858644.jpg“아, 개. 알겠습니다. 개.”

정오가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크게 끄덕였다. 지헌은 고개를 돌려 은주를 바라보았다.

16551142887097.jpg“고은주 대리. 다 웃었습니까?”

16551142950186.jpg“흡. 죄송합니다.”

16551142887097.jpg“아닙니다. 그림을 잘못 그렸으니 내가 미안해야죠. 하지만 덕분에 나도 아주 유쾌했습니다.”

의외의 반응에 삼총사는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헌이 어쩐지 소름 끼치는 부드러운 미소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1142887097.jpg“송기훈 씨는 얼른 캐릭터 수정해서 작가한테 연락하시고, 이정오 대리는 잠깐 남죠.”

삼총사는 다시 한번 놀랐다. 집무실에 들어오기 직전에 정오와 기훈, 은주는 동맹을 맺었다. 정지헌 이사와 단둘이 남지 않도록, 서로 옆에 있어주기로. 기훈이 불려가면 정오와 은주가 따라가고, 정오가 불려가면 기훈과 은주가 따라가기로. 그렇게 약속했는데 정지헌을 만나자마자 이런 불상사가 생겨버렸다. 기훈과 은주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정오를 콕 집어서 남기겠다고 지헌이 얘기해버렸으니 난처한 상황이었다.

16551142858639.jpg“하지만 대리님은…….”

기훈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난처하게 지헌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이 정오가 의젓하게 두 사람을 보내야 했다.

16551142858644.jpg“먼저 가요. 고 대리, 기훈 씨.”

세 사람의 눈물겨운 이별을 흐린 눈으로 지켜본 지헌은 기훈과 은주가 물러간 후 정오에게 자리를 권했다.

16551142887097.jpg“저쪽에 앉아요.”

정오는 뚱하게 자리에 앉았다. 지헌은 맞은편에 바로 앉지 않고 돌아섰다. 그리고 집무실 책상 옆에 놓인 상자를 갖고 왔다. 이번에도 무언가 큼지막했다. 지헌은 정오의 앞에서 상자를 열었다. 이게 다 뭐야……. 상자 안의 다채로운 구성에 정오의 입이 슬쩍 벌어졌다. 예쁘게 담긴 가지각색의 쿠키와 초콜릿이 한 보따리였다. 황당해진 정오의 이맛살이 우그러졌다.

16551142887097.jpg“먹을 거 버리려거든 부르라면서.”

정오는 언젠가 자신이 임기응변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앞으로 먹을 걸 버리려거든 절 주세요, 하고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16551142858644.jpg“……그래서 이걸 지금 버리신다는 거예요?”

16551142887097.jpg“그렇게 됐으니 가져가요.”

정오는 얕게 실소했다. 딱 봐도 어디서 구입한 것들을 펼쳐놓고는 ‘버리는 거’라고 설명하는 능청이 우스웠다. 혹시 사과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건가? 내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있긴 한 건가? 쿠키와 함께 펼쳐진 정적을 사이에 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미안한 표정은 읽히지 않았다. 그저…… ‘이거 줄 테니 기분이나 풀어’라고 하는 듯한 오만한 눈빛이었다. 정오는 톡 쏘아붙였다.

16551142858644.jpg“싫습니다. 마음이 바뀌어서요. 원래 버리시려던 거니 그냥 버리세요.”

16551142887097.jpg“그럼 이 대리가 버려요. 난 이 대리가 부탁한 대로 한 거니까.”

16551142858644.jpg“그것도 싫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정오는 곧장 일어섰다. 지헌이 팔짱을 끼고 앉아 정오를 쳐다보았다. 이 여자, 여태 삐쳐 있구나. 뒤끝이 길게 남은 그녀의 성미를 읽어낸 것이다.

16551142887097.jpg“야근 한 번 시킨 게 그렇게 못마땅했습니까?”

16551142858644.jpg“당연하죠.”

16551142887097.jpg“다들 그 정도 야근은 하는데.”

16551142858644.jpg“제가 부탁드렸잖아요. 엄청 간절하게요. 그날은 집에 가야 한다고. 도무지 안 되겠으면 두 시간 후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정오는 간절했던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또다시 억울해져서 눈에 슬쩍 눈물이 맺혔다.

16551142887097.jpg“그러니까, 그게 대체 어떤 집안일이었는데. 그걸 알아야 나도 이 대리의 마음을 헤아리죠.”

당신 딸의 생일이었다고! 확 소리칠 수 없어 돌덩어리를 삼킨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16551142858644.jpg“그걸 얘기하면 이사님은 그 집안일의 경중을 멋대로 판단하시겠죠. 제게 엄청 중요한 일이라도 이사님은 아니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 거고요.”

그녀의 당돌한 대꾸에 지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정오는 움찔했지만 뒷걸음질 치지는 않았다.

16551142858644.jpg“그간 있었던 일들이 찝찝해서 이러시는 거라면 쿠키 공세 말고 직접 사과를 하셔야죠.”

16551142887097.jpg“내가 뭘 사과해야 하죠?”

괜히 사과라는 말을 꺼낸 걸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되돌릴 수는 없었다. 정오는 그에게 실망스러웠던 일들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16551142858644.jpg“지지난 주 목요일에 편의점 앞에서 제 아빠인 척했던 거, 지난주 목요일에 옆에 앉혀놓고 야근시키셨던 거요.”

16551142887097.jpg“지지난 주 목요일은 속아 넘어간 그쪽이 잘못된 거고. 지난주 목요일은 상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겁니다. 야근수당에 대해선 이미 연봉계약서 사인할 때 합의가 된 내용이고. 그걸 왜 사과해야 합니까.”

16551142858644.jpg“속았으니까요. 그리고 간절하게 부탁했는데 완전히 무시당했고요. 이사님 때문에 느껴선 안 되는 감정을 느껴야 했으니까.”

언젠가 나는 이 말을 후회할지도 몰라. 하지만 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 나는 존엄하니까.

16551142858644.jpg“어떻게 돌아가신 아빠 흉내를 내나요. 장난으로도 그래선 안 되죠. 그리고 야근은, 평소 같았으면 저도 합니다. 제 책임이니 당연히 밤을 새워서라도 수습해야죠. 하지만 그때는 제가 절박하게 부탁드렸잖아요.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이사님도 이메일로 전달받으셔도 되는 거라 부탁드린 겁니다. 도무지 안 되겠으면 두 시간 후에 다시 돌아오겠다고도 말씀드렸죠.”

물론 그는 본부장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직원의 처지를 헤아려보려는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함께 대안을 생각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자신이 내놓은 답만을 강요했다. 그럼 안 되잖아.

16551142858644.jpg“그리고, 일할 때 그렇게 옆에서 지키고 계시면 직원들 능률 다 떨어집니다. 이사님이 옆에 안 계셨다면 지난주 목요일 일은 훨씬 더 빨리 끝냈을 것 같네요.”

16551142887097.jpg“…….”

16551142858644.jpg“그러니, 사과를 해주신다면 받겠습니다.”

16551142887097.jpg“못 하겠다면?”

그가 뻔뻔하고 싸늘하게 대꾸했다. 표정 역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의 고고한 자존심에 정오의 입술 사이로 허탈한 헛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16551142858644.jpg“못 하신다면 안 하시면 되는 거죠, 뭐.”

정오도 결국 내려놓게 되었다. 일깨워주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어떤 것을 사과해야 한다고 직접 알려주었는데도 하지 못한다면 그녀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다. 정지헌이라는 사람을.

16551142858644.jpg“언젠가 조금 후회하실 수도 있겠지만, 지금 사과 같은 거 안 하셔도 딱히 이사님께 지장이 가는 건 없을 것 같네요.”

포기하면 나도 편하지. 조금은 홀가분했다. 용기 있게 지헌에게 한발 다가간 정오가 긴하게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16551142858644.jpg“이사님이 가진 게 엄청 대단한 거 같죠?”

16551142887097.jpg“…….”

16551142858644.jpg“이사님이 가진 전부를 다 줘도 내 전부와 바꾸지는 않을 거예요.”

나의 전부. 예나를, 가족을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졌다. 당신 때문에 이 회사를 계속 다니기로 했던 것이니, 당신을 포기하면 나도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예나를 보여줄 수 없어. 괜히 예나와 당신을 만나게 해서 예나를 상처입힐 수는 없어. 나는 내 딸의 세상이 따뜻하길 바라.

16551142858644.jpg“그만두죠, 뭐.”

그녀의 선언에 그의 눈이 일순 커졌다.

16551142858644.jpg“다 때려치울 겁니다. 이놈의 회사.”

16551142887097.jpg“…….”

16551142858644.jpg“제가 여기서 문 열고 나가는 순간 끝이에요. 아시겠어요?”

당돌하게 얘기하며 한 걸음씩 물러난 정오가 문손잡이를 잡았다.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성큼 발을 뻗은 지헌이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다시 문이 닫혔다. 정오의 어깨가 그의 가슴 안에 갇혔다. 그 품 안이 들끓듯이 뜨거웠다. 그가 자신을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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