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8장. 너의 방패가 되어 (9)
* * *
타티아나는 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는 응접실을 크게 한 차례 둘러보았다.
평소와는 상당히 다른, 어찌 보면 살풍경하기까지 한 광경에 그녀는 으음, 신음하며 말했다.
“전하가 말이야.”
“…….”
“참 철두철미한 성격이신 것 같아. 좀 심하게 꼼꼼해.”
살수들은 일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말에 동의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1왕자의 성격이 그렇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들은 그저 이 사안에 말을 얹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주군의 흉을 보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자비가 계속 동의를 구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는 탓에 살수 중 누군가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으십니다.”
“뭐야, 그 두루뭉술한 답은?”
외무부 소속도 아니고.
얘도 브라우닝 경과 비슷한 과인가, 하며 살수를 훑어보던 타티아나는 다시금 차를 들이켜고는 말했다.
“근데 원래 검술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꼼꼼하긴 해.”
“…….”
“호탕하고 털털할 거라는 건 일반인들의 선입견이지. 뒤로 갈수록 치열하고 섬세한 성격이 훨씬 유리해.”
“…….”
“솔직히 너희도 다 공감하지?”
그러자 동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건 칭찬에 가깝다고 느낀 살수들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제의 중심에 오른 기드언은 요즘 타티아나보다도 일찍 일어났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양인지, 오늘 아침에는 식사도 그녀와 따로 했다.
그가 회의석상에서 앞으로 국왕의 인가가 필요한 서류들을 모두 자신에게 가져오라 이른 뒤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왕후 측은 월권행위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혼수상태나 다름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왕을 깨워 여기에 서명하라,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국왕의 부재 시, 계승 서열이 가장 높은 왕족이 대결하는 건 국법으로 명문화된 사안이었다.
역사적 관례이기도 했다.
누가 토를 단다고 함부로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기드언이 이대로 실권을 장악하는 것도 괜찮은 각본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나 왕후가 이 상황을 수수방관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제 그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기드언은 요즘도 차근차근 도주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가 제일 먼저 행한 일은 브라우닝 경을 필두로 한 풀만 사절단 파견이었다.
그리고 그 일행에는 스칼렛 공주가 포함되어 있었다.
다소 뜻밖이었으나 어찌 보면 브라우닝 경만큼이나 적절한 인사였다.
양국의 입장을 중간에서 매끄럽게 조율하는 일에 공주만 한 적임자가 또 있을까.
스칼렛은 누구보다 발이 넓고 화술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기드언의 목적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사실 그는 내란을 대비하여, 자신의 누이를 미리 외국으로 도피시킨 것이다.
한데 그런 기드언도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유사시, 그들이 성을 빠져나간 뒤 덩그러니 남게 될 타티아나의 시녀들이었다.
타티아나는 그에 대해 기드언에게 딱 한 마디 했다.
‘나중에 제 시녀들은 어떻게 하죠?’
그녀들은 타티아나의 운동 아카데미 1기 수강생들이었다.
시녀들도, 타티아나도 의도한 바가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무상으로 특훈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실력도 체력도 너무나 모자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형편없었다.
아무리 타티아나가 블룸이라 할지라도, 태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운동신경을 강제로 이식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반인은 어찌어찌 잘 해 봐야 운동 좀 배운 일반인 수준이 최선이었다.
단기간에 기사나 살수처럼 되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다.
만약 성안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진다면, 시녀들은 빠져나가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날고 기는 살수들도 모두의 안전을 책임져 줄 수는 없을 테지.
그리고 기드언은 타티아나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 버렸다.
왕자궁의 시녀들을 사절단의 후발대로 합류하게 한 것이다.
본래 공주궁 소속이었으니, 타국에서 공주를 보좌하는 데 부족함이 없으리란 명목이었다.
타티아나는 그 사실을 오늘 아침에서야 알았다.
그것도 휑해진 왕자궁을 보고,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시녀에게 물어물어 알았다.
상당히 어이가 없었으나, 수발을 들어 줄 사람 하나는 잊지 않고 남겨 주었으니 그녀의 남편은 얼마나 세심한 사람이란 말인가.
타티아나가 살수들에게 동의를 구한 기드언의 철두철미함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나기 마련이라고, 시녀들의 공백은 꽤 컸다.
일단 사방이 너무 적막했다.
그걸 메우기라도 하듯, 오늘은 살수들이 건물 안까지 들어와 경계를 서고 있었으나…… 저이들은 원래 1백 명이 모여 있어도 고요한 집단이었다.
타티아나는 시커먼 사내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코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소 주눅이 든 얼굴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급변한 근무 환경에 불안함을 느끼는 눈치였다.
실제로 그랬다.
코니는 아까 전, 살수 하나가 ‘비전하, 드십시오.’ 하며 찻잔을 내미는데, 눈빛이 하도 삭막하여 거기에 독이라도 탄 줄 알았다.
그 차를 본인이 우렸음에도 말이다.
그런 코니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던 타티아나는 위로 차원에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넌 우등생이라 여기 남은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우리한테 가장 짐이 되지 않을 만한, 음, 뭐랄까. 탈출에 적합한 신체 능력……. 아무튼 전하도 그걸 알아본 거지. 그냥 선택받았다고 생각해.”
선택받았다니, 어감이 참 근사하기는 한데 그냥 넘어가기에는 미묘한 느낌이 있어 코니는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좋은 건가요?”
“……나도 모르겠다. 무슨 일 생기면 그냥 케이만 따라다녀. 그럼 돼.”
어떻게 말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타티아나는 대충 그렇게 마무리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제대로 좀 답해 달라는 코니의 간절한 눈빛은 그냥 모른 체했다.
그때 타티아나의 귓가에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기드언의 것은 아니라서,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문가를 바라보았다.
방문자는 기드언의 부관이었다.
그는 전하의 심부름을 왔다고 말하며 노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브라우닝 경께서 보낸 서신입니다.”
여기서 타티아나는 1차적으로 의아해졌다.
“……아직 안 갔대?”
브라우닝 경이 성을 떠난 건 엊그제였다.
그는 아주 끔찍한 걸 들고 떠났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약품 처리한 풀만 마법사들의 수급이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쯤이면 마탑의 게이트를 통과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오늘 새벽, 후발대들이 출발했으니 합류할 수 있겠다는 점에서는 괜찮은 일이지만, 그래도 서두르는 편이 좋을 텐데.
기드언의 부관은 본인도 잘 모르겠다는 건지, 직접 확인하시라는 건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타티아나는 이미 개봉된 봉투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서신은 꽤 여러 장이었다.
뒷면으로 비치는 글자가 얼핏 봐도 빼곡했다.
브라우닝 경과 나 사이에 할 말이 이렇게 많았던가?
연애편지도 이렇게 길게는 안 쓰지, 싶었다.
타티아나는 일단 종이를 펼쳐 보았고, 여기에서 또 한 번 의아해지고 말았다.
편지의 수신인이 그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한테 온 게 아닌데?”
“전하께서는 이미 확인하셨고, 비전하께도 보여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래?”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나도 확인해야 한다는 걸까?
타티아나는 궁금증을 한가득 품은 채 편지를 읽어 내렸다.
곧이어 그녀의 입에서는 호오, 하며 경이롭다는 듯한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이 안에 엄청난 경사가 담겨 있었다.
타티아나가 왕실로 시집온 이래 거의 처음으로 접하는 희소식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찬탄을 금치 못하자, 코니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편지를 힐긋거렸다.
타티아나는 그런 코니를 손짓으로 조용히 불렀다.
코니 역시도 짧지 않은 시간, 공주궁에서 일한 스칼렛 공주의 수족이었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눌 이로는 손색이 없으리라.
“코니.”
“예?”
“공주 전하가 회임을 하셨대.”
“……어머, 어머.”
타티아나가 속삭이자, 코니는 눈을 댕그랗게 뜨더니 나중에는 발까지 동동 굴렀다.
“세상에, 어떡해. 너무 기쁜 소식이네요. 진짜 경하드려요.”
“그치. 좋은 소식이지. 근데 그 경하를 왜 나한테 표하니. 내가 회임한 것도 아닌데.”
“몰라요, 축하받을 사람이 여기 없잖아요. 대신 좀 받아 주세요.”
“……신기한 논리네.”
만약 앞에 있는 이가 왕자비만 아니었으면 코니는 조금 더 격하게 감정을 표출했을 것이다.
서로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리고 어깨를 마구 흔들어 줄 동료들이 곁에 없다는 게 아쉬웠다.
그 기쁨과 놀라움이 충분히 전해져서 타티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스칼렛이 얼마나 간절하게 아이를 기다려 왔는지 잘 알고 있다.
일전에 막사에서 ‘왜 나한테만 아이가 안 오지?’ 웅얼거리던 시무룩한 눈빛이 마음에 남아 있었기에, 그녀는 이게 자신의 일처럼 기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노파심을 감출 수 없어 코니에게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어디 가서 얘기하고 다니면 안 돼. 나중에 정식으로 발표할 때까지는. 무슨 뜻인지 알지?”
그러자 코니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너무나 삭막해진 주변 환경을 둘러보았다.
살수들은 그녀들이 뭐라고 속삭이건 간에 관심 하나 없는 표정이었다.
수다는커녕 어떤 말을 걸어도 받아 줄 것 같지 않았다.
코니는 체념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항의하듯 물었다.
현실 순응과 부정의 단계를 동시에 거치는 중이었다.
“……제가 저 사람들 중에 누구한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지요?”
타티아나는 그 말에 너무나 미안해하면서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