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08
송유겸.
눈앞에 있는 흥미로운 청년의 이름이다.
초봄에 귀령사객 사건 때, 보고서를 통해 그 이름을 처음 접했다. 당시에 제갈수광과 함께 있었던 세 명의 관도 중 한 명이었다.
제갈수광과 육남춘을 나름 보조했던 모양인데, 그때는 크게 주목할 만한 게 없었다.
자연스럽게 뇌리에서 잊혔던 그 이름은 태화지부 사건 보고서에서 다시 등장했다.
남궁찬이 등장하기 전까지, 교관 제갈수광과 함께 가장 큰 활약을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다수의 무림맹 무인들이 함께하고 있었기에 보고가 제법 세세했다.
빼어난 암기술로 적재적소를 지원했으며, 당시에 위협적이었던 적측 절정고수 궁수로부터 무인들과 관도들을 지켜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때 송유겸이라는 이름이 제대로 기억되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계반이라는 정보와 함께.
이후에 그 이름은 장강 사건 보고서에 다시 등장했다.
동검대의 무인들, 북검대에서 생존한 무인들, 북부지맹 측 교관들의 보고서에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 이름은 두 개였는데, 그게 바로 제갈수광과 송유겸이었다.
두 사람은 같이 움직이며 황보충과 악미조를 구했고, 이후에는 깊숙한 선실 안에서 차우기, 추소륵, 모용리를 포함한 승객들을 구출했다.
틈틈이 물속에 들어가서 오래 머물렀다는 것으로 보아 배를 전복시키려던 수적들과 수중전도 펼쳤던 모양이다.
수중전 후에는 갑판 위로 올라와 곧바로 그 위의 전투를 지원했는데, 그 와중에도 큰 활약들을 펼쳤다고 적혀 있었다.
그 보고서를 통해 송유겸이라는 이름이 뇌리에 완전하게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 통합 잠룡대전에 참여한 관도들의 명부를 확인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신기한 걸 발견했다.
송유겸이 예비명단이라는 사실이었다.
알아보니 송유겸은 동부 예선에 참가조차 하지 않았는데, 교관 제갈수광이 특별히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동부지맹의 다른 관도 대신 우연히 개인전에 출전하여 이렇듯 우승까지 차지한 것이다.
교관인 저 제갈수광은 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재주가 빼어난, 인재 중의 인재다.
잠룡관의 교관으로 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물이라, 오래 전부터 수도 없이 무림맹의 직책을 권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지위와 대우를 보장해도 그는 한사코 거절하기만 했었다. 맹주의 입장에서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중요한 건, 그렇게나 뛰어난 제갈수광이 송유겸을 각별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그간의 모든 상황들을 따져 봐도 그 사실을 추측할 수 있는데, 지금 둘이 같이 앉아 있는 분위기를 보니 실제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면 제갈수광이 왜 송유겸을 각별히 아낄까.
송유겸이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할 만한 실력자라서?
그런 단순한 이유일 리가 없다.
저 송유겸에게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본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송유겸을 직접 마주하고 보니, 그게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래서 흥미로운 거다.
첫째, 송유겸은 긴장을 안 하고 있다.
맹주의 역할을 맡은 후로 매년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자를 봐왔다. 직접 시상했고, 이후에 만찬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항상 첫 대면을 해왔다.
아무리 내로라하는 문파나 세가 출신의 우승자라도, 맹주인 자신과 대면할 때는 모두가 조금이라도 긴장을 했다. 심지어는 과거의 우승자인 남궁찬마저 그랬었다.
자신은 백도 무림 권력의 정점에 있는 존재고, 상대는 아직 어린 나이의 관도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다들 긴장감을 감추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한데 송유겸은 반대다.
긴장한 모습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긴장을 안 하는 게 이상해 보일까봐, 일부러 긴장한 척하려 노력하는 기색까지 보이고 있다.
저런 평정심을 갖추는 게 생각으로는 쉬워 보여도 실제로는 결코 쉽지 않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정신적 단단함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정도만으로도 물건은 물건이다.
둘째, 무공 경지를 짐작할 수가 없다.
백도제일인을 넘어 천하제일인이 된 입장이다 보니, 잠룡관도들의 경지 정도는 웬만해서는 쓱 보면 알 수 있다.
한데 송유겸의 경우에는 그게 상대적으로 쉽지 않다.
사건 보고서들을 읽지 않았다면, 그리고 송유겸이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하지 않았다면, 그냥 이렇게만 봐서는 그가 실력자라는 걸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그냥 계반 관도 같다.
더 신기한 건, 내력에서 사기나 마기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정기마저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체 어떤 종류의 무공을 익혔기에 저렇단 말인가.
이러니 더 흥미로울 수밖에.
“듣자하니 강서 광풍현의 송가장은 원래 무가가 아니었다고 하던데.”
“예.”
“그런 환경 속에서 너와 같은 아이가 나오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대단하구나.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까지 했으니 가문에서도 기뻐하시겠고.”
“예. 많이 놀라실 거라 예상됩니다.”
대꾸하는 송유겸의 표정을 보니 가문이나 가족에 대한 애정이 그리 깊지는 않은 느낌이다.
“문파 같은 곳에서 배운 것도 아닌 모양이던데, 어딘가의 고인에게서 따로 사사하기라도 했느냐?”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우연히 약간의 기연을 얻어서 실력이 상승했는데, 이후에 제갈 교관님께서 많이 다듬어 주셨습니다.”
어떤 기연이었는지 매우 궁금한데, 이런 자리에서 꼬치꼬치 물을 문제는 아니다.
“내내 궁금한 게 있었는데, 그 실력으로 왜 계속 계반에 머물렀던 것이냐? 그 실력이면 당연히 갑반에 갈 수 있었을 테고, 그곳에 가면 여러 뛰어난 관도들과 친교하며 인맥을 만들기도 좋았을 텐데?”
“당연히 인맥도 중요하겠습니다만, 아직 어린 만큼 저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가뜩이나 제가 혼자 조용히 지내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기도 합니다. 거의 모든 관도들이 계반 관도들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기에, 조용히 수련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입니다. 생활도 자유롭고요.”
“허허. 조용히 지내고 싶다는 사람이 통합 잠룡대전에서 덥석 우승을 했단 말이냐?”
그러자 송유겸이 난감함이 깃든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아, 그건 여러 사정들이 있었기에······.”
“어쨌거나 이제 조용히 지내긴 글렀구나? 잠룡관에 돌아가면 주변에 관도들이 엄청나게 모여들 테니.”
“실은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반은 어찌할 것이냐?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까지 했는데도 계반에 남을 셈이냐?”
“예.”
매우 단호한 대꾸다.
“푸허허! 하여튼 계반에 대한 애착만큼은 남다르구나.”
“애착이라기보다는 제가 이미 계반 생활에 너무 적응이 되어버린지라······. 아하하.”
보통의 관도들은 자신과 대화할 때, 평범한 화제임에도 불구하고 대답이 한 박자씩은 늦는다. 단정한 답을 하고자, 생각을 정리한 후에 대꾸하기 때문이다.
한데 송유겸은 딱히 꾸며서 답하는 느낌이 없이 대꾸가 바로바로 나온다. 그렇다 보니 대화하기도 편하다.
“삼청산에서도, 태화지부에서도, 크게 다쳤었다고 들었다. 맹주의 입장에서 너무 미안하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장강의 적도들을 상대했다고도 들었다. 참으로 대견하구나.”
“과찬이십니다. 솔직히 저도 많이 두려웠습니다. 운이 좋아서 이렇듯 멀쩡하게 돌아다니고는 있습니다만, 실은 그들과 또 마주칠까 두렵습니다. 기세도 실력도 무시무시한 자들이라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아무리 저 송유겸이 대단한 면이 있다 해도, 사파인들을 상대하는 게 두렵지 않을 수는 없다.
생사가 오가는 전장인 데다가, 실제로 송유겸은 그들과 싸우다가 크게 다치기도 했으니까.
송유겸이 조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침 얘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 사파 세력, 금방 정리가 되겠지요?”
무림맹의 역량을 믿고 싶다는 기색이다.
“허허. 네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최선을 다해야겠구나.”
송유겸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런 송유겸을 향해 말을 이었다.
“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들의 도움도 좀 필요할 것 같다.”
“예······? 도움이라시면······.”
송유겸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고 있다.
마침 음식을 입으로 집어넣던 육남춘의 눈동자에도,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던 제갈수광의 눈동자에도 의문이 담기고 있다.
송유겸을 향해 말했다.
“관도들의 도움을 말하는 것이다.”
세 사람의 눈동자가 커졌다.
“맹주님의 말씀인즉, 사파 세력과의 전투에 관도들을 참여시키겠다는 뜻이십니까?”
제갈수광의 질문이었다.
“전체적으로는 그러하네.”
그러자 이번에는 옆에 앉은 육남춘이 물었다.
“맹주님, 아직 어린 관도들을 동원해야 할 만큼 사안이 심각합니까?”
“심각하다고 하기 보다는, 관도들의 도움이 있으면 일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다고 해야겠지.”
그렇게 대꾸해준 후, 천천히 술잔을 비웠다.
조사를 통해 드러난 사파 세력을 제대로 처단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전력이 필요하다.
혹시 모를 마교의 도발에 대비까지 하며 사파 세력을 처단해야 하는 상황에서, 골칫거리는 동부 해안의 해적들이다.
동부지맹을 통해 다수의 전력을 투입시키고 본맹에서도 적지 않은 지원 전력을 파견했으나, 그쪽의 전황이 쉽사리 호전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결국 사파 쪽에 투입할 전력도 필요하고 해적 쪽에 투입할 전력도 필요한 상황이다.
무림맹이 상시로 보유하고 있는 전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대문파와 명문세가들에서 전력을 지원받기로 협의까지 마친 상태다. 이번에 모인 수장들이 흔쾌히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관도들에 대한 내용도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얘기였다.
물론 사파에 관련된 사안은 여러 모로 보안을 요하는 사안이라, 모든 걸 공개할 수는 없다.
‘그래도 저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의 답은 줘야겠지.’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관도들을 무작정, 강제적으로 전투에 참여시키겠다는 뜻이 아닐세. 그래선 안 되지. 일단 각 지맹의 갑반 관도들 위주로만, 그것도 자원하는 관도들에 한해서만 참여시킬 계획이네. 만약 인원이 모자라면 을반에서도 지원을 받을 것이고, 그래도 인원이 모자란다면 최대 병반까지는 고려하고 있네.”
최상위반 위주인데다가 자원의 형식이라고 하니, 세 사람도 이제야 어느 정도 납득하는 분위기다.
“어차피 각 잠룡관에서는 조만간 알게 될 사안이라 이 자리에서 밝히는 걸세.”
* * *
육남춘과 제갈수광은 생각에 잠긴 분위기다.
그 틈에 나는 얼른 맹주 운천흠의 잔을 채워주었다.
운천흠이 나를 향해 빙그레 웃더니 곧바로 잔을 비웠다.
잔을 내려놓으며 운천흠이 말했다.
“제갈 교관이 여러 관도들과 같이 싸워봤으니 더 잘 알겠지만, 최상위반인 갑을반의 관도들은 전력상으로 충분히 정예 전력일세. 그들에게 부족한 건 경험일 뿐이지.”
맞는 얘기긴 하다.
가뜩이나 강제 동원도 아니고 자원의 형식이니 크게 문제될 일도 없긴 하다. 본인의 선택이니까.
제갈수광이 대꾸했다.
“맹주님의 말씀에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경험을 쌓는 것 치고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게 염려됩니다.”
“당연한 지적일세. 그러니 안전장치를 마련해줘야지.”
“안전장치라 하심은······.”
“보안상 지금 밝힐 수는 없네. 그러나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충분한 안전이 보장되리라는 점만큼은 약속할 수 있네. 관도들도 그 속에서 경험을 쌓으며 성장할 수 있겠지.”
빙그레 웃는 운천흠의 표정을 보니 그냥 하는 얘기는 아니다.
무림맹주이자 현재의 천하제일인 씩이나 되는 존재가, 저런 말을 허투루 내뱉을 리도 없다.
뭘 믿고 저러는 걸까.
어쨌거나 내 입장에서는 흥미가 동하는 사안이다.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까지 한 마당이라, 잠룡관에 있어 봐야 귀찮은 일만 잔뜩 생길 가능성이 높다.
그러느니 전장에 있는 게 낫다.
가뜩이나 나는 전생에 지금보다 경지가 낮은 상태에서도 흑풍대원으로서 전장을 잘만 누비고 다닌 몸이다.
게다가 내가 무림맹의 중심부에 있지 않은 이상, 강호 돌아가는 판을 알려면 전장에 있어야 한다. 전장에 있어야만 알게 되는 정보들이 있기 때문이다.
운천흠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는 자원할 테냐?”
은근히 내가 자원하기를 기대하는 투였다.
곧바로 대꾸해줬다.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시간을 들여 충분히 고민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