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109
맹주 운천흠과의 자리를 마친 후, 나는 문상 사마진, 무상 백리결, 집법당주 선우훤이 있는 자리로 이동해야 했다.
축하를 받으며 세 사람이 주는 술도 마셨고, 간단한 대화들도 나눴다.
그 후에는 각 지맹의 잠룡관주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이동하여 그들이 주는 술도 한 잔씩 받아 마셨다.
상석에서의 자리를 마친 후에는 타 지맹의 여러 관도들과 어울렸다.
나는 우승자인 만큼 여기저기에서 환영을 받았다.
처음에는 제갈건, 선의림, 풍세학 등의 서부지맹 관도들과 어울렸다.
선의림과 풍세학은 나한테 져서 각각 사강과 팔강에서 탈락했던 우승 후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먼저 우승을 축하해주며 나와 건배했다.
이후에는 당효광, 서문규, 잠관철, 오숭희 등의 남부지맹 관도들과도 어울렸다. 그들 또한 내 우승을 축하해줬고, 대단하다며 추켜 세워줬다.
윤단영, 차우기 등의 각 지맹 교관들이 주는 술도 받아 마셨고, 그 후에는 평소 친분이 있던 북부지맹의 관도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셨다.
결승에서 나한테 졌던 추소륵이 가장 먼저 내게 술을 따라줬고, 이후에는 황보충, 남군호, 악미조, 모용리 등과 어울리며 함께 술을 마셨다.
특히 황보충이 나를 다른 곳으로 보내주지 않을 기세라, 나는 적당한 시점에 측간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 그 자리를 벗어났다.
측간에 다녀와서 다시금 만찬장에 들어가려는데 갑작스럽게 전음이 들려왔다.
[린아한테서 봉투는 받았느냐?]
선우훤의 목소리였다.
입구에서 제법 떨어진 위치의 나무 아래에 서있는 선우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자, 선우훤이 도약하더니 나무 중간쯤의 두툼한 가지 위로 올라갔다.
나도 즉시 도약하여 같은 가지 위에 올랐다.
나란히 가지에 앉자 선우훤이 전음으로 말했다.
[다시 한 번 우승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당주님.]
[봉투는 받았고?]
[예. 아까 받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액수가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다. 네 덕분에 딴 돈이기도 하고, 린아를 잘 보살펴주고 있는 데 대한 약간의 보상일 뿐이니까.]
역시나 남궁벽과 같은 이유를 대고 있다.
[한데 무슨 돈을 그리 많이 거셨습니까? 무림맹의 집법당주께서 그런 사행성 내기에 큰돈 걸고 그래도 되는 겁니까?]
[푸허허헛! 하여간 맹랑한 녀석이로다. 내가 맹의 자금을 유용한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문제겠느냐? 통합 잠룡대전 시기에는 누구나 하는 내기다. 가뜩이나 그런 내기에 오가는 돈들은 다 눈먼 돈들이기도 하고.]
[눈먼 돈이라고 하시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내가 그렇게 대꾸하자 선우훤이 웃었다.
잠시 후 선우훤이 물었다.
[소성심단은 잘 복용했느냐?]
[예.]
[생색 한 번 내자면, 소성심단을 부상으로 주자는 얘기는 내가 먼저 꺼냈었다.]
[헛! 당주님께서요?]
[처음에는 반대 의견이 조금 더 많았다. 하지만 강호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니, 가능성 있는 후기지수를 더 키워줘야 한다는 식으로 논리를 펼쳤지.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자 정도면 가능성과 자격은 충분한 셈이니까.]
선우훤의 전음이 이어졌다.
[결국 찬성 의견이 더 많아졌다. 서부, 남부, 북부지맹은 다들 우승 후보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본인들 쪽에서 차지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컸던 거지. 선우세가는 동부지맹 소속이라 의도를 의심받을 일도 없었던 게야. 물론 나는 애초에 네 녀석이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제안한 거였다. 마침 네가 차지했으니 내 의도대로 된 셈이지.]
선우훤은 빙그레 웃고 있지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소성심단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 노인네 때문이었다니.
선우훤이 얼마나 나를 생각해주고 있는지 알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다.
[감사합니다, 당주님.]
[감사할 것 없다. 남들이 들으면 우리가 짠 줄 알겠다. 네가 네 능력으로 차지했을 뿐이다.]
민감할 수도 있는 내용이니, 되도록 누군가에게 퍼트리지 말라는 뜻도 담겨 있다.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내가 대꾸하자 선우훤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나무에서 내려서서 다시금 만찬장으로 향했다.
제일서고에서의 우연한 인연이 이렇듯 이어져 이런 관계에까지 이르렀다.
참으로 든든하고 고마운 인연이다.
만찬장에 복귀한 후에는 아까 어울리지 못했던 다른 관도들과 어울렸다.
어느 시점 이후에는 맹주 운천흠을 비롯한 어른들이 모두 퇴장하여, 이후부터는 교관들과 관도들이 더욱 편안하게 어울리며 먹고 마셨다.
젊은 혈기들이라 지치지도 않고 늦게까지 먹고 마셔댔기에, 만찬은 축시정(밤2시)이 되어서야 끝났다.
* * *
이틀 후.
무림맹 본맹에서의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어, 각 지맹별로 속속 무림맹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동부지맹도 무림맹을 벗어났다.
올 때도 함께였던 동검대의 무인들 외에 잠룡관주 육남춘도 동행했다.
장강의 수로를 이용하기로 했는데, 무림맹에서 배를 제공했고 무림맹의 호위 무인들이 강서의 남창지부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언제 또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동부지맹뿐만 아니라 다른 지맹에도 비슷한 수준의 호위를 제공했다는 모양이다.
* * *
이레 후, 우리는 강서의 남창지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배를 타고 왔기에 남창지부에서 하루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잠룡관으로 향하기로 한 것이다.
남창지부에는 조별 활동 때도 와서 머물렀던 적이 있다. 낯설지 않은 곳이다.
우리 교관들과 관도들은 남창지부에서도 큰 환영을 받았다.
동부지맹의 잠룡관이 통합 잠룡대전에서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이들의 관심이 우승자인 내게 집중되었다.
남창지부장을 비롯한 그곳의 고위 인사들과 함께 식사했고, 교관들과 관도들 모두가 귀빈 숙소를 배정받았다.
남창지부에서는 자유 시간이 주어졌기에, 나는 남창을 둘러보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홀로 지부를 벗어났다.
신시초(오후3시) 무렵에 지부를 나서서 일다경 후쯤에 도착한 곳은 바로 연주상단의 남창지점이다.
정문에서 청여홍의 잠룡관 친우임을 밝히고 이전에도 찾아온 적이 있다고 밝히자, 정문 무사 중 한 명이 서둘러 안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안으로 향했던 그 무사가 빠르게 달려 나왔다.
“공자를 귀빈 응접실로 모시라는 분부십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무사를 따라 안으로 향했다.
귀빈 응접실이라는 곳으로 들어서니 반가운 두 얼굴이 보였다.
연주상단 남창지점의 지점장인 관대평과, 총관인 양운필이었다.
“오오! 송유겸 공자! 어서 오시오!”
“어서 오시오, 송 공자!”
두 사람이 매우 반갑게 나를 맞았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나를 환대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통합 잠룡대전의 소식은 들었소! 우승을 차지하셨다고······!”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오! 우리가 아는 송 공자가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시다니······!”
관대평과 양운필이 차례로 놀람을 표했다.
역시나.
상인들은 정보에 빠르니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정말 대단하시오, 송 공자. 수고 많으셨소.”
관대평의 말이었다.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허허. 겸손의 말씀인 건 알겠으나, 통합 잠룡대전이 운 좋다고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대회가 아니잖소. 게다가 알아보니 강력한 우승 후보들을 연달아 꺾으며 우승을 차지한 거라던데.”
양운필의 말이었다.
관대평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쯧. 그것까지 알고 있었어?
자리에 앉고 나자 관대평이 말했다.
“여러모로 바쁘실 텐데 어인 일로 찾아오셨소?”
“아시다시피 일전에 제가 청 소저를 비롯한 잠룡관의 친우들과 함께 정가장에서 합숙을 했던 적이 있었잖습니까.”
“그랬었지요.”
“가서 보니 참으로 마음에 드는 곳이었습니다. 한데 그곳에 머물던 중에 어쩌다가 정가장의 어려운 재정 상황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마침 정 장주께서 정가장의 부지 일정 부분을 팔아서 재정을 마련할 계획이라기에, 곧바로 제가 아는 분과 연결을 시켜드렸습니다. 말씀드렸듯 제 마음에 드는 곳이라, 이왕이면 제 지인이 매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지요.”
정가장에 머물 때 정우립과 여러 모로 말을 맞췄던 것들이 있으니, 그때의 내용대로 적당히 지어서 얘기한 것이다.
“아하! 안 그래도 일전에 정 장주께서 우리에게 빌려갔던 대출금을 갚아주셨소. 들어보니 좋은 분을 만나서 부지를 매도했다던데, 그게 송 공자의 지인이셨구려.”
“하하,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지인께서 한동안 멀리 출타하게 되셨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삼 년은 걸릴 것 같다고 하십니다. 그 기간 동안 정가장 부지 내의 토목 공사를 진행할 계획이신데, 그에 관련된 일을 제게 맡기셨습니다. 설계도를 주셨고, 그 설계도에 따라 공사를 진행하도록 맡기신 겁니다.”
“아하.”
“그 공사를 믿을만한 곳에 맡기고 싶어 하십니다. 그 일로 이곳 연주상단의 남창지점이 생각났습니다. 강서 땅에 여러 상업 시설들을 건설한 경험이 있다고 알고 있어서요. 마침 두 분과 저는 청여홍 소저와의 인연으로 친분도 있으니, 우선적으로 견적을 받아보고 싶은 겁니다.”
내 말에 두 사람이 반색했다.
관대평이 말했다.
“오오! 잘 생각하셨소. 조금만 조사해 봐도 아시겠지만, 우리 쪽에서 운영하고 있는 업체는 실력도 좋소. 송 공자는 아가씨의 친우이시니, 상단주님께 말씀드리면 자재들에 대한 단가도 많은 부분에서 조정이 가능할 거요.”
관대평이 자신 있다는 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가뜩이나 송 공자는 이번에 통합 잠룡대전에서 우승까지 차지하셨으니 더욱 잘 된 일이오. 상단주님의 입장에서도 아가씨에게 그런 친우가 있다는 게 얼마나 흐뭇하시겠소?”
연주상단주가 잘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내가 기대했던 반응을 보이고 있다.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자면 미래가 창창한 후기지수라 할 수 있다.
그런 후기지수에게 잘 보여 놓으면 연주상단의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다. 그 후기지수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승자인데다가 청여홍의 친우이기도 하니, 연주상단의 입장에서는 이문이 다소 줄더라도 웬만하면 잘해주고 싶을 수밖에 없다. 사람에 대한 투자의 개념인 거다.
내 입장에서는 단가를 절약할 수 있는 데다가 믿을만한 이들에게 공사를 맡기는 셈이 된다.
이왕 우승하게 되었으니, 그걸로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다.
배를 타고 오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우리는 곧바로 일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나는 설계도를 펼친 후, 정가장이 지금껏 유지해온 역사적, 전통적 가치를 최대한 보존하는 선에서 공사를 진행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곧 두 사람이 설계도를 토대로 여러 자재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견적을 뽑았다.
총관인 양운필이 주판을 튕기는 솜씨는 가히 절정이었는데, 관대평도 주판을 들고 따로 뭔가를 계산하는 모습이었다.
이후에 양운필을 통해 대략적인 예산이 나왔다.
“이게 대략적인 예산이오. 물론 우리 상단의 귀빈가가 적용되었소.”
내가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경제적인 액수로 보였다.
“하하. 귀빈가라니. 감사합니다.”
“혹여 다른 곳에 가서 견적을 뽑으신다 해도, 우리가 적용한 고급 자재들을 기준으로, 그 어디에서도 이처럼 낮은 예산표를 받아보긴 어려우실 거라 자부하오.”
내가 미소를 지어 보이자 이번에는 관대평이 말했다.
“하지만 송 공자는 그냥 귀빈이 아니라 최고귀빈이시오. 최고 귀빈가가 적용되면 이렇게 되오.”
관대평이 빙그레 웃으며 숫자가 적힌 종이를 내미는데, 양운필이 말해준 액수의 팔할오푼 수준에 불과했다.
그가 따로 계산하고 있었던 게 이거였던 모양이다.
“헛! 이렇게까지······.”
내가 놀란 반응을 보이자 관대평이 씩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아까도 말씀드렸듯, 우리 상단주님께서도 송 공자를 특별하게 여기실 수밖에 없소. 아가씨의 친우인데, 그냥 친우도 아니고 통합 잠룡대전의 우승자인 친우잖소. 지금 확언을 드릴 수는 없으나, 상단주께서도 그 점을 충분히 고려하시지 않을까 싶소. 내가 노력해 보겠소.”
“하하. 감사합니다, 관 지점장님. 노력해 주시는 건 당연히 감사한 일이나, 부디 지점장님께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만 해주십시오.”
“허허, 알겠소. 그래도 최선을 다할 것이오. 사실, 상단주님의 심기를 약간 거스르는 정도는 괜찮소. 송 공자에게 잘 해드리면 여홍 아가씨가 기뻐하실 테니, 우리는 그걸로 족하오.”
관대평이 그렇게 말하자 양운필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눈빛에서 묘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예전에 봤을 때는 그냥 이들이 청여홍에게 매우 극진하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상단주의 장녀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한데 지금 보니 청여홍에 대한 감정이 남달라 보인다.
청여홍의 줄에 선 느낌이라고 할까.
청여홍이 연주상단의 후계 구도에서 제법 영향력을 보이고 있는 건가?
그건 여식이라 쉽지 않을 텐데?
하면 설마, 남창지점이라도 물려받는 건가?
남창지점을 이끌고 있는 저 두 사람의 태도를 보면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청여홍을 은근슬쩍 한 번 떠봐야겠다.
아직은 가정일 뿐이지만, 만약 그녀가 연주상단의 남창지점을 맡게 된다면 내 입장에서도 환영할 일이다.
평소 나를 대하는 청여홍의 태도를 생각할 때, 여러 모로 편해질 일들이 많을 테니까.
“좋은 제안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큰 지출인데다가 제 돈도 아니라서 바로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당연한 말씀이시오.”
관대평이 대꾸하자 양운필이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혹여 결정을 내리시거든 옥산현에 있는 우리 쪽 연락사무소에 서신을 전달해 주시오. 이게 약도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송 공자. 꼭 일 때문이 아니라도, 언제든 편하게 방문해주시오. 식사하러 오셔도 좋고, 차 한 잔 하러 오셔도 좋소.”
“하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후에는 두 사람과 인사한 후 연주상단의 남창지점을 벗어났다.
정가장에도 들르고 싶었지만 애초에 그럴 만큼의 시간은 없었기에, 나는 곧바로 무림맹 남창지부로 복귀했다.